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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천국보다 낯선 - <콘크리트 유토피아>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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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그가 동료들과 직접 가꾸었던 것들, 콘크리트 왕국에 허락된 작은 유토피아의 조각들. 아빠는 손가락으로 그것들을 필사적으로 가리켰다. (2023.08.11)


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포스터 

IMF 무렵 아빠는 증권 회사의 동료에게 속아 큰 빚을 지게 됐다. 어떻게든 빚을 메꾸고 회사를 그만둔 뒤로 아빠는 정보 통신 회사를 차렸다. 중소기업은 몇년 못 가 망했고, 집안 곳곳에 빨간 딱지들이 붙었다. 들이닥친 사람들은 아이방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다. 아빠는 사라졌고, 엄마와 나는 근처의 좁은 아파트로 이사갔다. 지방이니 그나마 가능한 일이었다. 신용 불량자가 된 아빠가 서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건 꽤 시간이 흘러서였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희한하리만치 그 시절 아빠에 대한 기억이 내게는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딱 한번, 태풍 때문에 일찍 하교한 어느 날 집어든 수화기 너머로 아빠가 조금 울고 있었다는 것 밖에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잘 알려진대로 대지진 이후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은 황궁아파트 주민들의 생존극이다. 플롯의 첫 갈등 단계는 맹추위를 피해 아파트로 몰려든 외부인을 수용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않던 주민들이 반상회 투표를 거쳐 결국 방출을 결정하는 대목이다. 빈 집을 배정하겠으니 외부인은 모두 모여달라고 유인한 뒤 주민 대표 '영탁(이병헌)'과 방범 대장 '민성(박서준)'을 필두로 무장한 주민들이 외부인을 일시에 몰아낸다. 대지진으로 흔들리고 깨어진 건 비단 건물만이 아니라 계급도이기도 해서, 황궁아파트보다 집값이 훨씬 비싼 드림팰리스 주민이건 권력 꽤나 잡았던 시 의원이건 쫓겨나야 할 처지인 건 마찬가지다. 이 필사적인 선긋기는 부족한 자원에 근거한 생존 전략인 한편 아파트 부녀회장 '금애(김선영)'가 반상회 중 무심코 발설하는 것처럼 긴 세월 축적된 억하심정의 표출이기도 하다.

"그동안 드림팰리스 인간들이 우릴 얼마나 무시했어요? 막말로 입장 바뀌면 우린 얼씬도 못하게 할 걸요!"

삼영빌라에서 20년을 악착같이 모아 겨우 황궁아파트에 내 집을 마련한 중년 부부도 거든다. 영화의 방점은 여기에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재난 이전에도 우리들의 스위트 홈이 유토피아만은 아니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뾰족한 칼날처럼 들이민다. 내가 소유한 아파트가 나의 생각이 되고 삶을 만든다.

그런데 사실상 스쳐가듯 지나갈 뿐인 한 인물의 항변이 나를 오래 붙잡았다. 황궁아파트에서 평생을 일했으나 졸지에 외부인과 함께 쫓겨나게 된 경비원이다. 그는 외마디 비명처럼 호소한다.

"내가 여기서 수십년을 일했는데!"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말하자면 혼자 노모를 돌보는 영탁과 사이좋은 신혼부부 민성-명화(박보영), 영탁의 옆집에 사는 뚱한 10대 혜원(박지후)보다도 황궁아파트에서 오래 산 사람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죽느냐 사느냐의 상황에서 '우리'로 인정받지 못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경비원에게 할애된 것은 한 마디, 한 컷에 불과하지만 그가 느꼈을 모욕감은 긴 자취를 남겼다. 철저한 회원제의 유토피아는 이내 서로를 착취하는 구조로 돌아선다. 물론, 이또한 당연히 예견된 일이다.

엄태화 감독이 제목을 따온 박해천 교수의 책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1970년대 경제 성장의 구호를 딛고 고속 성장한 서울 아파트 생태계, 특히 한국 중산층의 의식 체계로서의 아파트를 해부한다. 그보다 앞서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한강변을 따라 늘어선 성냥갑 같은 아파트를 보고 한국의 아파트 문화사를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연구서로 종합했다. 영화 역시 재난 스릴러의 원형만큼 이곳이 아파트이기에 일어날 수 있는 사회학적 비극을 극대화하는 데 충실한 우화로 완성됐다. 이 비극 속에 뒤엉킨 중산층 되기의 욕망, 그 좌절의 정념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엄태화 감독 특유의 블랙 코미디와 회화적 장면화다. 여름 성수기 시장을 겨냥한 200억대 텐트폴 영화답게 시종 숨가쁘게 달려가지만, 이 영화는 분명 우리가 감당할 만한 슬픔 또한 남긴다. 중반부에 드러나기를, 사실은 영탁은 빚을 떠안은 채 가족을 등지고 혼자 사태를 수습해보려 전전하던 남자다. 자신을 속인 브로커가 사는 황궁아파트를 찾아가 다투던 중 살인을 저지른 그는 직후 갑자기 대지진을 맞이한다. 이 이야기 속 최초의 살인자인 그는 대재난이 가시화한 생존 경쟁 이전에 신자유주의 투기 시장에서 사기당해 누군가를 죽인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같은 대재난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지금도 아파트를 둘러싼 재난은 자주 일어난다. 지난 7월 대치동 아파트의 한 경비원이 관리소장의 갑질 피해를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그에 앞서 자주 알려진 아파트 주민의 갑질보다는 오히려 직장 내 괴롭힘에 가까운 사건으로 밝혀졌지만, 그럼에도 경비원의 죽음은 그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기 전에 아파트 재건축 이슈에 가로막혀 희석되었다. 학부모의 폭력적 민원과 협박으로 괴로워한 젊은 교사는 강남의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로 각광받는 지역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자살했다. 갑질 피해를 겪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듣는 말은 지위에 관한 모욕이다. "경비원 주제에", "초등학교 교사나 하는 주제에"라는 말에 마땅한 대답거리가 있을 리 없다. 분노가 들어설 수 없는 자리에 대신 죄송합니다, 가 메아리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엔 외부인을 숨겨준 주민들을 색출해 집합시키는 장면이 있다. 그 즈음에 이르면 이미 주민들 내부에서도 수직적 계급도가 공고해져 같은 아파트 주민인데도 영탁의 지시 아래 무릎을 꿇고 연신 "잘못했습니다"를 외친다. 보다 못한 도균(김도윤)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극한으로 치닫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의 장르적 전개임에도 어쩐지 너무나 기시감이 드는 풍경이다. 땅이 일어나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솟구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여파가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나라에 산다는 것이 만약 이 영화를 일면 더욱 흥미진진하게 하는 요소라면 그것 또한 오싹한 일이다. 슬퍼하고 공명할 틈새를 주는 스펙터클이 공허하지 않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쫓겨나는 장면의 한 컷 이후 얼어죽은 시체로라도 등장하지 않는 한 명의 경비원 캐릭터에 내가 내내 붙들린 것처럼.

아빠를 따라 서울에 온 우리 가족은 할머니가 혼자 사시던 방배동의 한 빌라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졸지에 방배동에 살면서 8학군 고등학교에 다니는 애가 됐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너 잘 사는구나" 하면 그냥 가만히 있었다. 친구들은 유년기의 내게 <대장금>이나 <봄날은 간다>보다도 먼저 배우 이영애를 더 강렬하게 각인시켰던 자이 아파트, 한강맨션 같은 강남 유명 아파트에 살았다. 아무도 대놓고 묻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우리는 누가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 공기 속을 살아갔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아빠는 일을 그만뒀다. 보람있는 일인데 힘들다는 말이 전부였다. 그 시절 아빠가 겪은 일들이 지금도 여전히 뉴스를 채우는 경비원 폭행·갑질 세태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는 것은 한참 뒤에나 알게 되었다. 아빠는 그 사이 주택 관리사와 조경 기능사 자격증을 땄고 이어서 공인 중개사 시험에 합격해 친구들은 대부분 은퇴할 나이에 사무소를 열었다. 딱 한 번, 의뢰인과 함께 어느 아파트를 보러간 아빠를 보조 격으로 따라나선 적이 있다. 아빠는 아파트 조경에 대해 이곳 저곳을 가리키며 아는 척 했다.

"여기는 배롱과 백목련, 저기는 모과나무와 매화나무, 이쪽은 영산홍... 상록수와 활엽수의 비율이 좋고 소나무 조경이 특히 잘 되어 있네요. 잡초 관리도 깨끗하고..."

한 때 그가 동료들과 직접 가꾸었던 것들, 콘크리트 왕국에 허락된 작은 유토피아의 조각들. 아빠는 손가락으로 그것들을 필사적으로 가리켰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콘크리트 유토피아
콘크리트 유토피아
박해천 저
자음과모음(이룸)
아파트 공화국
아파트 공화국
발레리 줄레조 저 | 길혜연 역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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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미 <씨네21> 기자

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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