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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아의 카페 생활] 어김없이 똑같은 프롤로그 - 물루
임진아의 카페 생활 (1)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김없이 똑같은 대사가 도착한다. 푸근한 말풍선에 푸근한 표정으로 답하면서 늘 같은 자리에 앉아 내부를 둘러본다. 꽤 넓은 편이지만 기분의 너비는 좁게 느껴진다. (2023.04.07)
격주 금요일, 임진아 작가가 <채널예스>에서 작업하기 좋은 카페를 소개합니다. ‘임진아의 카페 생활’에서 소개하는 특별한 카페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
혼자 좀 있어야겠다. 카페에 가자는 뜻이다. 내일 아침에는 다르게 시작하고 싶다는 말이다.
나의 평소에 그려지는 아침은 매일 비슷하다. 8시에 눈을 떠서 누워 있다가 발가락부터 움직여가며 몸을 깨운다. 미리 씻어둔 샐러드 채소를 그릇에 담고 소분해서 얼려둔 빵을 굽는다. 양배추나 가지를 굽고 계란 프라이를 만든다. 아침의 테마는 빠르고 간단한 식사다. 커피와 함께 먹고 작업실에 도착하면 10시. 10시부터는 일의 구름 아래에 나를 어김없이 두려고 한다.
잔잔하다면 잔잔한 아침을 그리면서도 어째서 혼자 좀 있어야겠다고 중얼거리는 걸까. 마음속에서 버석거리는 소리가 줄어들지 않는 날은 언제라도 찾아온다. 그 소리를 들었는데도 모른 척하기가 이제는 좀 그렇다.
동거인과 키키에게 오늘의 일정을 전한다. 나는 혼자 좀 있다가 올게. 누구든 나의 시간을 응원해 주기만 한다. 좋은 생각이다. 어디 가려고? 아직 안 정했어. 마음은 이미 카페 문 앞이면서.
오픈 시간이 되자마자 첫 손님이 될 카페는 카페 물루. 서울 마포구 대흥동에 있다가 나의 작업실이 있는 성산동으로 이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키다리 아저씨라는 정겨운 빵집과, 근사한 꽃집 '마덜스가든'이 있는 골목에 더해진 은은한 카페. 카페 이름이 적힌 간판도 없고 지도 앱에도 나오지 않지만 여기의 분위기가 필요해 찾아온 모두에게 다정한 시간을 제공하는 곳이다.
그래봤자 집에서 작업실 가는 거리와 별다를 것 없는데도 카페 물루로 향하며 나의 오전 루틴에는 작은 변화가 생긴다. 하지만 거리상으로 가까울 뿐, 카페와 나의 사이는 여전히 첫날 분위기에 멈춰있다.
"자리에 앉으시면 메뉴판 갖다 드릴게요. 주문은 자리에서 해주시면 됩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김없이 똑같은 대사가 도착한다. 푸근한 말풍선에 푸근한 표정으로 답하면서 늘 같은 자리에 앉아 내부를 둘러본다. 꽤 넓은 편이지만 기분의 너비는 좁게 느껴진다. 커피 한 잔과의 시간을 만들어주는 부드러운 가구의 힘이 크다. 그저 지금에 집중하게 하는 힘. 모두에게 저마다의 가장 편안한 카페 시간이 있다면, 아마 물루 사장님에게는 이 테이블만큼의 너비가 그렇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 또한 당신과 비슷하다고 답하듯이 이곳을 계속 찾는다.
카페 물루라는 책이 있다면 나는 이 책의 프롤로그를 어김없이 읽은 후에야 읽고 싶은 꼭지로 향하는 독자일 것이다. 매번 같은 인사말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적어도 나는 나를 매번 낯설게 대해 주는 가게에서 안심을 느끼는 편이다. 날씨 이야기나, 근황을 묻는 단골 가게도 우리의 삶에 필요하지만, 여전한 거리감이 이어지는 가게 또한 소중하다. 자주 오는 사람에게도 어김없이 똑같은 말을 전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그려보았다. 오늘 또한 전과 비슷한 시간을 보내길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프롤로그 먼저 읽은 후 오늘의 마음에 맞는 꼭지를 찾아 읽게 되는 책. 카페 물루는 그런 책을 닮았다. 일본 소도시 여행서 『아무날에는 가나자와』는 마음이 답답할 때 펼치는 책 중 하나인데, 아직 가나자와 여행을 구체적으로 세워본 적은 없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읽는 책이라기보다는 매일 같은 곳에서 일하는 성실한 사람들의 기운을 엿보고 싶을 때 펼친다.
'열중하되 매몰되지 않는 시간들'이라는 제목의 프롤로그는 저자가 다닌 '가나자와' 속 크고 작은 가게들이 꾸리고 있는 공통된 시간을 의미한다. 여행지에서 만난 가게들에서 비슷한 표정을 읽어내는 건 아마도 세 명의 저자 또한 자신의 일터에서 매일 한결같이 지내고 싶은 사람들이기 때문은 아닐까.
"누군가 정성 들여 만든 것을 소비할 때 그 사람의 세심하고 고운 시간을 사는 거란 생각을 자주 합니다."
프롤로그를 읽으면 가본 적 없는 마을의 모르는 가게들을 어떻게 상상하면 좋을지 알게 된다. 오늘은 일단 멀리 가지 않고 도보로 이동 가능한 카페 물루에서 세심하고 고운 시간을 산다.
카페 물루에서는 메뉴판 읽는 시간이 길어지기만 한다. 아직 비어 있는 테이블에 그려질 중요한 포인트를 상상하기. 작은 소책자처럼 생긴 메뉴판에는 핸드드립 커피를 시작으로, 커피 젤리나 플로트,(음료 위에 아이스크림을 올리는 차가운 음료 메뉴) 크림 커피 등이 있고, 청귤 소다나 매실차 같은 커피 외의 음료도 마련되어 있다. 카페에 가면 무조건 커피를 마시는 나지만, 카페 물루의 청귤 소다는 커피를 등지게 만들곤 한다.
주문을 마친 후 책을 넘기는 시간을 위해 여기에 왔다고 할 만큼, 카페 물루에서 내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을 사랑한다. 아침 시간에 주로 주문하는 건 팥앙금 토스트와 커피. 얇은 천으로 차려진 작업장에서 천천히 원두를 갈고 커피를 내리고 고요하게 담아낸다. 흐릿하고 단정한 분위기 속에서 여행서를 넘기다보면 자연스레 바깥을 내다보게 된다.
혼자 좀 있고 싶고 그래서 카페에 가고 싶은 건 나의 일상을 저버리고 싶은 게 아니라 오히려 그걸 가만히 앉아 보고 싶은 마음에 가깝다. 나에게는 걸어서 가는 일터가 있고, 그 길을 지나쳐버려도 나를 앉게 할 동네 카페가 있고, 그럴 수 있도록 일과 쉼 사이에서 앞다투며 사는 내가 있다.
평소의 그림체에서 조금씩 벗어날 줄 알아야 매일 비슷해 보이는 그림을 오래 그릴 수가 있다. 한 박자 정도는 여유를 갖게 해주는 카페 물루. 카페 물루를 나올 때 인사를 나누면서 생각한다. 다음에 왔을 때도 똑같은 말을 듣고 싶다. 자리에 앉아서 주문하는 방식을 언제까지라도 계속 모른 척 방문하고 싶다. 내가 마신 커피와 안녕하고 나서야 계산을 마치고 퇴장을 하는 여기만의 방식이, 정말 마음에 든다.
오후에는 오늘의 할 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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