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유불급. 늘 넘치지 않으려고 조바심 내며 살아온 것 같다. 넘친다는 것은 넘어지는 일처럼 여겨졌다. 넘치는 건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는 말은 영혼에 눈금을 긋는 습관을 만들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했던가. 누가 자꾸 밀치며 넘어뜨리고 괴롭힘 당하는 아이는 자신의 발끝을 자주 보며 자란다. 내게는 종종 시간의 발가락이 보였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잔뜩 힘을 주고 창백하게 구부러진 발가락. 가끔은 내 것이었고, 내가 외면한 너의 것이기도 했던. 기쁨이나 질투나 소원을 들키는 일은 넘치고 끝내 넘어지는 일처럼 느껴졌다. 뭐가 좋다고 웃어? 늘 어디선가 그런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세상에서 마음껏 해도 되는 일은 마음을 감추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자랄 구석 없어 보이는 육체가 된 지금에서야, 어떤 마음이든 마음을 감추는 순간부터 슬픔이라는 하얀 관절이 구부러지기 시작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 번도 마음을 감춰보지 않고서 어른이 된 사람은 없다. 그래서 연인이 서로에게 아이처럼 구는 이유이겠다. 사랑은 서로에게 아이가 되는 역행을 허락한다. 넘치고 넘어져도 무릎이 깨지지 않는다. 서로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서 있다면, 넘어져도 서로에게 기대어질 것이므로.
아이가 없는 나는 아이를 거울삼아 자신을 반추하는 성찰과 깨달음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다만, 이 정도 나이가 되자 이제 친구들은 대부분 아이가 있거나 아이처럼 구는 연인과 산다. 어릴 적부터 보던 친구가 어느덧 엄마나 아빠가 되어서 그의 아이와 함께 카페에서 커피라도 마시고 있노라면 아이에게 이것저것 물어본다. 이게 좋아? 이건 싫어? 자주 만나지 못한 어른이 그렇게 말을 걸면 낯가리고 어려워할 줄은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어쩐지 계속 말을 붙이게 된다. 친구는 내가 잠시 아이의 에너지를 낭비하도록 내버려둔다. 육아는 행군 같은 일이어서 종종 군장을 대신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짧은 만남 속에서 나는 아이의 웃는 얼굴을 한 번 보려고 온갖 뇌물과 장난을 구사한다. 아이의 환심을 사고 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친구가 평소 사주지 않는다는 과자나 장난감만 골라 사준다. 편의점에서 나는 빛난다. 정확하게는, 나의 지갑이 빛난다. 그게 훗날 아이의 기억 속에 내가 인생에서 몇 없을 좋은 공범으로 남는 방법이라는 걸 아는 영악한 계략이다. 물론, 다음에 만났을 때 아이는 내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편의점에 아이를 데려간다. 졸린 아이를 안거나 업고 헤어지는 카페 앞에서 친구는 말한다. 너도 빨리 낳으라고. 대답을 뭉개고 웃으며 인사하고 돌아서면 조금 서먹한 기분이 든다. 친구는 멀리 갔다. 아이가 자라는 속도로. 다음에 만날 땐 또 어디쯤일까, 조금 걷다가 친구가 아이와 사라진 쪽을 바라본다.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고 여기고 있다. 사람의 순수와 제어되지 않는 미숙과 쉽게 끓고 부서지는 생명의 열기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서 피하는 쪽에 가깝다. 흥미는 있으나 어려워서 좋아하기 힘든 대수학 같은 것이다. 아이라는 상태만큼, 사람의 이쪽과 저쪽이 가깝게 붙고 뒤섞이는 상태는 없을 것이다. 분명 나 역시 지나온 유년일 텐데, 어쩐지 유년은 내게 밀봉하고 치워버리고 싶은 기분을 주곤 한다. 어둡고 가학적인 세상에 아이가 고립되는 영화나 소설을 보면 도중에 덮어버리고 싶다. 불쾌감 이전에 어떤 두려움이 끈적하게 고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2018년 한국에 개봉한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미리 정보를 알았다면 선뜻 보지 않았을 작품이었다. 포스터에 속았다. 파스텔톤 연보랏빛 밝고 화창한 건물 앞에서 해맑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세워놓고 ‘우리를 행복하게 할 가장 사랑스러운 걸작’, ‘디즈니월드 보다 신나는 무지개 어드벤처’라니. 포스터에 속는 순간부터가 이 영화의 설계라면 나는 하수임이 틀림없었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포스터
헬리는 플로리다 올랜도 디즈니월드 근처 모텔에서 딸 무니와 장기 투숙하는 홈리스 여성이다. 모녀의 투숙지는 파스텔톤 연보랏빛으로 외관이 칠해진, 오래된 싸구려 모텔 ‘매직 캐슬’. 영화는 디즈니월드 주변,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빈민촌이 된 모텔촌을 배경으로 무니를 비롯해 모텔을 전전하는 아이들을 시선의 중심에 두고 따라다닌다. 무니는 해맑다. “안심하세요, 나랑 있으면 안전해요.” 매직 캐슬의 골목대장을 자처하는 무니는 엄마 친구 아들 스쿠티를 비롯해 매직 캐슬 건너편 모텔 ‘퓨처 랜드’에 새로 온 젠시와 함께 셋이 어울려 다닌다. 아이들은 부모가 돈을 구하러 나가 있는 동안 지역 전체가 화려한 원색으로 칠해진 가게가 즐비한, 마치 디즈니월드의 모사품 같은 동네를 쏘다니며 어떻게든 놀고 다닌다. 동전을 줍거나 주변 관광객에게 적선 받은 돈으로 소프트 아이스크림콘 하나를 셋이 나눠 먹으며 즐거워하고, 모텔 기계실에 몰래 들어가 배전반 스위치를 가지고 놀다가 정전을 일으키고, 건물 난간에 매달려 지나가는 어른을 놀리거나 술래잡기를 한다. 자신들이 아지트 삼은 모텔 근처 울창한 숲속 그루터기에 앉아 정기적으로 오는 봉사 단체의 구호 트럭에서 받은 빵과 잼을 먹으며 인생의 맛이란 이런 거지, 한다. 아이들은 달콤함에 집착한다. 아이스크림, 과자, 잼, 탄산음료. 가장 즉각적인 행복을 느끼게 하는 음식들. 카메라가 잠시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헬리를 비롯한 아이들의 부모들을 비추면 그들은 주로 퀭한 얼굴로 마리화나와 술과 담배를 물고 있다. 그러나 헬리는 그늘뿐인 엄마는 아니다. 도매상에서 향수를 떼어 고급 리조트 주차장에서 보따리 호객을 할 때나, 친구가 일하는 도넛 가게에서 남은 도넛을 건네받아 하루 식사를 때울 때. 더 이상 멀쩡하게 취직할 곳도 없어 결국 딸과 머무는 모텔방에서 데이팅 어플로 매춘을 감행하고 손님의 가방에서 디즈니월드 입장권을 훔쳐 팔 때도. 헬리는 무니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고 언제나 돌보려 애쓰는 당당한 엄마다. 당장 일주일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전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늘 하루 무니와 휴대폰으로 음악을 틀어놓고 침대 위에서 춤을 추며 놀아준다. 자신들을 해하려는 자들에게는 욕설과 주먹질도 서슴지 않는다. 헬리는 아동 보호국에서 무니를 자신과 떼어 데려갈까 봐 전전긍긍한다. 영화 후반부, 결국 모종의 상황으로 아동 보호국에 신고가 제출된다. 순경과 보호국 직원이 무니를 데려가려는 결말, 관객은 착잡한 심정에 빠진다. 이성적으로 무니는 보호국을 따라 위탁 가정에 수용되는 편이 헬리 품에서 모텔촌을 전전하는 작금의 상황보다 나아질 기회다. 그러나 헬리와 무니가 함께 살지 않는 것이 어떻게든 함께 살아가려 했던 그들에게 최선의 결론일까. 그 와중에, 무니가 직원의 손을 내팽개치고 매직 캐슬에서 도망쳐 달린다. 건너편 모텔의 젠시에게 찾아간다. 그리고 내내 한 번도 운 적이 없던 무니가 서럽게 울며 젠시에게 말한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제 못 볼지도 모른다고. 잘 지내라고. 아이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작별을 위해 삼켜지지 않는 울음을 배운다. 말수가 적고 차분했던 젠시는 조금 울먹이다가 결연한 표정으로 무니의 손을 뺏어 잡고 달린다. 내내 현실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던 영화는 그제야 현실을 거절한다. 젠시와 무니는 손을 잡고 디즈니월드로 뛴다. 카메라는 배속을 걸어 두 아이의 뒷모습을 로우 앵글로 따라간다. 놀이동산에 흐르는 경쾌하고 밝은 음악과 함께. 두 아이는 수많은 행인들을 제치고 마침내 디즈니 로고에도 그려진 디즈니월드의 상징인 매직 킹덤 앞까지 도달한다. 꿈과 환상의 성채. 거기서 영화는 마친다. 스텝 롤이 오르며 디즈니월드를 누비는 많은 행인들의 목소리가 엔딩 음악 대신 귓가에 오래 깔린다. 마치, 나 역시 젠시와 무니가 지나친 행인 중 한 명인 것처럼.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1967년경 월트 디즈니 월드 건설 당시 실제 건축 프로젝트를 지칭하던 이름이자, 플로리다주가 실시하는 홈리스 지원금 구제 정책의 명명인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영화가 해당 제목을 달게 된 점에서부터 겨누는 지점은 명확하다. 이게 바로 빌어먹을 꿈과 환상과 희망의 나라라고. 그러나 션 베이커 감독의 방식은 유머러스하고 그림은 어둡지 않다. 장면의 색채를 밝게 쓰는 감독 특유의 방식은 전작 <탠저린>과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근작 <아노라>까지, 사회의 사각지대를 부풀리지 않고 담아 동화적 색감을 덧칠하여 일종의 잔혹동화처럼 잘라서 가져온다. 세련된 악몽처럼. 션 베이커 감독이 끊임없이 지속하는 작업의 특징 중 하나는 성 노동자를 중심인물로 삼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시간과 자본을 팔아 끊임없이 생존해야 하는 욕망의 세상에서 알맞은 기회나 자리를 허락받지 못하고 사회와 사람에게 버려지거나 버린 자들이 결국 최후에 팔게 되는 노동. 아마도 감독은 거기서 일렁이는 인간의 바닥과 영혼의 민낯 같은 것을 감지한 건 아닐까.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유독 기억에 오래 머무는 이유는 어른이 만든 폐허에 쏟아지는 햇볕 속에서 아이들이 너무나 천진난만하게 뛰어놀았기 때문일 것이다. 온통 망가진 것들 사이에서 저토록 망가지지 않은 작은 사람, 어쩌면 결국 망가질 미래가 예정된 자들이 망가진 것들을 그러모아 망가지지 않는 마음을 만들며 살아가는 현실을 나는 자주 무심하게 지나쳤으므로.
왜 아이를 갖지 않냐고 묻는 인생의 선배들에게 나는 종종 웃음으로 무마한다. 아직 잘 모르겠다고. 부모가 될 자신이 아직 없다고. 아이를 갖는 일과 갖지 않는 일 모두 내게는 침범할 수 없는 개인의 자유 영역이다. 삶의 진도로 여기지도 않고 거기엔 부정도 긍정도 없다. 다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만약 태어난 나의 아이가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면 어떡하지? 내가 나도 모르게 꾸미며 살던 악몽과 겪으며 떨었던 불행이 전염되면 어떡하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이라는 존재가 내게 쏟아낼 원망과 책임이 두려워 피하고만 싶은 것이다. 이런 기색을 내색할 때면 친한 사람일수록 면박을 주곤 한다. 네가 너로 자랐듯이, 아이도 알아서 잘 자란다고. 네가 모든 걸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만이라고. 맞는 말이다. 아이는 어른의 소유가 아니고 아이의 운명은 나의 손바닥에서 모래처럼 빠져나갈 것이다. 내가 그랬듯. 지금까지의 나는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고 확신하여 주기가 어려워 머뭇거렸다. 내가 데려간 매직 캐슬에서 삼켜지지 않는 울음을 우는 아이를 상상한다. 거기에 스스로의 유년을 포개는 버릇이 내가 가진 자기연민의 나쁜 동작임을 안다.
젠시와 둘이 빵에 블루베리 잼을 발라 먹으며 무니가 묻는다. 내가 왜 이 쓰러진 굵은 나무 몸통 위에 올라앉아 발을 까딱거리며 빵 먹는 걸 좋아하는지 아냐고. 젠시와 무니의 머리 위로 여름 햇볕이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며 어룽거린다. 젠시가 손에 묻은 잼을 핥아먹으며 묻는다. 왜? 무니도 빵에 잼을 바르며 입에 넣는다. 우물거리며 말한다. 쓰러졌는데도 계속 자라거든. 그래서 좋아. 너만 특별히 데려와 주는 거야.
사람의 결핍과 고통을 과장하거나 포장해서 무언가 만들어내는 자들을 경계한다. 그것은 진부한 미술이고 납작한 영화이며 때론 너무나 얄팍한 문학이다. 상품이 아니고서야 예술은 생존할 수 없겠지만, 상품이 되기 위해 제품이 아닌 척하는 예술은 어딘가 입속을 까끌까끌하게 한다. 아마 경멸하고 있는 것일 테다. 그러나, 오명이든 악명이든 뒤집어쓴 채로 그럼에도 끝까지 세상의 그을린 부분을 바라보려고 잔열에 눈이 붓는 자들을 깊이 존경하고야 만다. 우리는 자라기도 전에 쓰러지기도 하지만, 쓰러져서도 자라고는 하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여기며 살다가는 결국 나도 언젠가 너의 눈에서 영영 사라진 채로 살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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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우
201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당선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우리 없이 빛난 아침』과 산문집 『나의 아름다움과 너의 아름다움이 다를지언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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