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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칼럼] 잎으로 잎 모양을 만드는 사람

김지연의 그림의 등을 쓰다듬기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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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고정한 채 바라본 것을 그림이나 글로 옮겨낼 때 누군가의 손길이 닿으며 또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난다. 번역에 번역을 거듭하는 사이에 한 사람의 시선이 더 진하게 응축된다.


예술가와 관객을 잇는
현대미술 비평가 김지연 작가의 에세이.
격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밤바다에서 수영해 본 적 있어요?” 

카페 조명은 조금 어두웠고, 우리는 저녁을 먹으며 술을 한잔 마신 탓에 살짝 상기된 볼을 하고 있었다. 얘기를 꺼낸 작가는 말을 이었다. 우연히 밤바다에서 스노클링을 해 본 적이 있다고. 칠흑같이 어두워 위아래도 구분가지 않는 바닷속에서 빛나는 해파리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고 했다. 

“태어나서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어요. 내가 만드는 작품이 다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니까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세 사람은 발그레한 볼을 한 채 잠시 각자 다른 곳의 밤바다에 다녀온 듯했다. 

밤바다와 해파리 이야기가 다시 떠오른 것은 몇 년 뒤 원주의 산자락에서였다. 안도 타다오가 지었다는 미술관을 안팎으로 둘러보고 제임스 터렐의 작품을 오랜 시간 바라보았다. 건축가가 심혈을 기울여 지었다는 명상공간에서 짧은 명상까지 마치자 몸이 개운해졌다. 더위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산세가 눈에 들어왔다. 옆에 있던 사람이 물었다. 이미 있는 풍경이 그대로 아름다운데 왜 그림으로 그려야만 하느냐고. 

질문을 들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굽이굽이 펼쳐지는 능선을 따라 팔월의 초록이 완연했다. 뻔하지만 하늘은 푸르렀고, 어느 것 하나 그림 같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앞서 본 인간이 만든 것들보다 명백하게 아름다웠다. 지금 내 눈은 봄비가 내리는 풍경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했던 밀레의 말처럼, 내 눈은 단지 팔월의 초록을 보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밀레는 그런 눈으로 프랑스의 자연을 그려냈다. 또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농부들의 성실한 삶을 자연과 동등하게 그렸다. 그의 대표작 「이삭 줍는 사람들」이나 「만종」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의 모습은 나무나 구름처럼, 자연 그 자체였다. 사회 주변부에 있는 이들을 가운데로 불러낸 이 작품들은 농부들을 성스러운 존재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게 밀레의 시선이었다. 사람들은 밀레의 작품들이 사회비판적이라고 했고, 비평가들은 그가 사회주의자라고 했다. 진의는 알 수 없으나, 밀레가 드넓은 대지와 농부들이 지닌 힘을 발견했고, 덕분에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담은 그의 그림이 또 다른 풍경이 되었다는 건 확실하다.  

같은 장소의 같은 사물이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본다. 시선을 고정한 채 바라본 것을 그림이나 글로 옮겨낼 때 누군가의 손길이 닿으며 또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난다. 번역에 번역을 거듭하는 사이에 한 사람의 시선이 더 진하게 응축된다. 풍경이나 사물, 사람의 내부에 있던 보이지 않는 힘은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발견되면서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다. 

한 작가의 어머니는 눈을 감으면 보이는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하셨다. 작가는 어머니를 따라 눈을 감은 채 감각을 더듬어 풍경을 찾았다. 신기하게도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풍경이 있었다. 눈꺼풀이 눈을 덮어도 아른거리는 잔상이 남는다. 방금 본 장면에 이전에 보았던 장면들이 겹친다. 풍경을 응시하는 시선에는 과거로부터 현재를 통과하여 미래로 향하는 역사가 묻어 있다. 한 사람의 눈이 풍경을 바라볼 때 그의 삶이 풍경을 바라본다. 그는 밀랍을 켜켜이 쌓아,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박이도 「풍경의 피부」, 2023

어느 날 그의 작업실에서 허락을 구해 작품의 표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손바닥의 부드러운 살갗 아래로 밀랍이 머금은 수분의 촉촉함과 함께 비정형의 굴곡을 느끼며, 회화는 형태가 아니라 힘을 그려야 한다는 들뢰즈의 말을 기억해 냈다. 오랜 시간을 겪어낸 한 사람의 피부와 같은 풍경이 거기에 있다. 시간을 들여 쌓은 그림의 피부 위로 그의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통과해 온 풍경의 힘이 배어났다. 

숲을 그리는 한 작가는 스스로를 ‘잎으로 잎 모양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미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캔버스 위에 옮기는 자신은 결국 잎을 오려서 잎 모양을 흉내 내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가 하고. 하지만 그가 그려낸 숲의 풍경은 현실과 다르다. 그림 속 인물이 잘라낸 잎 모양은 원래의 잎과 다른 모양이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가 바라본 잎의 진짜 모양이 아니었을까. 


김여진 「잎으로 잎 모양을 만드는 사람」, 2023

‘풍경을 바라본다’고 할 때 우리는 풍경 속에서 오로지 지금을 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림에서 언제나 풍경 너머를 본다. 존 버거는 『어떤 그림』에서, 회화는 사물의 내부에 담긴 원형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작가들은 과거에서부터 현재, 그리고 다시 미래로 흐르는, 시간을 들여 관통한 어떤 것의 본질을 그린다. 자신의 삶을 들여 발견한 것이다. 우리는 작가의 시선을 담은 그림을 통과하여 잎을 다시 바라본다. 잎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지만, 작가의 힘으로 새롭게 오려낸 잎의 모양을 통해 비로소 진짜 잎을 본다. 마치 위대한 초상 사진 한 장이 실제로 인물을 만나는 것보다 더 깊은 내면을 드러내는 것처럼. 

눈을 감아 본다. 살아온 시간 동안 만난 풍경화들이 모두 겹쳐진다. 사각사각, 잎을 오리는 소리가 들린다. 숲을 채운 수많은 잎 중에서 단 하나의 잎이 내 앞으로 온다. 시야가 흐려지며 오히려 또렷한 힘이 느껴진다. 이렇게 나는, 이미 있는 그림의 아름다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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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연(미술비평가)

미술비평가. 예술과 도시, 사람의 마음을 관찰하며 목격한 아름다운 장면의 다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현대미술과 도시문화에 관한 글을 다수 매체에 기고하며, 대학과 기관, 문화 공간 등에서 글쓰기와 현대미술 강의를 한다. 비평지 <크리티크 M>의 편집위원이며, 예술 감상 워크샵, 라디오 방송 등 예술과 사람을 잇는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쓴 책으로 『당신을 보면 이해받는 기분이 들어요』(2023), 『필연으로 향하는 우연』(2023), 『반짝이는 어떤 것』(2022), 『보통의 감상』(2020), 『마리나의 눈』(2020)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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