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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흐르는 감각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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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무섭게 하는 그 시간 속에 답이 있다. 좀처럼 영화가 되기 힘든 시간의 집합체를 영화로 옮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라는 시도 자체가 실은 용기 있는 하나의 응답이다. (2023.06.30)


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포스터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보고 나서 슬럼프의 개념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선천적인 청각 장애를 갖고 태어난 프로 복서 케이코(키시이 유키노)의 일상을 체현해내는 이 영화를 보다가 슬럼프가 원래 스포츠 용어라는 사실이 떠올라서다. 일과 일상의 동력이 소침한 상태를 일컫는데 만연하게 동원되는 슬럼프는 요새 번아웃이 등장하면서 언어의 처소에서 잠시 쉬고 있는 모양새인데, 슬럼프를 찾다보니 그와 유사 개념인 고원(高原) 현상에 대해서도 읽게 됐다. 숙련자들에게 나타나 부상과 초조함을 동반하며 나타나는 슬럼프와 달리 비교적 연습 초기에 나타나는 일반적 특징인 고원은, 진보의 과정을 위해 필시 동반되는 일시적인 정체의 상태이다. 고원 현상은 하나의 습관이 완성된 이후 또 그것을 기초로 한 새로운 습관을 얻을 때까지의 준비 기간이기도 하다. 안정과 분화, 그 이후에 비로소 진전이 있다는 의미다. 시간의 개념으로 바꾸어 말해보면 이렇다. 흐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잠시 고여있어야 한다고.

겉보기에 케이코의 삶은 매일 체육관에서 훈련하고 때가 되면 시합에 나가는 성실한 복서의 그것이다. 생계를 위해 호텔 객실을 청소하는 반복적인 노동과 가끔의 여가로 구성된 일상도 안정 속에 있다. 그러나 콕 짚어 말할 순 없어도, 이대로 마냥 시간에 실려가듯 살아갈 수는 없다는 마음 깊은 곳의 경고음이 케이코를 주춤거리게 한다. "프로 복서가 된 것 만으로도 대단하지 않니?"라는 말은 그녀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 아마도 이 침착한 수행자가 바라는 것은, 잠시 링 위에서 내려와 자기 삶의 이음매를 그저 찬찬히 들여다보려는 일인 듯 싶다.

짐 자무시의 영화 <패터슨>이 시의 원리를 빌려 버스 기사의 반복되는 일상을 변주하는 의외의 리듬과 활기를 발견해낸다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그보다 분주하고 육체적인 체육관의 동요를 담고 있으면서도 한결 더 침잠하는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당분간 운동을 쉬고 싶다는 편지를 쓴 케이코가 체육관의 회장님(미우라 토모카즈)에게 전달을 망설이는 사이, 오랜 경영난 끝에 체육관이 문을 닫기로 했다는 소식이 발표된다. 게다가 회장님은 곧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하고 만다. 쇠락하는 시간 속에 놓인 청춘에 대한 감상(感傷)은 동시대 일본 독립 영화의 기수로 떠오른 미야케 쇼가 내재한 지극히 일본 영화적인 정서인 한편,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그대로 통과하는 이 영화가 투명히 비추듯이 뜻밖의 재난 앞에 무력했던 우리 모두에게 비스무레 찾아온 느낌이기도 하다. 장소의 종말은 한 시절의 문을 닫아버리기도 할 만큼 위력이 세다. 그만두려 했다가 졸지에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된 케이코는 당혹스럽다. 다부진 젊은 복서에게조차 시간의 펀치는 위협적이다. 그 압도성에 관해 말하자면, 무서운 진술을 할 수밖에 없다. 케이코가 아무리 일기를 쓰고 편지를 쓰는 시간 속에서 자신을 닦아낼지라도, 체육관이 언젠가 스러지고 나이 든 관장이 죽음을 맞이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눈빛만으로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위로가,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된 시대에 상대의 입모양을 읽지 못하는 농인의 고난을 결코 대변할 수 없는 것처럼. 요컨대 어떤 시간의 흐름은 너무도 절대적이어서 우리는 그것에 질 수밖에 없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질문은 이 즈음 선명해진다. 그 무력함 앞에서 '청춘'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스틸컷

우리를 무섭게 하는 그 시간 속에 답이 있다. 좀처럼 영화가 되기 힘든 시간의 집합체를 영화로 옮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라는 시도 자체가 실은 용기 있는 하나의 응답이다. 따지고 보면 이 영화는 늘 잔잔한 케이코의 일상을 그나마 뒤흔드는 몇몇 중요한 일들조차 '사건화'하지 않는다. 영화가 하나의 사건을 부각하는 방식은 철저히 시간의 쓰임에 달려있다. 정해진 러닝 타임 안에서 의미 있는 사건은 길게 다뤄진다. 혹은 컷을 분주히 쪼개거나 아예 끊지 않고 한없이 늘어트려 스크린 위에 사건의 여파를 새긴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어떨까. 케이코가 체육관으로 출근하기 위해 매일 똑같은 골목의 계단 위를 오르는 시간과 링 위에서의 시간은 동일한 너비와 질량으로 다루어진다. 생업으로 호텔을 청소하는 시간과 늦은 밤 홀로 남아 체육관의 거울을 깨끗이 닦아내는 시간이 나란히 동행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속절없이 마음이 자꾸만 서성대거나 늘 몸담았던 장소가 사라진대도, 정든 동료가 떠나고 시합에서 진다고 할지라도 케이코의 인생은 힘없이 기울어지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케이코가 그저 터벅터벅 걷는 동안 "새 체육관은 집에서 너무 멀어서 싫다"고 단순한 불평이나 늘어놓고 있는 동안 이미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고 있음을 이 영화에서 한참 동안이나 보았다.

한 시절은 우리도 모르는 잦아든다 새로운 문은 알 수 없는 방향에서 조용히 열린다. 나는 주로 낯선 만남을 통해서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곤 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케이코에게도 딱 한번 그런 우연한 조우가 주어진다. 영화 말미에 케이코는 자신이 진 시합의 상대 선수와 강변에서 마주친다. 시합 신에서 맞은편 선수까지 눈여겨볼 겨를이 없었던 관객은 그제야 케이코의 시선을 따라 눈앞의 상대를 침착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아마도 생업의 일환으로 강변의 쓰레기를 줍다가 나타난 것 같은 이 여성은 케이코와 마찬가지로, 상처 없는 날이 드문 얼굴에 자잘한 흉터와 딱지를 가득 단 채로 어색하게 미소 짓는다. 실패는 케이코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두 사람이 난데없이 악수를 하고, 케이코는 돌아서 비로소 자신을 둘러싼 오랜 침잠과 최신의 패배로부터 풀려난다. 찰나의 악수일 뿐이나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사건이라 할 만한 일이 있다면 이곳에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이다.

카메라는 전보다 조금 가뿐해진 몸짓으로 강둑 위로 뛰어 올라가는 케이코를 지켜보면서, 인물이 마치 궤도로 재진입하는 것 같은 인상을 심어준다. 이른 오전의 빛이 화면 안에 가득 들어차면서, 그 전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던 강둑 위를 지나치는 행인들의 실루엣이 확연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풍경이 넓어졌고 케이코는 이제 공기를 가르며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렴풋이 회복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음을 느끼고 나는 안도했다. 인생의 어느 시기, 혹은 어느 하루의 무거운 걸음을 다시 산책으로 바꾸어 놓는 힘을 가진 영화들이 있다. 나는 이 영화와 함께 반복 운동하는 사이에 관성으로 딱딱해진 마음의 모서리가 조금 둥글어진 것을 감지하면서, 시간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가만히 집으로 걸어왔다. 아주 미약하게, 무언가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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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미 <씨네21> 기자

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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