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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아의 카페 생활] 이제는 초록이 된 마을에서 봄을 느끼자 - 호핀치

임진아의 카페 생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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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핀치가 있는 마을에 가려면 가느다란 숲길이 차려주는 계절 길을 따라가야 한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 호핀치가 있는 마을까지는 마음만 먹으면 그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 다음 봄에도 귀리모카를 마시면서 또 다른 계절 노래를 부르며 이 마을에 나를 덧칠하고 싶다. (2023.04.21)


격주 금요일, 임진아 작가가 <채널예스>에서 작업하기 좋은 카페를 소개합니다.
‘임진아의 카페 생활’에서 소개하는 특별한 카페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경의선 숲길을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 마포평생학습관에 갈 일이 있어 오랜만에 홍대 거리를 배회하다가 경의선 책거리로 들어섰다. 이 길은 원래 어떤 모습이었더라. 기억하려고 애쓰고 있자니 오늘의 계절을 열심히 표시하고 있던 경의선 숲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철길을 따라 조성된 길고 가느다란 공원이지만 여기만의 봄이 나름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멀리까지 초록빛으로 물든 풍경을 바라보며 나무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 없는 산책을 하려고 했는데, 가고 싶던 카페 하나가 덩그러니 그려진다. 매일 여행하듯 살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쉬이 헤매게 내버려 두지 않는 걸까? 멀지 않은 곳에 '카페 호핀치'가 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가본 적은 없지만 분명 좋아할 거라고 확신했던 곳. 초록 길을 걷다가 마실 커피는 무엇이 될까? 남은 거리는 메뉴를 고민하기에 그다지 긴 거리는 아니었다.

시원하게 탁 트인 길을 걷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금세 눈이 동그래졌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눈에 들어온 작은 건물 하나. 그 건물 2층은 나의 첫 회사 사무실이었다. 오래전의 내가 흐릿하게 남아 있는 거리들이 있다. 자주 떠오르거나 애써 회상하는 기억과는 다른, 미처 챙기지 못했던 언젠가의 나를 만나게 되는 거리.

이십 대 초, 대학 졸업도 전에 회사 생활을 시작했던 나는 입사의 기쁨은 느낄 줄도 몰랐고, 그저 살아낼 방도가 얼추 생겼을 뿐이었다.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앉아 있을까, 궁금해하며 뻑하면 창문 밖을 내다봤다. 경의선 숲길에서는 그때의 내 표정이 민망할 만큼 잘 보였다.

원래 여기는 전부 회색이었는데. 이제는 초록이잖아. 여기에도 봄이 오는구나. 카페는커녕 마음 둘 곳 하나 없던 거리를 이제는 봄이라는 이유로 걷고 있었다. 내가 달라진 걸까, 거리에 이제야 표정이 생긴 걸까, 아니면 둘 다일까. 매일 텅빈 눈으로 출근하며 걸었던 거리를 마저 지나자 작은 조명등 같은 카페 호핀치에 금방 다다랐다.

과거에서 온 사람처럼 카페에 들어가니 몇 번 왔던 것처럼 마음이 편했다. 카페 앞에는 여러 명의 손님이 둘러앉아 커피 한 모금 날씨 두 모금 번갈아 마시고 있었다. 내부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기엔 충분했다. 갓 구운 쿠키가 식고 있던 바 테이블에 슬쩍 가방을 올려 두었다.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주문하는 곳이 곧장 눈에 들어온다. 나는 헤매지 않아도 되는 카페나 식당을 좋아한다. 호핀치는 입장하자마자 쉬운 마음이 생기는 곳이었다.

귀여운 메뉴판과 곳곳에 더해진 메뉴 이름들은 여기의 분위기를 알려준다. 귀리 우유나 디카페인 메뉴가 마련되어 있는 카페에 가면 마음이 놓인다. 편한 의자나 적당한 높이의 테이블만큼 중요한 요소다. 귀리 우유나 두유로 변경 가능하다는 문구가 속삭이듯 작게 쓰여있는 게 아닌, '귀리모카'라는 이름의 음료가 당당하게 있어서 좋았다. 귀리 우유로 먹어야 더 고소하고 맛나다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귀리모카' 이름 옆에는 '초콜릿 에스프레소 귀리우유'라고 적힌 귀여운 글씨가 더해져 있다.

마음을 편하게 하는 건 메뉴만이 아니었다. 어린이 손님, 동네 강아지 손님을 환영하는 분위기는 모두를 안심시킨다. 나와 비슷하게 입장한 강아지 손님은 곧장 찬물을 받았다. 꼭 들어오면서 "늘 마시던 걸로요" 하고 주문한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귀리모카 아이스'를 주문하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렇구나, 호핀치는 여기에 있던 거구나. 옛날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여전히 잔잔하게 놀라워했다.

"잘 저어가면서 드세요."

바로 앞에서 만든 귀리모카가 내 자리까지 금방 도착했다. 넉넉한 유리컵에 넓은 받침과 나무 수저. 귀리모카를 아이스로 주문하면 어떻게 나오는지 알게 된 순간, 따뜻하게 주문하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막 도착한 곳에서 벌써 다음을 그려본다. 만든이의 말대로 나무 수저로 잘 저은 후 한 모금을 마셨더니 등이 꼿꼿하게 펴졌다. 위치값이 그새 경의선 숲길 한복판에서 바라봤던 2층 창문으로 옮겨졌다. 이 마을에서 지낼 때 만났던 위로의 맛과 거의 비슷했다. 이제는 없어진 카페 수카라의 두유 핫초코 맛. 15년 전의 내 모습이 풍경처럼 그려졌다.

언제나 어둑어둑 늦은 시간에 퇴근하며 낮은 마음이 느껴지걸랑 일단 걸었다. 낮에는 회색 밤에는 진회색으로 변한 거리를 도보로 천천히 빠져나와 길을 건너고 오르막길을 오르면 금방 '수카라'가 나왔다. 낮고 편안한 민트색 테이블에 앉아 따끈한 두유 핫초코를 후루룩 마시다 보면 '수카라'에 비치되어 있던 그림책들이, 발효 중인 과일들이, 포개져 있는 그릇들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차분한 표정이 보였다. 그제서야 등을 기대고 앉았다. 고소하고 진한 두유 핫초코에는 추운 계절의 맛이 스며들어 있다.

몸과 마음이 기억하고 있던 맛을 차갑게 마시는 이번 봄. 그때는 회색, 지금은 초록인 게 아니었다. 지난날에도 매일의 계절은 차려졌고,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씩 나아지려고 조용히 애쓰며 사는 건 다르지 않았다. 2층 창문에는 봄이 오지 않은 줄 알았는데 봄인 줄 몰랐던 것뿐이었다.



정수윤 번역가의 책 『날마다 고독한 날』에서 만났던 계절 노래들이 차례차례 다시 불어온다. 책을 읽을 때만 해도 계절을 노래하는 마음은 옛사람의 마음으로만 여겼는데, 계절 아래에 사는 모두의 마음이었다. 15년 전의 내가 겪었던 봄의 노래도 버젓이 있었다.

볕 들지 않는  골짜기에는 봄도  남의 일이고

피고 지는 꽃들에  마음 쓸 일이 없네

천 년 전에 지은 계절 노래 속에 내가 아는 봄이 있다. 봄을 겪지 않았던 봄. 그것 또한 누군가의 계절 노래로 알게 된다. 계절이란 돌고 도는 거울에 불과하고 그렇기에 좋은 게 아닐까. 천 년 전의 계절 노래를 빌려볼까. 이제는 초록이 된 마을에서 봄을 느끼던 오늘의 마음을 노래해 보기로 했다.

가지려 하지 않아도  봄은 곁이 되고

긴긴봄을 지나자  작은 계절에 쏟을 마음뿐이네.

호핀치가 있는 마을에 가려면 가느다란 숲길이 차려주는 계절 길을 따라가야 한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 호핀치가 있는 마을까지는 마음만 먹으면 그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 다음 봄에도 귀리모카를 마시면서 또 다른 계절 노래를 부르며 이 마을에 나를 덧칠하고 싶다.

호핀치의 뜻이 궁금해졌던 건 커피를 다 마시고 나와서였다. 곳곳에 있던 새 일러스트가 콩새였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호핀치 호핀치' 리듬감 있게 입술을 움직여가며 중얼거리자 기분이 조금 귀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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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임진아(일러스트레이터, 작가)

살면서 느끼는 것들을 그리거나 쓴다. 일상의 자잘한 순간을 만화, 글씨, 그림으로 표현한다. 지은 책으로는 『사물에게 배웁니다』, 『빵 고르듯 살고 싶다』, 『아직, 도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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