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혜숙 “어른과 아이가 같이 볼 수 있는 그림책”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 번역한 아동문학가 엄혜숙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데도 안 하는 일들이 많잖아요. 나이 때문에, 무엇 때문에, 안 하는 거라고 핑계를 대면서 약간 위안을 삼죠.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는 그런 마음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작품을 번역하면서 우리가 스스로 가두고 있는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할머니는 어린이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 걸요
사노 요코 작가의 그림책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의 개정판이 출간됐다. 번역을 맡은 엄혜숙 아동문학가는 영면에 든 작가를 대신해 독자들과 만났다. 지난 3월 27일, 혜화동에 위치한 서점 ‘마음책방 서가는’에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두껍아 두껍아』, 『세탁소 아저씨의 꿈』 등의 어린이책을 집필하기도 한 엄혜숙 작가는 독자들과 함께 사노 요코의 그림책을 읽으며 동화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는 사노 요코 특유의 독특한 발상과 절묘한 유머가 돋보이는 그림책으로 전 세대가 함께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5살 고양이와 함께 사는 98살의 할머니는 “나는 할머니인 걸”이라는 말을 버릇처럼 내뱉는다. 할머니이기 때문에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건 어울리지 않고, 할머니이기 때문에 케이크를 잘 굽는 건 당연하다고 말한다. 99번째 생일을 맞게 된 할머니는 고양이의 실수로 5개의 양초만이 꽂힌 생일 케이크를 받게 되고, 5살 아이로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데도 안 하는 일들이 많잖아요. 나이 때문에, 무엇 때문에, 안 하는 거라고 핑계를 대면서 약간 위안을 삼죠.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 그런 마음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작품을 번역하면서 우리가 스스로 가두고 있는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노 요코는 ‘작가의 말’을 통해 할머니들은 “가장 많이 어린이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고 했다. 이에 답하듯 엄혜숙 작가는 ‘옮긴이의 말’에서 “나이보다는 스스로를 가두는 마음이 더 문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는 어린이 그림책이지만 할머니의 이야기잖아요. 그게 이상하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사노 요코는 ‘할머니야말로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요즘에는 그림책이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많아졌어요. 영역도 굉장히 넓어졌고요. 그러면서 어른을 위한 책들도 가능해지는 것 같은데요. 어른만을 위한 책보다 더 좋은 건 어른과 아이가 같이 볼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는 아이대로 즐거울 수 있고, 어른은 어른대로 즐거울 수 있는 책인 거죠. 같은 책이지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 그림책의 장점이 아닐까 싶어요.”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에서 시작된 ‘어른들의 그림책 읽기’는 『100만 번 산 고양이』로 이어졌다. 『100만 번 산 고양이』는 일본 그림책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100만 번 죽고 다시 살아난 고양이가 자유로운 몸이 된 후 사랑을 하게 되고, 그 대상이 죽음을 맞자 다시는 살아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그게 완벽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이 자유롭게 된 상태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거죠. 이 이야기는 좁게 보면 사랑에 대한 것일 수 있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동양에서 이야기하는 인연이나 업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완벽한 삶을 살았더니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죠.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처럼 『100만 번 산 고양이』에서도 매일 그저 그런 날들을 보내다가 어느 순간 새로운 삶의 계기를 갖게 돼요. 사노 요코의 이야기 스타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내 인생의 그림책을 꼽는다면…
엄혜숙 작가는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처럼 할머니가 등장하는 그림책으로 시모나 치라올로의 『할머니 주름살이 좋아요』를, 그리고 최근 재밌게 읽은 그림책으로 댄 야카리노의 『나는 이야기입니다』를 소개했다. 자신이 번역한 다수의 작품 중에서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가 쓰고 만화가 초 신타가 그린 『나』, 『너』, 『기분』을 함께 읽는 시간도 마련했다.
“『할머니 주름살이 좋아요』에는 할머니와 손녀가 등장하는데요. 할머니는 자신의 주름살에 모든 기억이 담겨있다고 이야기해요. 그때그때의 추억들이 소중하다고 말하는 작품인 것 같아요. 최근에는 『나는 이야기입니다』라는 그림책을 재밌게 읽었는데, 이야기가 화자로 등장하는 작품이에요. 이야기의 역사, 책의 역사를 생각해볼 수 있어요. 『나』와 『너』는 관계 속에서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기분』은 마음에 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에요.”
강연이 끝난 후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마련됐다. ‘내 인생의 그림책’을 꼽아달라는 요청을 받은 엄혜숙 작가는 『인어공주』부터 『강아지똥』까지, 깊이 각인된 작품들을 떠올렸다.
“저는 그림책을 보고 자란 세대가 아니라서, 내 인생의 책을 말한다면 그림책보다는 동화책이 될 것 같아요. 보고 울었던 책이라면 내 인생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플란다스의 개』나 『인어공주』,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보면서 울었던 것 같아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는 지금도 다시 읽고 싶은 작품 중에 하나예요. 어렸을 때 읽은 이야기 중에서 또 기억에 남는 건 『집 없는 아이』예요. 제가 제일 부러워했던 아이였어요(웃음). 학교도 안 다니고, 매일 동물들하고 여기저기 다니잖아요. 어른이 돼서 보니까 참 어려운 삶인데, 어렸을 때는 단조로운 걸 싫어했기 때문에 굉장히 부러워했어요(웃음). 제가 왜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었는지 생각해 보면,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어른이 된 후에 그림책을 보게 됐다는 작가는 ‘가장 의미 있는 그림책’과 ‘최근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한 그림책’에 대해 덧붙였다.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에서 시작된 이 날의 이야기는 다시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로 돌아와 끝을 맺게 됐다.
“저한테 가장 의미 있는 그림책은 『깃털없는 기러기 보르카』가 아닐까 싶어요. 제가 처음으로 번역했던 책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기도 하고, 그 인연으로 존 버닝햄의 『나의 그림책 이야기』를 번역하게 됐거든요. 좋아하는 그림책이 너무 많아서 내 인생의 그림책으로 한 권만 꼽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현재로서 가장 많은 생각을 했던 작품은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예요. 일로써 번역을 하기는 했지만, 워낙 사노 요코를 좋아해서 에세이를 다 찾아서 읽을 정도거든요. 게다가 주제가 현실의 나를 뛰어넘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서, 많은 걸 생각하게 한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사노 요코 글그림/엄혜숙 역 | 상상스쿨
“나는 할머니인걸!” 이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할머니. 그렇지만 할머니의 99번째 생일날, 고양이가 사 온 양초는 겨우 5개. 5살이 되어 버린 할머니는 다음 날부터 5살답게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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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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