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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점심) 산책

모과 노랗게 되었나 보러 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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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하면 듣기도 전에 지루하고 따분할 수 있지만, 사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2018.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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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입사했고 겨울이 되었다. 입사 날부터 하루에 만 원씩 정기 적금을 붓는데 오늘 150만 원인 걸 보니 150일이 흘렀을 거다. 낯선 얼굴들이 제법 익숙해졌고, 어색하게 쌓여 있던 책상 위 물건들도 제자리를 찾았다. 이제는 매일 반복하는 몇 가지 일은 자세히 설명할 수도 있다. 일단 사무실에 도착하면 옷걸이에 외투를 걸고 컴퓨터를 켠다. 그동안 책상 위에 놓인 머그잔과 티 박스를 들어 올린다. 립스틱 자국과 어제 마시다 남은 커피가 말라붙은 컵을 한 손에, 찻잎이 든 케이스를 다른 한 손에 들고 3층 탕비실로 올라간다. 그곳에는 작은 창이 하나 있는데 내가 들르는 시간에는 매번 햇볕이 든다. 차를 우리려면 3~5분 정도가 걸리기에 차 거름망을 뒤적거리며 멍하니 그 빛을 보고 있는다. 매일 아침에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 자칫 지루함을 예상할 수 있지만, 딱히 그렇지는 않다. 계절이 지날 때마다 빛이 떨어지는 위치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우려내는 차에 따라 주변 냄새도 달라지기에 완전히 같은 일이 반복된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다.

 

점심은 팀원들과 보낸다. 프리랜서로 일할 때는 거의 혼자 점심을 먹었다. 홀로 먹을 때는 뭘 먹어도 맛이 별로 없다. 그런 식사를 꽤 오래 해왔기 때문인지 누군가들과 같은 식탁에 앉는 일에는 특별히 고마운 마음이 든다. 우리 팀에는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아 웃음이 꽉 채워지는 점도 그렇다.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산책을 하러 간다. 회사에서는 스스로 앞장서는 일이 거의 없는데 산책만큼은 먼저 나선다. “혹시 산책하러 가실 분?”이라 작게 묻고 그때마다 가겠다고 대답하는 몇 사람과 걷는다. 열 명의 팀원 중 서너 명이 주로 산책을 하러 간다.

 

회사 주변은 상가나 차가 많기에 조금 걸어 여유로운 동네로 간다. 첫 산책을 하고 다음 날, 그다음 날, 또 그다음 날에도 몇 번씩 같은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그건 산책로 같은 게 되었다. 같이 걷는 길이기는 하지만 아마, 내가 가고 싶은 길이었을 거다. 걸음이 빨라 늘 앞장서 걷게 된다. 뒤따라오던 사람들은 내가 걷는 쪽으로 자연스레 따라오게 되는 편이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이제 익숙한 길이 몇 있다. 산책을 몇 번씩 같이 다닌 멤버들은 이제 어느 자리에서 방향을 꺾을지, 그 골목을 돌아가면 무엇을 보게 될지 알고 있다. 나는 매번 내 속도로 걷다가 가끔 그들이 잘 오고 있나 뒤를 돌아본다.

 

산책로는 그저 한가한 주택가라, 공원이나 숲에서 볼 수 있는 만족스러운 풍경은 없다. 그래도 걷다 보면 자꾸 눈여겨 보게 되는 것들이 생긴다. 늦여름이었을 거다. 창이 큰 어느 카페 창틀에 개가 앉아 있었다. 우리는 그 앞 놀이터에서 시소를 타다가 녀석을 발견했다. 멀리서는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갔더니 사납게 짖어 댔다. “귀여운 게 성깔이 아주!” “겁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요, 겁쟁이!” “알겠어. 우리 갈게. 갈게. 그만 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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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는 카페 앞을 지날 때마다 모두 창을 돌아본다. 창이 닫혀 있는 날에는 고개를 쭉 빼고 안쪽을 살피기도 한다. 개가 생각하는 적정선이 어딘가 있는 것 같은데 그 지점을 넘으면 어김없이 표정을 바꿔 짖는다. 매일 비슷한 말을 중얼거리며 우리는 쫓겨나는 행색으로 웃으며 그 앞을 지난다. 그 카페에서 멀지 않은, 그러니까 시소를 타던 놀이터가 있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는 모과나무가 한 그루 있다. 우연히 모과를 발견했을 때는 열매가 연두색이었다. 언제부턴가 노랗게 익었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산책의 일부가 되었다. 처음에는 혼자 생각만 하다가 나도 모르게 “언제 노랗게 될까요?”라고 중얼거렸고 동료들도 “그러게요.” 하며 한동안 나무를 같이 봐주었다. 그 뒤로는 “모과 노랗게 되었나 보러 갈래요?”라는 말이 “산책하러 갈래요?” 대신 쓰이기도 했다.

 

늦가을, 오랜만에 나무 쪽으로 걷는데 동료가 “나중에 모과를 보면 선아 씨 생각이 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회사를 영원히 다니지는 않을 것이고, 지금 매일 같이 점심을 먹는 사람 중에는 만나지 못하게 될 사람들이 더 많을 거다. 그런 이들 중 몇이 어느 가을에 어슬렁거리며 걷다가 노란 모과를 보고 나를 떠올리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지금보다 주름지고 허리도 굽고 걸음도 더 느린 동료는 어떤 모습일까.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날은 평소보다 느리게 걸을 수 있었다. 요즘은 추워서 점심 산책은 하지 않는다.


9월의 어느 일요일 저녁, 혼자 해변을 따라 산책하다 모래사장에 멍하니 앉아 석양을 바라보고 있는데, 손에 뭔가 딱딱한 것이 잡혀서 문득 보았더니, 아니 그것은 19세기의 호놀룰루에서 카메하메하 대왕이 애용했다는 전설의 백금 구둣주걱…… 이 아니라, ‘스바루’ 마크가 찍힌 아주 흔하디흔한 키홀더였다. 아마 누군가의 바지 주머니에서 굴러 떨어져 발견되지 못한 채 거기에 내내 파묻혀 있었을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중에서 (30-31쪽)

 

 

 



 

 

노르웨이의 숲무라카미 하루키 저/양억관 역 | 민음사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경구와 비틀스의 명상적이고 우수 어린 멜로디, 감각적인 도시 생활의 풍경과 서정적인 숲 속의 풍경, 구원받지 못한 사랑과 사랑을 통한 구원이 공존하는 스무 살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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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박선아(비주얼 에디터)

산문집 『20킬로그램의 삶』과 서간집 『어떤 이름에게』를 만들었다. 회사에서 비주얼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저/<양억관> 역15,300원(10% + 5%)

“나를 언제까지나 잊지 마, 내가 여기 있었다는 걸 기억해 줘.” 하루키 월드의 빛나는 다이아몬드 무라카미 하루키를 만나기 위해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 페이지를 처음 펼치는 오늘의 젊음들에게, 그리고 오랜 기억 속에 책의 한 구절을 간직하고 있는 어제의 젊음들에게, 한결같은 울림으로 예민하고 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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