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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호 특집] 이수지 "뭣이 중한지 모르는 부조리한 세계"

상상의 우주를 열어준 작가의 책 : 『줄어드는 아이 트리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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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이책은, 더 다양해지는 게 좋겠다. 나와 같은 어린이를 포함하여 어린이들은 매우 다양하며, 그 어떤 주제에도 매우 너그러우므로.


채널예스 100호를 맞이해, 커버를 장식했던 17인의 작가에게 
상상의 우주를 열어준 책을 물었습니다.



세상 산만하지만, 나의 작업실 책장의 칸들은 저마다 보이지 않는 제목들을 달고 있다. “언제일지 알 수는 없지만 도움이 될 만한 책들”, “들춰보면 나를 둥실 떠오르게 만들지도 모를 책들”,“나를 다시 돌아가게 만드는 책들” 같은.

“나를 다시 돌아가게 만드는 책들”은 추억으로 소환시키는 책이라기보다는, 내가 원래 뭘 좋아했었는지, 뭘 하고자 했었는지, 나를 미혹한 최초의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떠올리게 만드는 책들이다. 그 칸에 『줄어드는 아이 트리혼』이 몇 권 꽂혀있다.

사 모은 여러 판본의 『줄어드는 아이』 중, “값 900원” 딱지를 달고 1978년 9월 1일에 출간된 빛바랜 도서 출판 두레 판본이 맨 앞에 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아마도 부모님의 책장에서 꺼내어 읽고 넣었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뽑아와 여러 번 읽고선 결국 내 책장에 끼워 넣었을 것이다. 그 이후 이사 때마다 다른 책은 몰라도 이 책만은 잘 챙겼고, 그리하여 내 책장에서 지난 40여 년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말투도 고색창연한 두레 출판사 판본 책의 시작은 이렇다.

“참 이상야릇한 일이 트리호온에게 일어났어요. 처음, 그 일은 풍선껌이며 빨아먹는 막대 사탕 따위를 늘 얹어두곤 하던 벽장 안 시렁에 아무래도 손이 닿지 않는 걸 깨달으면서 시작된 것이었어요.”

트리혼(트리호온)은 어느 날 자신이 작아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부모에게 말해보지만, 아버지는 “줄어드는 사람이란 없어”로 일축하고, 엄마는 옆집 애버네일 부인네 케이크는 늘 잘 부푸는데 왜 본인 것은 그렇지 않은가에 더 관심이 많다. 학교에 가도 마찬가지다. 선생님은 “자, 오늘은 교실에 들여보내 주지만, 내일까지는 다시 늘어나는 거다. 우리 반에서는 줄어드는 법이란 없어.”라고 말한다. 학교 버스 기사도, 교장도, 트리혼이 만나는 어른들은 다 저런 식이다. 결국, 트리혼은 시리얼 상자의 응모권을 오려 보내 받은 보드게임 중 하나를 하고 놀다가 우연히 다시 제 키로 돌아온다. 돌아오자 엄마는 한마디 한다. “잘 됐구나.”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다. 그날 저녁 트리혼은 자신의 몸이 온통 연두색으로 변한 것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트리혼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단지 정말 “이상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줄어드는 것도 이상하고, 심드렁한 어른들도 이상하고, 게임 말을 한 칸씩 옮길 때마다 키가 늘어나는 것도 이상하고, 이왕이면 좀 더 크지 이 정도면 되었다며 게임을 멈추는 것도 이상하고, 주인공이 연두색이 되는 것도 이상했으며 무엇보다, 그림의 분위기가 정말 이상했다. 이상하고 좋았다.



최근의 판본에는 모두 글쓴이, 그린 이, 그리고 옮긴 이의 이름이 나란히 쓰여 있지만, 내가 가진 1978년 국내 판본에는 그린 이의 이름은 없다. 페이지를 두 장이나 넘기고 나서야 왼쪽 페이지 하단에 작게 쓰인 “에드워드 고우리 그림”을 발견할 수 있다. 에드워드 고우리 의문의 일 패. 글이 우위인 시대에 그저 “삽화가”로 보이는 이의 이름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나 보다. 그즈음의 “에드워드 고리 (Edward Gorey 1925-2000)”는 이미 자기 세계를 구축한, 어쩌면 글 작가보다 더 유명한 작가였을 텐데 말이다. 그나저나 이건 그림책인데, 그림 작가의 이름을 이렇게 쏙 빼먹다니.

글의 양이 많고, 그림이 없어도 성립하는 이야기처럼 보이므로 이것이 그림책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모든 페이지가 텍스트 한 장에 그림 한 장씩 대응하여 배치되어 있으니, 그림의 양도 만만치 않다. 그보다도, 에드워드 고리 특유의 살짝 비틀린 유머가 담긴 그림 스타일은 이 책이 정확히 어떻게 읽혀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으므로 이 그림 없이 이 책은 성립이 안 될 것 같다. 

앞뒤 표지도 세심하게 설계되어 있다. 앞표지에는 벽에 키를 표시한 눈금 아래로 조금 줄어든 트리혼의 모습이 보인다. 트리혼이 등진 벽과 표지의 테두리는 연두색인데, 뒤표지의 트리혼은 벽에 흡수된 듯 얼굴과 손도 연두색이 변해있다. 책을 덮는 순간 실소가 터지는데, 이렇게 이야기는 뒤표지에서 완성된다. (논장 출판사의 현재 판본은 해외판본과 같이 연두색인데, 두레 출판사의 구판본은 보라색 테두리에 벽은 은색이다. 당시에 이 책을 디자인한 사람은 책을 읽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본문은 같은 구도가 반복되고 동일 시점을 유지함으로 인해 독자가 연극무대를 바라보듯 거리를 두며 보게 되고, 쓸데없이 엄숙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한다. 펜으로 묘사된 흑백 책 내부의 장식과 무표정한 어른들의 지나치게 복잡한 옷 문양까지도 뭣이 중한지 모르는 부조리한 세계를 구성한다. 

한참 후에 영국 런던의 테이트 미술관 서점에서 이 이상하고 웃긴 에드워드 고리의 책들과 한꺼번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서점의 한 칸이 이 작가의 책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하나같이 음산하고 우울하며 기묘하게 웃겼다. 그제야 어렸을 적 읽은 그 분위기의 맥락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날 서점에서 충격으로 구입해 『줄어드는 아이』와 같은 책장 칸에 모셔둔 한 조그만 책의 제목은 『펑 하고 산산조각난 아이들』(The Gashlycrumb Tinies, 황금가지, 현재 절판)이다. 이 책은 시종일관 유머와 유머 아닌 것의 경계를 헷갈리게 하는 알파벳 책으로, A부터 Z까지 해당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하나씩 가혹하게 죽는 그림책이다. A는 계단에서 떨어진 에이미, B는 곰에게 공격당한 베이질, C는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간 클라라…하는 식으로 말이다. (『줄어드는 아이』는 아주 얌전한 편에 속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이 책을 보았을 때는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하지만 요즘 도배되는 끔찍한 뉴스들을 떠올리면, 실은 누가 더 무서운 세상을 살고 있는지 내기를 해도 내가 딱히 질 것 같진 않다 싶다.

자기 이야기만 하는 어른들, 소통 불가능성, 존재하느냐 사라지느냐, 이토록 커다란 문제를 결국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해결하는 어린이(그것도 아주 사소한 계기로). 부조리한 현실, 왜 그 일이 일어났고, 왜 그렇게 해결되는지에 대한 설명의 부재, 한마디로 미스터리 그 자체인 책의 분위기가 어린 내 마음속에 들어왔고, 그래서 『줄어드는 아이』 이후 나는 책이란 저렇게 어떤 모호함, 어느 정도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나중에 머리 크고 나서 주석을 덧붙인 것이겠으나, 어찌 되었든 무릇 책이란, 난공불락의 현실에 난 균열, 그 틈을 슬쩍 벌려놓는 것이어야 하며, 메시지는 각자 알아서 얻어가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미스터리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이책은, 더 다양해지는 게 좋겠다. 나와 같은 어린이를 포함하여 어린이들은 매우 다양하며, 그 어떤 주제에도 매우 너그러우므로.




*이수지

그림책 작가. 대표작으로
 『여름이 온다』『강이』『선』, 『파도야 놀자』, 『그림자놀이』, 『움직이는 ㄱㄴㄷ』 등이 있고, 『우리는 벌거숭이 화가』『그림자는 내 친구』 등에 그림을 그렸다. 볼로냐 라가치상 픽션 부문 스페셜 멘션, 한국출판문화상, 뉴욕 타임스 그림책상, 보스턴 글로브 혼 북 명예상 등을 받았고 한국 작가 최초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그림 작가 부문)을 받았다.




줄어드는 아이 트리혼
줄어드는 아이 트리혼
플로렌스 패리 하이드 글 | 에드워드 고리 그림 | 이주희 역
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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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수지

줄어드는 아이 트리혼

<플로렌스 패리 하이드> 글/<에드워드 고리> 그림/<이주희> 역9,0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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