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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외로운 방조자들의 우주 - <스파이더맨 :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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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죽을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가 아니라 '스파이더맨의 서사에서는 가까운 누군가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로 바꾸어 말함으로써, 어떤 죽음과 우리의 존재가 결코 무관하지 않은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2023.07.14)


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영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포스터 

독수리 악당 벌처의 르네상스 버전(조마 타콘)이 스파이더우먼 그웬(헤일리 스타인펠드)의 우주로 떨어졌을 때, 주인공 '마일스 모랄레스'(샤메익 무어)는 아직 등장도 하지 않았고 영화의 러닝 타임은 2시간 30분 넘게 남아 있었지만, 나는 앞으로의 긴 여정이 품은 '다중 우주적 기회' 깊숙이 몸을 맡기고 싶어졌다. <뉴요커> 매거진 일러스트 풍의 세련된 색조로 구현된 뉴욕 대도심, 그것도 구겐하임 미술관을 뚫고 들어온 16세기 독수리는 홀로 누렇게 빛바랜 양피지의 색과 질감을 입고 패닉에 빠져 있었다. 전작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에서 한차례 황홀하게 경험했듯이, 이 애니메이션의 멀티버스는 이야기 이전에 우선 형식으로 존재를 과시한다. 수십 개의 상이한 작화와 연출 기법이 한 화면에서 공존하거나 번쩍거리며 숏을 갈아치우는 광경을 목도하는 희열은, 오늘날 아무것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눙치는 멀티버스 서사에 질색하는 관객들까지 미적으로 설득하기 충분하다. 다만 벌처에겐 해당 사항 없음이다.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유산을 곁눈질해온 이 빌런은 스파이더맨들의 동시다발적 공격을 피하는 난국 속에서도 현대 미술의 가벼움에 성낸다. 제프 쿤스의 대표작 — 강아지 모양의 거대한 풍선인 Ballon Dogs 시리즈 — 위를 활강하던 르네상스인은 조소와 성토를 버무린 촌철살인으로 공격 전략을 변경한다.

"너네한텐 저게 예술이라고?"

젊은 영웅들 — 그웬과 마일스 — 의 스파이더버스 표류기인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가 부모와 자식 간의 균열을 특히나 유심히 들여다보는 영화임을 감안할 때 시조새급 빌런의 이른바 꼰대 발언으로 문을 여는 영화의 도입부는 꽤 적절해 보인다. 마블 최초의 아프로 라티노 영웅인 마일스와 '트랜스젠더 아이들을 보호하라'(Protect Trans Kids)는 슬로건이 새겨진 포스터를 방 안에 걸어둔 퀴어 영웅 그웬에게 부모와의 갈등은 궁극적으로 정체성에 관한 지난한 싸움의 일환이다. 물론 그보다 훨씬 보잘 것 없고 지리멸렬한 사안인 경우에도 부모 - 자식이라는 관계망은 세대 차이라 불리는 보편의 멀티버스에 맺혀있기 마련이다. 종종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서로를 생경해하는 부모와 자녀들의 머릿속에 재생되는 질문은 비슷하다.

"도대체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게 맞나?"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자녀의 탄생과 자립에 동반하는 갈등에서 출발한 다음, 멀티버스의 웜홀에 힘입어 보다 극적인 다음 질문을 향해 간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부모와 자식이 겪어야 할 죽음에 관한 문제다.

멀티버스의 여러 지구 중 하나인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에서 확인한 바, 스파이더맨들에겐 결코 훼손되어선 안될 캐논(canon, 정전)이 있다. 한국 자막으로는 공식 설정 사건이라 불린다. 말하자면 당신이 누구든 반드시 겪어야만 할 고통이 있다는 진리. 억지로 바꾸려 하면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은 물론 그가 속한 우주 전체가 흔들린다는 무시무시한 숙명이다. 고통은 대개 상실을 가리킨다. 벤 삼촌의 죽음, 경찰서장의 죽음, 피터 파커의 죽음... 지구1610b의 마일스 모랄레스의 경우 막 경찰서장으로 진급한 아버지의 죽음이 예정돼 있다.


영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한 장면

세상의 거의 모든 이야기들이 상실을 노래한다. 애도와 죄책감, 용서와 회복의 문제를 경유하지 않는 영웅담은 드물다. 나는 비극을 겪고서야 각성하는 인간이 세상 모든 이야기의 원형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마일스를 기다리는 비극도 그 자체로는 퍽 놀랄 일이 아니다. 다만, 주목하고 싶은 차이가 있다. 마일스가 어떻게든 아버지의 죽음을 물리려 애쓸 때, 그가 느끼는 고통은 단순히 죽음을 미리 알게 된 자의 그것이 아니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죽을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가 아니라 '스파이더맨의 서사에서는 가까운 누군가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로 바꾸어 말함으로써, 어떤 죽음과 우리의 존재가 결코 무관하지 않은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요컨대 마일스는 자신의 영향력을 알기에 고통받는다. 죽느냐 사느냐, 당신의 개입이 모종의 효력을 발휘하리라고 우주가 말을 걸어온다.

어차피 관여하지 못하는 자의 무력감과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자의 죄책감은 고통의 위계를 떠나서 아예 전혀 다른 문제다. 전자는 방관, 후자는 방조에 가까워진다. 마일스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을 죽음의 방조자라 여기게 될 가능성을 품고 사는 셈이 된다.(그런 생각일랑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생이 어느날 등뒤에서 나를 죽음의 방조자로 지목한다니, 그건 정말이지 당하고 싶지 않은 고약한 수건돌리기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왜? 영원히 다른 세상을 살 수도 있겠다고 잠정 결론을 내리더라도 부모와 자식은 죽음이란 문제 앞에서 대체로 다시 만난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애쓰다가 언젠가는 원하든 원치않든 놓아주고 말아야 하는 일. 그건 거미 인간들만의 캐논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의 생애 주기에서 흔히 일어나는 보편적 경험이다. 방식은 약간 다를 수 있다. 영웅의 주변인들은 일순간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현실에선 길고 지난한 투병과 돌봄의 문제가 더해진다. 마블 영화에 등장하기엔 전혀 섹시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으니 앞으로도 볼 일은 없겠지만.

실은 요즘 나 역시 누군가를 살리려는 삶을 산다. 당신도 인생의 어느 땐가 누군가를 살리고 싶은 쪽이라면, 나처럼 죽음의 캐논을 지키려고 무리지어 쫓아오는 스파이더맨들로부터 도망치는 마일스가 애틋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나는 이 거미 소년의 활극이 갖는 효용 중 비교적 하위 항목에 '외로운 방조자들을 향한 위로'를 슬며시 기입해두고 싶은 쪽이다. 그렇다고 해도 캐논 거부에 나선 마일스의 모험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미래를 예측은 것은 내 영역 밖의 일이다. 다만 애초에 스파이더맨이 될 운명이 아니었던 — 지구42에서 건너온 거미에 물려 스파이더맨이 된 — 마일스가 다분히 오류적 존재라는 사실이 거미줄 따윈 없는 평범한 인간 관객에게 믿을 만한 동앗줄이 되어준다. 그 자신이 이미 중대한 변칙점이므로 적어도 MCU에서만큼은 새 정전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마일스는 어쩌면 아버지의 죽음을 무효화하는 특권을 누릴 수도, 혹은 죽음을 딛고 전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아들이 홀로 남을 세상을 염려했던 어머니 리오(루나 로렌 벨레스)의 말은 일정 기간 예언이 될듯 싶다. 나는 멋대로 마일스의 외로움을 예측하면서, 회색조를 잔뜩 머금어 채도가 짙게 내려앉은 엔딩 시퀀스를 끝까지 지켜 보았다. 네가 어떤 스파이더맨이든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던 미겔 오하라의 말을 거슬러 혼자 걷는 마일스를, 혹여나 꿈 속의 다중 우주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에게 메리 올리버의 시집을 건네고 싶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네가 상상하는 대로 자신을 드러내,"(Whoever you are, no matter how lonely, the world offers itself to your imagination,라고 적힌 시 「기러기」를 선물하기 위해서. 지켜낸 자리와 놓아준 자리 모두 당신이 충분히 있어도 될 당신의 그곳이라고 말해주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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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미 <씨네21> 기자

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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