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희진의 돌봄 인문학
바다표범이 이끄는 여행
‘너 자신을 알라!’ 이것은 돌봄과 양육에서도 최상의 금언
나는 그저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얻은 인문학적인 통찰들을 꼭 기록하고 싶었고, 그 내용을 나와 같은 작업을 하는 사람들과 꼭 공유하고 싶었다.
하프물범
1.
집 앞 골목길에 아이와 같이 서 있었다. 아이는 내 앞에서 재롱을 부리며 깡총깡총 뛰다가 갑자기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튀더니 귀여운 점박이 바다표범으로 변했다. 해양 생물에 무지한 나로서는 바다표범인지 해달인지 강치인지 하프물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새하얀 털에 까만 얼룩점들이 박혀 있고 작은 귀가 달린 물개 모양의 생명체였다.(아무래도 현실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아닌 듯하지만, 편의상 ‘바다표범’이라고 부르겠다)
‘바다표범이 되어도 역시 귀엽군!’이라고 생각하던 차에, 그 바다표범이 나를 태우고 열심히 오르막길을 오른다. 영차, 영차! ‘이 작은 게 나를 태우고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가 있을까?’ 의심과 안쓰러움이 혼재된 마음으로 나 역시 온몸에 힘을 준 채 바다표범을 도우려고 애쓴다. 바다표범은 힘에 겨운 듯 오른쪽으로 비틀, 왼쪽으로 비틀 하면서도 결국 끝까지 잘 올라갔다. 바다표범도 기특하고 나도 기특하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내리막길이 나왔는데, 이건 오르막길보다 더 위험해 보인다. ‘정말 얘를 믿어도 될까?’ 고민하다가 3분의 1쯤 내려왔을 때, ‘에라 모르겠다’ 하고 바다표범에게 몸을 맡겼더니 스키 활강을 하는 것처럼 신나게 내리막길을 미끄러져 내려간다. 마지막엔 거의 날아가는 것 같다.
내리막길이 끝나는 곳에는 커다란 웅덩이, 늪 같은 것이 보인다. ‘이렇게 날아가다간 저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바다표범과 같이 그 웅덩이로 풍덩하고 들어간다. 풍덩 하고 물속에 빠지는 기분도 날아가는 것만큼이나 좋았다. 물속에서 눈을 뜨는 게 좀 무섭긴 했는데, 막상 눈을 떠보았더니 생각보다 눈이 아프지도 않고 주변 경관이 잘 보여서 신기했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들도 기대했던 것보다 근사했다. 사방이 흙벽으로 둘러싸인 꽤 깊은 웅덩이였는데 마치 선사시대의 유적지에 온 기분이었다. 흙벽에는 온통 화석 같은 신비로운 이미지들이 가득했다. 조금 으스스하지만 <인디아나 존스>처럼 흥미진진한 모험 영화를 찍는 듯했다. 그중 한쪽 벽을 채운 커다란 손 모양 음각에 눈이 갔다. 두 손 모양으로 패인 자국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가까이 가서 그 자국에 내 두 손을 가만히 맞춰보았다. 사람의 손이라기엔 너무 거대해 보였던 흔적인데 내 손은 그 자리에 제법 잘 들어맞았다.
영화처럼 벽이 쫙! 갈라지면서 비밀의 사원으로 들어갈 문이 열리리라 기대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냥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물 밖으로 나왔다.
2.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들릴지, 어떻게 해석될지 궁금하다. 이것은 내가 얼마 전 꾼 꿈 이야기이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그리고 오래도록 기운을 주는 특별한 꿈이었다. 세부적인 미스터리는 남아 있지만, 나로서는 특별히 해석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도 그 의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꿈이었다. 너무 싱겁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꿈은, 내가 주저하고 망설이다가 엄마가 된 과정과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경험한 새로운 세계에 대해 너무나 정확하게 요약해서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아이가 태어났다. 한편으로 출산과 양육은 험한 오르막길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나게 내리막길을 내달리는 듯한 기쁨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길의 마지막에는 커다란 물웅덩이가 있다. 엄마와 아이가 주고받는 매우 친밀한 교감이 그런 물 웅덩이의 모습이 아닐까. 수륙양생의 생물인 우리 아이와 달리, 나는 그런 관계에 익숙해질 자신이 없었지만, 용기를 내어 풍덩 입수해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나는 다시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성찰할 기회를 얻었다. 선사시대의 유물, 혹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화석을 관찰하듯이 유년시절의 나를 객관적으로 다시 한번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나의 엄마, 아빠, 나의 가족, 나아가 인간에 대해서도 더 많이 이해하게 해주었다.
3.
나는 육아 전문가가 아니다. 만약 육아능력검정시험 같은 것이 있다면 간신히 낙제를 면할 정도의 아슬아슬한 육아력을 지닌 그냥 엄마다.(물론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육아력에 대해 자책하기보다는 “양육은 전문가들의 스포츠가 아니”라는 앤드루 솔로몬의 위로를 항상 기억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러니 앞으로 육아에 도움이 되는 현명한 조언이나 최첨단 정보 등을 제공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 나는 그저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얻은 인문학적인 통찰들을 꼭 기록하고 싶었고, 그 내용을 나와 같은 작업을 하는 사람들과 꼭 공유하고 싶었다.
출산과 양육, 돌봄과 키움에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층위를 비롯해 다양한 층위가 있다. 또 돌봄은 한국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어렵고 복잡한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아이를 낳고 나서야 내가 어쩔 수 없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면이 있다.(정치적인 측면의 자각) 게다가 한국 현실에서 노산 직장맘으로 사는 일은 기본적으로 피곤하고 구질구질한 일이다.(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에 대한 자각) 이런 경험과 인식이 나의 돌봄 경험의 아주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기는 하지만, 돌봄에 대해서 공적으로 이야기하는 일이 그 테두리 안에만 갇혀서는 안 될 것이다. 돌봄의 가치, 인문적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돌봄에 대한 사회적 담론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는 데 꼭 필요한 일이라고 믿는다.
앞의 꿈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바다표범이 나를 태우고 그 모든 길을 갔다는 것이다. 나는 엄마가 되어보고 나서야, 돌봄이 “둘이 함께 추는 춤”, 즉 상호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는 키우는 사람과 자라는 사람이 서로 기쁨과 슬픔을 주고받는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아이가 하나의 인간으로 자라나는 동안, 그에 영향을 받아 양육자도 자신의 정체성을 재편성, 재형성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돌봄과 양육은 ‘나 자신이 된다’는 일이 평생의 과제임을 다시 한번 절절히 깨닫는 과정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쓰인 글귀 ‘너 자신을 알라!’ 이것은 돌봄과 양육에서도 최상의 금언이다. 우리는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 인간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돌봄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6세 여아를 키우는 엄마이자, 인문서를 만드는 편집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