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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호 특집] 손원평 "아주아주 특별한 애벌레"

상상의 우주를 열어준 작가의 책: 『아주아주 배고픈 애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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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십 년 만에 다시 에릭 칼의 그림을 만난 순간, 나는 내 안의 어딘가에 남아 있던 유년의 색채를 반갑게 마주할 수 있었다.


채널예스 100호를 맞이해, 커버를 장식했던 17인의 작가에게 
상상의 우주를 열어준 책을 물었습니다.



예전부터 나는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조언으로 어떤 것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많이 읽고 많이 쓸 것’이라는 대답은 다소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건 ‘수학 문제집을 많이 풀어야 수학을 잘하게 된다.’ 따위의 조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야기와 언어에 대한 감을 잃지 않는 데야 도움이 되겠지만 글쎄. 그런 기본적인 조언에 얹을만한 다른 이야기는 없을까. 깊이 생각하고 세상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고 항상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며… 여러 조언이 있겠지만 북토크에서 한 중학생이 내게 그 질문을 했을 때 정작 내가 들려준 대답은 다양한 음악을 많이 들으라는 조언이었다. 

예술가에게 어떤 재능이 있다면, 적어도 내가 가진 재능은 글을 잘 쓰는 재능은 아닌 것 같다. (내 직업이 예술가의 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내게 재능이라 칭할만한 것이 있다면!) 내 재능은 기억력과 치환 쪽에 가까울 거다. 그렇다. 일단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애석하게도 암기력과는 완전히 트랙이 다른 기억력이다. 이를테면 누군가와 나눴던 순간의 구체적인 장면, 상대의 표정, 어미의 처리와 뉘앙스, 촉감 같은 걸 잘 기억한다. 그렇다고 꼭 사진을 찍은 것처럼 정확하고 유용한 기억력도 아니다. 사물 그 자체의 성질보다는 사람의 특징이나 누군가가 무심코 했던 말, 그때 주변을 둘러싼 기류나 오갔던 표정, 어떤 것을 보거나 들었을 때의 감정을 잘 기억하는 것 같다. 조금 우스운 얘기지만 때때로 그런 감정, 혹은 누군가의 인상은 색깔이나 음률로 저장되기도 한다. 단색인 경우, 여러 톤이 거칠게 섞인 화풍, 길고 지루한 단선율, 혹은 기괴하지만 조화로운 불협화음도 있다. 어쨌든 누군가, 혹은 어떤 일을 떠올리면 대략 어떠한 색이나 톤이 머릿속에 함께 그려진다. 글을 쓸 때 그런 기억을 그대로 옮겨쓰는 건 별로 재미가 없기 때문에 항상 내 머릿속의 소리 나는 물감통을 뒤집어 적절히 뒤섞고 음정을 바꾼다. 그러면 기억과 경험을 일대일로 추출한 것이 아닌, 나만의 이야기와 인물이 탄생한다. 

설명하자니 어려운데, 이런 일련의 절차가 (몹시 귀찮기는 하지만) 작업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행해진다. 그게 (독자의 판단이나 감상과 별개로) 내가 다양한 인물과 이야기를 구현해 내는 비결이다. 막상 글로 옮겨 적고 보니 재능보다는 습성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타고난 습성인지 길러진 습성인지는 모르겠다. 어렸을 때 특별히 어떤 훈련을 하거나 교구를 사용한 적은 없기 때문에 두 가지 모두 적당히 결합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첫째가 어렸을 때 아주 오래된 기억을 마주한 적이 있다. 책방의 유아 코너에서 초록색 애벌레가 그려진 책을 발견한 것이다. 몇십 년간 완전히 잊고 있던 기억이 황급하게 길어 올려졌다. 서너 살 때, 한국은 아니었고 영국에서였다. 누군가와 어디에서였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창백한 달님의 표정, 그 뒤 페이지부터 화사하게 페이지를 채운 다양한 색깔들, 애벌레가 먹던 과일 하나하나의 모양과 색채, 그리고 조금 닳은 통통한 연두색 실의 촉감이 생생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손끝의 땀을 머금은, 보드랍고 통통한 실. 아마도 유치원에서 실을 이용해 놀이를 했던 것 같다. 초록색 실이 바로 애벌레다. 애벌레가 과일과 여러 가지 먹을거리를 꿰고 나온다. 나는 애벌레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책장을 넘겼을 것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가장 특징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사람마다 이게 고통이 될지 환희가 될지는 다르겠으나) 부모의 이름을 빌려 다시 어린이가 되어볼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유년으로 돌아가 아이와 어른 모두의 눈을 가지고 그 세계를 탐험할 수 있다. 때로는 시시해 보이는 그 세계는 조금만 몰입하면 환상과 경탄으로 가득 찬 곳이다. 아이들은 타고난 상상을 통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넘는다. 우리는 실로 형상화한 애벌레가 되어 애벌레가 자취를 남긴 구멍을 하나씩 통과한다. 애벌레가 먹고 지나간 음식들을 하나씩 맛본다. 냠냠 맛있다, 먹어 봐. 하나 더 줘. 안 돼, 내 거야. 같은 말을 하며 음식을 맛보고 권하고 탐낸다. 파랑 자두, 빨강 딸기와 주황 오렌지를 지나면 한눈에 보기에도 맛있는 아이스크림, 소시지, 햄, 케이크가 나타난다. 그것들은 단지 그림이 아니라 실제로 맛과 향을 풍기는, 와, 소리가 나오는 음식들이다. 너무 많이 먹어버린 애벌레가 배탈이 나 울상을 짓는다. 우리는 얼른 다음 장으로 도달해 애벌레에게 커다란 풀잎을 먹인다. 배탈을 극복한 애벌레는 스스로 고치를 짓고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스스로 고치를 뚫고 나온다. 그렇게 먹어도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음식들을 뒤로 하고 마침내 애벌레가 커다란 나비가 된 모습을 보고 우리는 마음껏 기뻐한다. 한 점의 그림자도 담겨있지 않은 충만한 기쁨이다. 

몇십 년 만에 다시 에릭 칼의 그림을 만난 순간, 나는 내 안의 어딘가에 남아 있던 유년의 색채를 반갑게 마주할 수 있었다. 그것을 다시 말랑하고 보드라운 존재와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이토록 오래 까맣게 잊고 있던 색깔이 단번에 이렇게나 생생하게 떠오른다는 사실이, 나도 몰랐던 어떤 종류의 각인이 경이로웠다. 내가 인상을 색채나 음률로 분류하고 감정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건 어린 시절 경험했던 자연과,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한 책 덕이 아니었을까? 에릭 칼의 책도 조금쯤은 내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조금보다 훨씬 더 많이 말이다.

책 속의 색깔과 이야기들이 요즘 아이들의 정서에도 큰 영향을 미칠지는 확신이 없다. 아주 어려서부터 현란한 영상 콘텐츠에 노출되는 요즘 아이들에게 책 속의 색깔은 이미 시시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배탈이 났던 애벌레가 건강한 음식을 먹고 고치를 뚫고 아름다운 나비가 됐을 때 모두가 안도하며 기뻐한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1969년에 처음 출판됐다. 어느 날 장난삼아 종이 뭉치에 펀칭기로 구멍을 뚫던 에릭 칼은 그 구멍들이 책벌레가 낸 구멍이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책벌레는 곧 초록색 애벌레로 바뀌게 됐고 그렇게 이 책이 탄생했다. 창백한 백지, 혹은 난삽하게 무언가가 쓰여있었을 구멍 뚫린 종이에, 찬란한 색과 단순하지만 감동적인 이야기를 입힌 건 에릭 칼만의 따뜻한 시선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렇게 『아주아주 배고픈 애벌레』는 50년이 훌쩍 넘은 시간을 넘어서까지 여전히 아이들의 마음에 다채로운 빛깔을 선사하고 있다. 이렇게나 오래도록 사랑받는 책을 쓴 작가가 새삼 부럽다. 특히 구구절절한 단어와 문장이 아닌, 간단한 그림과 이야기로 많은 아이들의 가슴에 따뜻하고 밝은 색채를 아로새겼다는 사실이 참 고맙다. 글을 잘 쓰는 비결에 대해 ‘음악을 많이 듣고 그림을 많이 보라’고 말하는 나의 조언은 어쩌면 ‘말과 글자가 적은 예술이 더 강력하다.’라는 무의식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에릭 칼은 우리 집 둘째가 태어나고 석 달 뒤에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오늘도 나는 아이와 함께 책을 펼친다. 이제 안 아파, 라고 애벌레를 위로해 주는 아이와 함께 우리는 커다란 나비의 모습에 감탄하며 항상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책을 덮는다.

배고픈 애벌레야. 오늘도 이것저것 실컷 먹으렴. 그리고 이왕이면 나도 한 입만!




*손원평

소설가. 첫 장편소설
『아몬드』로 제10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여 등단했다. 제주4·3평화문학상, 일본 서점대상 등을 수상했다. 『프리즘』, 『타인의 집』『튜브』 등을 썼다.



아주아주 배고픈 애벌레
아주아주 배고픈 애벌레
에릭 칼 글그림 | 김세실 역
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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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손원평

아주아주 배고픈 애벌레

<에릭 칼> 글그림/<김세실> 역13,5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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