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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사전, 시민들의 사전

영화 <행복한 사전> 편지 말고 말로 듣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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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대통령이 ‘박근혜 사전’ ‘최순실 사전’ ‘박정희 사전’으로 이 사태를 회피하려 한다면 결국 파국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전은 말한다. ‘파국(破局): 일이나 사태가 결딴이 남. 또는 그런 판국’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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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물을 가리키는 가장 적절한 말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주장한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이다. 글을 쓰는 괴로움은 대부분 단어를 찾아내는 일에서 온다. ‘이 단어가 아닌데…’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그래! 이 단어야’ 하고 유레카를 외치기도 한다. 대개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 말이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아 절망감에 허덕인다. 늘 마감시간에 쫒기는 신문기자 입장에선 차선(次善)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차악(次惡)에도 만족해야 한다. 

 

하지만 또 하나 부인할 수 없는 건 특정한 단어를 받아들이는 느낌이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런 뜻으로 썼는데 읽는 사람은 저런 뜻으로 받아들인다. 살아온 과거가 다르고, 살고 있는 현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럴 땐 사람과 사람 사이가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가 없다. 하기야 사람들 생각이나 느낌이 똑같다면 그것처럼 재미없는 세상도 없을 테지만. 

 

영화 <행복한 사전>의 무대는 출판사 사전편집부다. 소심하고 순진한 성격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청년 마지메(마츠다 류헤이)가 사전편집부에 합류하면서 ‘대도해’ 프로젝트에 시동이 걸린다. 대도해(大渡海)는 과연 무엇일까. “누군가와 이어지고 싶어서 거대한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사전”이다. (영화의 원 제목인 ‘배를 엮다(舟を編む)’도 여기에서 나온다.) 편집주간 마츠모토(카토 고)는 이렇게 말한다.  

 

“단어의 의미를 알고 싶다는 건 누군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타인과 이어지고 싶다는 소망이 아닐까요.”

 

마지메는 단어를 채집하고 그 뜻을 풀어내는 작업에 삶을 걸기 시작한다. 일물일어처럼 사람에게는 그 사람에게 꼭 맞는 단 하나의 일이 있는 것일까. 마지메가 찾지 못했던 그의 천직은 사전 편집이었다. 얼마 후 하숙집 할머니의 손녀이자 요리사인 카구야(미야자키 아오이)에게 첫 눈에 반해버린 마지메를 향해 마츠모토가 말한다.

 

“사랑에 대한 해설은 마지메가 쓰시오. 분명 생생한 해설이 나올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그 사랑을 꼭 진전시킵니다.”

 

마지메는 카구야에게 어설프지만 진심을 다해 다가선다. 그가 그녀에게 주려고 붓으로, 어려운 단어들로 쓴 러브레터는 읽을 수가 없다. 하지만 동료 니시오카(오다기리 죠)는 용기를 내라고 한다.

 

“그대로 전해줘. 너에게 관심이 있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읽을 거고 만약 읽으면 가망이 없다는 거잖아.”

 

 마지메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니시오카가 다시 말한다.

 

“괜찮아. 너의 진심은 전해질 거야.”

 

진심은 전해진다. 러브레터를 받은 다음 날 카구야는 “내가 그런 편지를 읽을 수 있는 사람 같아? 아니잖아. 선생님께 읽어달라고 하면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알아?”라고 물은 뒤 말한다.

 

 “편지 말고 말로 듣고 싶어.”

 

그녀 앞에 무릎을 꿇은 마지메는 수줍지만 간절하게 말한다.

 

“좋아합니다.”

 

말로도 전하기 힘든 마음을 글로 표현하기는 몇 십 배, 몇 백 배 힘들다. 하지만 진심이 있다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중요한 건 일물일어가 아니다. 단 하나의 그 마음을 전하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애면글면하는 진심이다. 내 가슴이 울릴 때만 상대방의 가슴도 울릴 수 있다. 이제 마지메는 ‘사랑’을 해설할 수 있다. 

 

‘사랑: 어느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서 자나 깨나 그 사람이 머리에서 안 떠나고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몸부림치고 싶은 마음 상태. 성취하면, 하늘이라도 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우리 사회의 소통이 단절되는 이유가 삶과 삶이 분리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의 삶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말이 늘 겉돌았던 것도 그가 시민들과 유리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청와대에서 성장기를 보낸 뒤 퍼스트레이디로, 성에 유폐된 공주로 살아왔다. 시장에서, 거리에서, 골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떻게 말하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들의 기분과 감정과 생각을 알 수 있겠는가. 자신이 체험한 만큼, 정확하게는 자신이 체험할 수 있는 만큼 말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저로써는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자고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박 대통령은 측근 최순실 씨에게 대통령 연설문 등을 맡긴 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그 말에 절반의 진실은 있다고 본다. 대통령은 연설문이나 말씀자료에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보통 시민들의 삶을 겪어보지 못한 그로서는 자신이 하는 말이 제대로 전달될지 도무지 확신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비극은 대통령이 사용하는 사전과 시민들이 사용하는 사전이 완전히 다른 데서 시작됐다. 가령, 박 대통령에게 민주주의의 뜻을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시민들이 바라는 민주주의가 ‘대통령이 시민들을 주권자로 받들며 함께 생각과 희망을 나누는 것’이라면, 대통령이 생각한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을 위해 대통령이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아니었을까.

 

요즘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농단(壟斷)’ ‘탄핵(彈劾)’ ‘하야(下野)’ 같은 단어들이 넘실거리고 있다. 지금 시민들이 대통령에게서 듣고 싶은 건 멋있는 말, 화려한 말, 있어 보이는 말이 아니다. 오로지 진실, 진심을 다한 진실이다. 만약 대통령이 ‘박근혜 사전’ ‘최순실 사전’ ‘박정희 사전’으로 이 사태를 회피하려 한다면 결국 파국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전은 말한다. ‘파국(破局): 일이나 사태가 결딴이 남. 또는 그런 판국’이라고.


 

 

배를 엮다미우라 시온 저/권남희 역 | 은행나무
『배를 엮다』는 사전 「대도해」편찬을 준비하고 있는 대형 출판사 겐부쇼보의 사전편집부에 언어적 센스를 가진 마지메가 오면서 시작된다. '사전 편집 이야기'라니, 언뜻 지루할 것 같지만 작가는 그 과정을 다양한 아날로그적 가치의 소중함을 리얼한 에피소드와 섬세한 감정 묘사로 녹여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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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권석천(중앙일보 논설위원)

1990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2007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법조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앞에 놓인 길을 쉬지 않고 걷다 보니 25년을 기자로 살았다. 2015년에 <정의를 부탁해>를 출간했다. 이번 생에는 글 쓰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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