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아로새겨진』, 『별에 어른거리는』, 『태양제도』
다와다 요코 저/정수윤 역 | 은행나무
책에 낙서하기를 즐기는 편이다. 밑줄도 긋고 구석구석 감상도 쓴다. 특히 번역할 때는 작업한 부분에 색연필로 죽죽 밑줄을 친다. 몇 해 전부터 생긴 버릇이다. 작품이 너무 재미있어서 몰입해 읽다가 종종 몇 줄씩 빼먹고 번역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누락 부분을 편집자님이 귀신처럼 잡아주시는데 그런 교정쇄를 볼 때마다 혼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기나긴 장편소설을 한 줄도 빼먹지 않고 번역하기 위해 나는 36색 색연필 한 통을 구매했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 오늘 할 부분에 어울리는 색연필을 고른다.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옮기고 그때그때 원서에 줄을 죽죽 그었다. 『태양제도』 원서를 펼쳐보니 파랑을 썼다. 아무래도 바다를 항해하는 이야기니까. 지금 보니 줄줄이 푸른 물결이 잔잔한 파도 같다.
『태양제도』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Hiruko다. 일본어를 모어로 쓰는 일본인인데 이 책 어디에도 ‘일본’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 중국, 러시아 같은 인근 국가 이름은 나와도 ‘일본’은 없다. 이미 바다에 가라앉아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므로. Hiruko는 스웨덴으로 유학을 왔다가 고향이 물에 잠겨 돌아갈 곳이 없어지자, 노르웨이와 덴마크 등 발트해 주변 북유럽을 전전하며 유랑민으로 살고 있다. 스칸디나비아반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아들을 판스카라는 인공어(人工語)를 직접 만들어 고체 문법이 아닌 액체, 기체 문법이라 할 만한 기묘한 말을 쓴다. Hiruko는 자신의 모어를 쓰는 고향 사람을 간절히 만나고 싶지만, 이미 스시라는 먹거리조차 핀란드 음식 아니냐(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핀란드의 민족정신 sisu와 착각하여)고 묻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가라앉은 나라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중. 이 상실감의 묘사가 너무도 리얼하여 나는 원서 구석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
우리의 세계는 급속도로 쓸쓸하고 어두운 구멍으로 낙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쓸쓸해.
쓸쓸하다.
인간은 모두 이렇게,
쓸쓸한 존재일까.
번역하며,
내내 쓸쓸했다.
주인공들이 쓸쓸했고,
망가져 가는 지구가 쓸쓸했고,
폐기된 로봇이 쓸쓸했고,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 그린란드와 후쿠이가 쓸쓸했다.
원서에 남긴 메모는 “’후쿠’가 행복이란 뜻이고,”에서 뚝 끊겼다. 아마도 너무 쓸쓸해서 갑자기 배가 고파졌나. 일하다 말고 벌떡 일어나 지갑을 들고 근처 시장 생선가게로 물고기를 사러 간 게 이날이었나, 다른 날이었나. 근미래를 다룬 작품 속에서 일본은 무분별한 자연 개발로 산을 마구 밀어버리는 정치인 때문에 열도가 납작해져 바닷속에 잠기고, 대량 어획으로 유명하던 세계의 항구는 환경오염으로 인해 물고기가 잡히지 않게 된다. 나는 음식 중에서 생선을 가장 좋아한다. 이 책을 번역하다가 진짜로 바닷속 물고기들이 사라질까 덜컥 겁이 났고, 그래서 작업하다가 생선가게로 마구 달려갔던 기억이 있다. 후쿠이는 강원도와 마주 보이는 바닷가 마을 지명인데 복 복(福)자에 우물 정(井)자를 쓴다. 일본 열도의 반대편 태평양 쪽에는 우리가 잘 아는 후쿠시마가 있다. 복 복(福)자에 섬 도(島)자를 쓴다. 자연이 아름답고 수산물이 풍부하여 복스러웠던 도시는 원자력 발전소의 붕괴로 세계의 바다를 위협한다.
『태양제도』 원서 첫 페이지에는 이런 메모가 있다.
① 여행자 유랑 이민 집시 유목민
② 국경 없음
③ 신화 고지키 전설 뱀 물 원형
④ 언어 인격 사어 생어. 소속 문화 떠나
⑤ 모든 것이 이어져 있다는 패러다임.
언제 쓴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Hiruko 3부작 마지막 권 번역을 시작하면서 내 마음속에 작품을 한번 정리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나 보다. 1권 『지구에 아로새겨진』을 시작으로 2권 『별에 어른거리는』에 이어 3권 『태양제도』에 이르기까지, 다와다 요코는 쭉 위의 주제를 다루었다. 긴 소설이지만 플롯은 단순하다. 집을 떠나 유랑민과 같은 삶을 사는 여성이 여러 지역에서 새로 만난 낯선 사람들과 여행을 다니는 이야기. 고향을 잃고 유럽 각국을 떠도는 Hiruko는 실은 그리 슬프지 않다. 길에서 우연히 알게 된 친구들과 다양한 주제로 끊임없이 수다를 떨고, 국경을 넘나들고, 여러 지역의 특색 있는 저녁 식사를 함께 먹고, 여행지의 건축물과 사람들과 분위기를 호흡하고 체험한다. 새싹 언어학자 덴마크인 크누트, 남성에서 여성으로 젠더 여행 중인 인도인 아카슈, 박물관에서 일하며 전 세계 환경과 노동 문제에 관심이 많은 독일인 노라, 독학으로 일본어를 공부하며 물고기가 사라져도 맛국물(다시) 내는 기술을 익히고자 하는 꿈이 있는데 내면적 정체성이 모호하여 연인에게 거짓말을 해대고 심술 맞은 의사와 성격 교환을 하는 등 기행을 일삼는 그린란드인 나누크, 그리고 마침내 이 친구들이 모두 합심하여 찾아낸 Hiruko의 동향인 Susanoo(작품 속에서 일본인인 이 두 사람에게만 알파벳 이름이 부여되었고 나머지 이름은 모두 가타가나 표기다). 이들의 국경 없는 여행은 결국 모든 것이 이어져 있다는 패러다임으로 나아간다.
이 메모는 『태양제도』 원서 맨 마지막 장에 있었다. 아마도 역자 후기를 쓰면서 적어 놓은 것 같다.
☆ 전쟁이 死語가 되는 날을 꿈꾸며――
나는 보통 역자 후기를 쓸 때, 제목부터 정한다. 타이틀이 떠올라야 첫 줄을 쓸 수가 있다. 사어(死語)란 더 이상 모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없는 언어 또는 특정 언어 내에서 과거에는 쓰였으나 현재에는 쓰이지 않는 단어를 의미한다. 다와다 요코는 근미래를 다룬 이 3부작에서 외국인, 제3세계, 입국 비자, 간바루(열심히 하다) 같은 단어를 사어의 반열에 올렸다. 모두 경계를 허무는 말들이다. ‘간바루’는 너무 열심히 사는 일본인들에게 그리 열심히 살지 않아도 괜찮다며 그동안 자주 쓰던 ‘간바레(열심히 해)’, ‘간바루’를 쓰지 말자는 실제 사회 분위기가 반영된 경우다. 아무튼 국가 간의 경계, 바리케이드, 차단, 벽 등은 전쟁과 관련이 깊다. 외국인을 ‘외국의 사람’, ‘다른 나라 사람’, ‘나와 다른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저 같은 지구에 사는 같은 인간으로서 동질감과 애틋함을 느끼며 대할 때 세계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리라.
“모국 같은 건 없어도 돼. 다 같이 여행할 수만 있다면.” (172쪽)
메모에는 172쪽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건 교정쇄였는지 최종본에는 173쪽으로 인쇄되어 있다. 『태양제도』에서 성격이 조금 비뚤어진 나누크가 Hiruko는 요즘 이런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며 혼자 투덜거리는 대목이다. 지금 우리 지구상에도 일어나는 일이다. 각기 다른 생각과 사상을 가지고 조금씩 흔들리며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동시에 『파도의 아이들』(돌베개, 2024)이라는 장편소설을 퇴고하고 있었다. 38선 너머 이북의 아이들이 먼 곳에 출렁이는 자유의 바다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다. 지구상의 바다는 모두 이어져 있다. 싸움이나 전쟁이나 원한이나 그런 것들이 인류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인류가 탄 배는 가라앉을 듯 가라앉지 않고 기우뚱기우뚱 노 저어 간다. 모든 것은, 이어져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 또 쓴다는 건 이를 깨달아 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부록 사진
내가 쓰던 원서와 역서다. 앞의 두 권은 문고본이 나온 뒤라 대역 판본으로 문고본을 썼고 『태양제도』는 아직 문고본이 나오기 전이라 단행본을 썼다. 일본 출판계는 통상 신간이 나오고 2, 3년쯤 지나면 1/3 가격의 보급판 문고본이 나온다. 문고본이 나온다는 건 판매 부수가 보장될 만큼 독자가 있다는 뜻으로 작가로서는 상당한 영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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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윤
일본문학 번역가. 작가. 역서로 <만년>, <인간 실격>, <봄과 아수라>, <소년>, <금색>, <지구에 아로새겨진>, <태양제도> 등. 저서로 <파도의 아이들>, <한 줄 시 읽는 법>, <날마다 고독한 날> 등이 있으며,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조선일보), <언어와 언어의 숨바꼭질>(이와나미 잡지 세카이)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