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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아의 카페 생활] 다시 여름을 기다리며 - 까페여름
임진아의 카페 생활 (10)
까페여름은 희망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곳이 아닐까. 제로 웨이스트와 비건 지향, 그리고 차별이 없는 가게라는 표시. 어떤 세상을 그리는지, 그리고 그러기 위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가 보인다. 이곳을 찾는 손님은, 세상은 분명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까스로 갖게 된다. (2023.08.11)
격주 금요일, 임진아 작가가 <채널예스>에서 작업하기 좋은 카페를 소개합니다. ‘임진아의 카페 생활’에서 소개하는 특별한 카페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
동네 책방에서 책 한 권을 결제하는 동안 계산대를 내려다보니 익숙한 원두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 서대문구 가재울로에 위치한 '까페여름'의 원두였다. 익숙한 글씨체가 쓰인 원두 봉지를 보자마자 까페여름에서의 시간들이 지나간다. 까페여름은 거리상으로는 그리 멀지 않지만 일상적으로 가기엔 거리감이 있어서 특별한 휴식이 주어진 날에 가고 싶은 곳이다. 언제나 어울리는 책 한 권을 가져가지만, 막상 앉으면 이곳만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읽느라 펼친 책은 같은 페이지만 너풀거린다.
앉아 있다 보면 나와 커피 한 잔만이 아니라 가깝지만 보이지 않는 곳과 더불어 아득히 먼 어느 곳의 평화를 바라게 된다. 계산대 옆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 적힌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라는 문구를 보면서 커피를 홀짝이다 보면 이곳은 모두를 환영하는 곳이구나, 싶어 안심이 된다. 모두를 환영한다는 건 어떤 차별이 이루어지는지를 알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딘가에서는 입장 제한 대상이 되는 모든 존재들을 생각하게 되는 까페여름은, 내 생활권에 위치한 카페 중에서 가장 책을 닮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간 김에 다음날의 원두를 사서 나오면 그렇게 든든할 수 없는 카페이자, 바쁜 나날이 지나 다시금 나에게 선사하고 싶은 시간이다.
바로 그 까페여름의 원두를 작업실 바로 근처에서 만날 수 있다니. 새삼 기뻐서 원두도 살 수 있냐고 여쭤보니 살 수는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동네 책방이지만 커피 메뉴도 판매하고 있는 곳이라서 어떤 원두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카운터에 설명해 둔 것이었다. 이런 정보는 참으로 친절하고 역시나 필요하다. 아, 그래서 여기 커피가 맛있었던 거구나. 뒤늦게 끄덕거리며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책방 직원분이 다급하게 뛰어나오셨다.
"여기의 커피예요. 여기에 가시면 원두를 살 수 있어요."
직원분은 지도 앱을 가리키며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거기다 대고 알고 있는 곳이라고 말하기엔 나의 대사 말풍선이 너무 작게 그려져 있어서 그저 "정말 감사합니다. 한 번 가볼게요." 하고 감사함을 표하기만 했다. 다음에 이 책방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하면 평소보다 조금 더 기분이 좋아지겠지.
떠올려 보면 까페여름의 원두를 만났던 곳이 여럿 있었다. 위에서 말했던 동네 책방인 진부 책방, 앞서 소개했던 카페인 커먼마치, 속초 여행 중에 만났던 카페 루루흐 등. 이곳들의 감상을 포개어보자면 커피가 참 맛있는 곳이라는 한 줄이 선명해진다. 그리고 마음을 먹고 애써 만든 휴일에 까페여름으로 향할 수 있는 내 일상이 새삼 소중해진다.
까페여름에 간 건 대부분 겨울이었던 것 같다. 한겨울에 동네 친구랑 약속을 잡으면서 우리가 정했던 곳이 이곳이었다. 친구는 당시 건강의 이유로 매일 일정 거리를 걸으며 운동을 해야 했고, 까페여름은 우리가 걷기에 딱 맞은 위치에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게 기뻤다. 크고 작은 희망이 생겨난다는 건 반갑다. 몸과 마음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희망이라는 불빛을 매일의 날들에 켜두기란 쉽지 않으므로. 친구를 만나러 가면서 나는 생각했다. 같이 마주보기 위한 장소를 함께 고민한다는 것.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각자 마시고 싶은 커피 메뉴를 주문하고서 거기에다가 '빵과 버섯'이라는 이름의 한 접시 메뉴를 더했다. 이 테이블을 위해 매일 챙겨 먹는 아침을 건너뛰었다. 빵과 버섯은 포근하고 따뜻한 호밀빵과 함께 구운 버섯 절임과 두부 마요네즈를 곁들여 먹는 식사 메뉴이다. 짙은 테이블 위에 커피 잔과 함께 빵과 버섯 접시가 더해지자 시간을 내어 떠난 여행지 같은 다채로운 색감이 피어난다.
우리는 마주 앉아 친구가 겪은 그간의 아픔들과 앞으로의 치료의 일정들을 나눴다. 폭신한 빵을 오물거리면서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절망의 표정이 아닌 희망의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친구의 얼굴을 보았다. 중간중간에 "정말 맛있다"고 표현하며 "우리 빵 한 접시 더 먹을까요?" 하는 고소한 말을 더하던 우리의 대화에는 절대 비관이나 낙망이라는 단어가 자리할 틈이 없었다. 나는 나의 앞날과 함께 친구의 앞날에 대해 언제까지나 궁금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새롭게 추가한 빵을 잼에 발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홍제천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점점 까페여름과 멀어졌다. 느리게 걸으면서 남은 대화를 천천히 나누고, 벤치가 보이면 앉고, 중간중간에 커피도 빵도 참 맛있었다는 귀여운 말풍선도 챙겨 넣으면서, 우리들의 속도로 남은 오후를 보냈다. 나에게 이날은 까페여름이 마련해 준 작은 조명 아래에서 마음 놓고 앉아 지금에 대해 떠들었던 날로 기억된다. 아픈 걸 아프다고 말하고, 두렵다는 걸 두렵다고 말할 수 있었던 테이블을 마련해 준 곳. 그렇게 우리들은 겨울을 보내고 봄을 지나 여름을 맞이했다.
끝나가는 이번 여름. 친구는 치료 종료 기념 선물이라며 복숭아 한 박스를 집으로 보내주었다. 치료받는 동안 곁에서 힘이 되어 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치료 뒤에 종료라는 단어가 붙게 된 이번 여름. 우리는 이번 여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아무리 바빠도 제철 과일 챙겨 먹을 정도의 여유는 남겨 두고 살자고요."
아무리 슬퍼도 까페여름의 빵과 버섯을 챙겨 먹었던 우리를 기억하자는 말로 들렸다. 여름 내내 친구가 보내준 복숭아를 하나하나 까먹으면서 친구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건너온 여름과 친구가 건너온 여름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이번 여름과 친구가 보낸 복숭아는 나에게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는 자신이 건너온 여름을 '복숭아'라는 희망의 불빛으로 보여주었다. 계속 희망할게. 같이 절망 다음을 이야기하자. 말하는 것 같았다.
독서 교실을 운영하면서 어린이와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는 김소영 작가의 에세이집 『어린이라는 세계』는 내가 그림으로 참여한 책 중에서 단연 가장 많이 읽은 책일 것이다. 이 책은 먼저 어린이라는 세계를 반듯한 동그라미로 그려둔 후에 우리 모두가 사는 세상을 그린다.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는지, 어떤 마음을 앞세워야 하는지를 다정하게 안내한다. 그리고 나아짐을 희망한다. 무엇을 절망하면 되는지 알고 있지만 기어코 희망의 불빛을 제힘으로 켜두는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이 책 속에 있다.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 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갖기로 마음먹는 순간부터 요구하는 것이 많다. 바라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외면하면 안 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절망보다 가차 없다. 그래서 우리를 걷게 한다.
이번 여름은 애써서 그린 우리들의 희망을 응원하고 싶다. 다시 다음 여름을 그리면서. 우리들의 다음을 궁금해하면서.
까페여름은 희망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곳이 아닐까. 제로 웨이스트와 비건 지향, 그리고 차별이 없는 가게라는 표시. 어떤 세상을 그리는지, 그리고 그러기 위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가 보인다. 이곳을 찾는 손님은, 세상은 분명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까스로 갖게 된다.
나는 카페를 찾고, 카페의 시간을 필요로 하고, 카페에서 혼자 잠잠히 있을 때 나아지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건 아마 그런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일 테고, 어쩌면 그런 나도 응원받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나아지고 싶어 하는 사람만이 카페에 홀로 앉아 지금 나에게 필요한 한 잔을 고른다. 한 모금의 커피 맛을 기억하려고 한다. 좋았던 카페들을 소중한 이와 함께 다시 방문하며 오늘 짓는 서로의 표정을 마주한다.
그러기에 좋은 카페들이 언제까지나 찾아다니고 싶다. 혼자 있기 좋아서 모두와 가고 싶어지는 카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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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느끼는 것들을 그리거나 쓴다. 일상의 자잘한 순간을 만화, 글씨, 그림으로 표현한다. 지은 책으로는 『사물에게 배웁니다』, 『빵 고르듯 살고 싶다』, 『아직, 도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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