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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사랑은 괴리감 - <러브 라이프>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19화
우리는 많은 경우 당신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나'를 사랑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 당신의 마음이 내 마음 같으리란 일말의 기대 없이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2023.07.28)
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
로맨틱 무비를 기대하는 관객에게 <러브 라이프>는 0점짜리 영화다. 등장인물 중 아무도 당신의 바람처럼 한없이 친밀하고 낭만적이기만 한 사랑 따위 실천하지 않으므로. 그러나 당신이 안티-로맨틱한 마음의 소유자라면 <러브 라이프>는 오히려 낙관을 안겨줄 만하다. 영화는 러브와 라이프 사이에 쉼표를 찍는 이야기다. 인간의 마음은 앞뒤가 맞지 않고 관계는 오래될수록 후줄근해지고 말지만 (쉼표) 어쨌든 살아간다. 러브, 라이프. 지속되는 삶이 있다면 사랑은 결국 일말의 여지를 남긴다.
시청 사회 복지과 직원인 '타에코(기무라 후미노)'는 남편 '지로(나가야마 겐토)'와 재혼해 전 남편 사이에서 생긴 아들 '케이타'를 키우고 있다. 지로의 부모가 내심 못마땅한 눈치로 둘째를 가지라고 부추기거나, 지로의 회사 동료들 중 지로와 한때 연인 관계였던 여자 야마자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타에코는 동요하지만 가족의 현재는 대체로 안락해 보인다. 친밀한 관계 내부에 불현듯 생겨버린 거리감에 대해서 불안해하는 쪽은 관객이다. 이후 부부를 직접적으로 뒤흔드는 비극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종류다. 화장실 욕조에서 발을 헛디딘 케이타는 다시 깨어나지 못한다. 침묵이 감도는 황망한 장례식장. 넋 나간 타에코 앞에 부랑자 행색을 한 낯선 남자가 나타나더니 다짜고짜 그녀의 뺨을 후려 갈긴다. 오래 전 갑자기 집을 나가버렸던 케이타의 생부, '신지(스나다 아톰)'가 나타난 것이다. 황당한 폭행 사건으로 갈무리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 <러브 라이프>에선 외려 타에코의 숨통을 틔우는 뜻밖의 충격 효과를 낸다. 타에코가 아픈 뺨 대신 신지를 붙잡고 그제야 엉엉 소리내 울기 시작해서다.
<러브 라이프>에서 실제 농인 배우 스나다 아톰이 연기한 인물 '박신지'는 한국 국적의 혼혈인으로 한국어 수어를 쓴다. 장례식장에서의 재회 이후 타에코는 자꾸만 이웃 동네의 공원에서 노숙하는 신지를 찾아가 그의 안부를 살피고 재기를 도우려 한다. 죽은 아들의 생부에게 집착하기 시작한 타에코에겐 오직 자신만이 신지를 구제할 수 있다는 당위가 작동 중이다. 이 무렵 고향에 내려간 지로는 야마자키와 조우해 갑자기 애틋한 기류를 나누고, 타에코는 지로가 없는 빈 집에 신지를 데려온다. 러닝 타임의 중반이 넘어갈 때쯤 나를 비롯한 몇몇 관객이 이 막장 통속극에 실소하기 시작한다. 남의 사랑 타령은 곧잘 가관으로 비친다지만, 그 웃음은 조소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들을 얼마간 애처로워하고 있었다. 모든 인간이 자기 삶에 당한다. 불시의 죽음, 우연한 재회, 변하는 마음은 통제 가능성을 따지기 이전에 불가해한 무엇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주인공이 선택을 내리는 이야기들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러브 라이프>도 그런 면에서 일견 충동을 따라 솔직한 선택을 내리는 인물들의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로는 야마자키와 입맞추고 돌아와 타에코를 위로하고, 타에코는 지로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갑자기 뛰쳐내려 신지가 고국으로 향하는 배 위에 올라탄다. 불완전한 사랑과 감정의 허약함에 관한 우화래도 <러브 라이프>는 충분하다. 그런데 나는 이 위태로운 러브 스토리가 완전한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던 장례식장에서 비로소 촉발되었음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다. <러브 라이프>는 '페인 라이프', 고통스러운 삶의 고독에 관한 소고이기도 하다.
우리 자신이 지극한 고통의 당사자일 때 위로는 언제나 충분치 않을 뿐더러, 최악의 경우 나와 비슷한 슬픔을 느끼지 않는 모두를 미워하게 된다. 타에코는 그래서 외롭다. 타인은 그에게 얼른 애도를 마치고 생활을 재건하길 바라는 이기적인 존재일 뿐이다. 케이타의 생부 신지만이 특별한 왕관을 물려받았다. 똑같이, 아주 오랫동안, 상실의 유대를 이루리란 기대가 타에코로 하여금 신지를 다시 사랑하게 한다. 지로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셈이다. 신지의 귀환과 동시에 어쩐지 자신이 밀려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된 지로는 야마자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야마자키는 타에코의 등장으로 지로를 잃은 뒤 줄곧 그를 멀리서 지켜봐왔으므로 지로와 야마자키는 이제 배제의 유대로 묶인다. <러브 라이프>의 인물들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래서 대단히 고독하기 때문에 사랑을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가짜인가. 알 수 없다. 다만 <러브 라이프>는 상대가 나와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 짐작하는 일이 얼마나 오만한 착각인지 알아보자고 제안한다. 영화 후반부에 신지는 한국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참석해, 타에코에겐 말하지 않았던 또 다른 장성한 아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뒤따라 온 타에코의 충격은 이루말할 수 없다. 카메라는 피로연장에서 흠뻑 비를 맞으면서 신지의 기쁨을 지켜보는 타에코의 축축한 뒷모습을 오랫동안 비춘다.
"우리는 늘 불가해한 타자와 타협하며 살아간다. 알 수 없는 타인을 만나러 가는 경험이야말로 영화적 체험일 것이다." _후카다 고지 감독 <씨네21> 1416호, <러브 라이프> 인터뷰
아파서 했던 사랑은 그렇기에 몰라서 했던 사랑이기도 하다. 팟캐스트 <정희진의 공부> 7월호의 제목을 빌리자면, 우리는 많은 경우 당신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나'를 사랑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 당신의 마음이 내 마음 같으리란 일말의 기대 없이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어차피 불가능에 가까운 문제이므로 <러브 라이프>의 결말도 그리 낙담하지만은 않는 모양새다. 신지와 함께 산산이 부서진 착각까지 한국에 전부 남겨둔 후 일본에 돌아온 타에코는 귀가한다. 그는 이제 한 번 깨어진 사람이다. 엔딩에서 타에코와 지로는 아파트 앞 화단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그저 걷는다. 이 장면이 재결합이나 용서, 혹은 회복의 의미로 귀결되는 이미지인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카메라는 부부를 직시하지도 않고 유리창에 비친 풍경으로 희미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도 어째선지 나는 타에코와 지로가 전보다 더 진실하게 결속할 수 있으리라 믿게 되었다. '당신은 나의 고통을 안다'는 동일시의 유대가 아니라 '우리 사이엔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타자의 유대로 그들은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은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필연적 거리를 유지한 채로 그러나 한참이나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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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