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최민석의 절도일기(竊圖日記)
6화 - 금주를 하고 얻은 겸손
스티븐 킹의 소설
작가는 열심히 쓴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통하지 않는다는 건 어쩔 수 없다. 작가가 대충 썼는데, 세상이 좋아해준다는 것은 부끄럽지만 고마워해야할 일이다. 그러므로, 이러나 저러나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겸손. 그것이 이 업계에 통용될 수 있는 유일한 미덕이다.
4.13.
술을 끊겠다고 선언을 해놓고 보니, 연재중인 소설의 소재가 맥주라는 게 떠올랐다. 하지만 작가는 말로 한 약속은 금세 바꾸더라도, 글로 한 약속은 지켜야 하므로 맥주를 마시지 않은 채 맥주 소설을 쓰기로 했다.
비유하자면, 연재중인 소설 『황금파도』는 독거노인이 쓴 연애소설이자, 투표권이 없는 작가의 정치소설이자, 거세당한 작가의 성애소설이다. 사족인줄 알지만, 마지막 비유는 정말 비유일 뿐이다. 어쩐지 사족을 붙이고 나니 더 의심을 살 것 같지만, 그래도 사족을 붙이는 게 나을 것 같다. 일기에 이상한 문장이 계속 쌓이고 있다.
이번 소설은 맥주를 마시지 않고 쓰는 맥주 소설이니까, 일종의 ‘환타지 소설이다. 상상의 결과물이므로, 어찌보면 진정한 소설이다.
진정한 소설가가 되기 위한 노력, 즉, 글을 몇시간 쓰고, 달리기를 하고, 취재를 하고, 보좌관 출신 취재원에게 자문을 구하고, 썼던 모든 글을 지워버렸다. 젠장.
8km를 달렸다.
4.15.
여전히 술을 마시지 않았다.
5km를 달렸다.
4. 17.
스티븐 킹의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을 읽었다.
예전부터 스티븐 킹의 소설은 한 번쯤 읽어봐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요일인지라 소설을 쓰기 싫어 쓰던 원고를 던져놓고, 작업하고 있던 커피숍 사장에게 스티븐 킹의 소설 중 가장 흡입력이 강한 게 뭐냐?’고 물었다.
스티븐 킹의 애독자인 그는 잠시 안경을 고쳐쓰더니 며칠 전에 읽은 쇼생크 탈출이 읽을만합니다,”라며 추천해줬다. 그러며, 혹시 괜찮으시다면 『미저리』도 추천한다고 했는데, 내가 소설가이기 때문에 감금당할 걸 상상하며 읽으면 좀 더 실감나게 몰입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 참고로 주인공이 발목을 잘리니, 발목이 아프면 읽지 말라는 조언도 곁들였다. 안 그래도 예전에 스토킹을 당한 경험이 있어서, 나는 『미저리』는 제쳐두고 『쇼생크탈출』을 읽었다.
어째서 스티븐 킹이 전 세계에서 소설을 그토록 많이도 팔아치웠는데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소설은 첫장부터 내 눈길을 강력접착제를 붙여놓은 것처럼 붙잡아버렸다. 대중소설답게 이야기의 전개가 시원시원했으며, 대중소설이면서도 문장이 기품있고 깔끔했다. 나는 순문학으로 데뷔를 하긴 했으나, 과거 따위는 모두 집어치워버리고 앞으로 스티븐 킹 같은 대중소설가의 길을 걷기로 했다. 말하자면, 그의 향로를 절도하기로 한 것이다. 그나저나 이것 역시 절도가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 소설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의 장점이라면 손가락이 근질근질할 정도로 글을 쓰고 싶게 만든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조금 읽다가 못 견디게 글이 쓰고 싶어져, 일단 절도일기에 짧은 소감을 남기고 있는 중이다. 뭐랄까, 소년이 포르노를 보고 참을 수 없는 욕정에 휩싸여 화장실로 달려가는 듯한, 뭐 그런 기분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장점이자 단점은 뭘 하고있든지 간에 다시 소설을 읽게 싶게 만든다는 점이다(고로 일상을 영위하기 어렵다). 그러니, 글을 쓰면서도 ‘아! 어떻게 전개한 것이지?’라는 궁금증이 일어 다시 소설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고로, 오늘은 그만 쓰고 소파에 드러누워 온종일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을 예정이다.
술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오늘은 달리지 않고, 소설을 읽을 것이다.
4. 18.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을 모두 읽었다. 167쪽에 달하는 이 중편 소설의 매력은 일단, 분위기가 좋다는 것이다. 아울러, 하나의 큰 전체적인 이야기가 여러 가지 세부적인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전체적인 이야기는 주인공 앤디가 탈옥을 하는 것이지만, 앤디가 감옥에 갇히게 된 사정은 하나의 세부적인 이야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세부적인 이야기 또한 독립적인 완결성을 지니고 있다. 하여, 연속적인 여러 이야기들을 차례로 접하다 보면, 세트 요리를 먹는 느낌이 든다. 식당에 가면, 초밥을 먹어도 되고, 돈가스를 먹어도 되고, 우동을 먹어도 된다. 하지만 이 셋이 모두 나오는 세트를 먹어도 된다(이럴 경우 대개 초밥이 메인이다. 즉, 이 소설에서는 탈옥 스토리가 바로 초밥에 해당된다). 그것은 철저히 개인의 기호다. 말하자면, 스티븐 킹이라는 이 요리사는 이야기를 재료로 조화를 이룰법한 여러 가지 음식을 한 꺼번에 내놓는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물론, 그의 요리를 집어 먹을까 말 것인가 하는 것 역시 개인의 기호일 뿐이다. 나는 게걸스레 먹어치웠다.
그리고 또 하나.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영화에서는 ‘모건 프리먼’이 한 역할)의 매력이 깊다. 다시 소설을 요리에 비유하자면, 화자는 음식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요컨대, 서빙을 하는 사람이 반가운 미소를 띠는 건 좋지만, 박장대소하며 시시콜콜한 것까지 캐물으면 곤란하다. 식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알맞은 때에 다음 음식을 가져다주며 궁금한 것에 대해서만 답해주면 최고다.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의 탈출』에서 화자를 맡은 ‘레드’가 그러했다. 전통있고 세련된 호텔의 능숙한 웨이터 같은 느낌이다.
발목은 아프지만, 스티븐 킹의 『미저리』도 읽기로 했다.
여전히 술은 마시지 않았고, 6km를 달렸다.
4. 23.
연재 소설을 마감하고 『미저리』를 읽기 시작했다. 토요일 오후 내내 읽었으나, 특별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있다. 100쪽을 넘게 읽었는데, 주인공이자 작가인 폴이 (후에 스토커의 상징이 된) 애니에게 감금당한 걸 빼고는 아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있다.
달리기를 포기하고 온 종일 읽었다.
4.24.
『미저리』를 이틀간 읽다가 그러니까 정확히 222쪽까지 읽고 난 후 완독을 포기했다(이 소설은 총 561쪽이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온전히 『미저리』에 갖다바쳤지만, 주인공이 여전히 갇힌 채로 팔을 조금 움직였다가, 다리를 조금 움직이고 있다. 토요일에는 팔을, 일요일에는 다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와 새벽까지, 주인공이 야심차게 한 짓이라고는 고작 ‘노브릴이라 불리는 가상의 각성제만 잔뜩 처먹은 것 뿐이다. 게걸스레 처먹었다. 이러다 주인공 폴이 아니라, 내가 환각에 빠질 지경이다.
하여, 나는 고민에 빠졌다. 스티븐 킹에게 세계적 명성과 막대한 부를 가져다 준 이 소설의 매력은 반드시 존재한다. 실제로 이용자가 가장 많은 포털 사이트에는 『미저리』에 별 10점을 준 포스팅이 상당했다. 분명히 영화 <미저리>가 아니라, 소설 『미저리』에 준 별이었다. 물론, 재미있게 읽은 사람만 포스팅을 하고, 지루하게 읽은 사람은 모두 침묵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쳐도 중요한 건 재미있게 읽은 사람이 맑은 밤 하늘의 별처럼 무수하다는 것이다. 전 세계에 걸쳐서, 30년 간 말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과연 이런 사람은 지구상에 나 하나뿐인가. 이런 사람이 나 하나 뿐일지라도 그건 상관없다. 하지만, 그 하나뿐인 사람의 직업이 소설가일 때는 상관이 있다. 도대체, 독자들이 흠뻑 빠져버린 매력을 소설가인 나는 왜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불감증인가?
사실, 이 고민을 지난 몇 년 간 계속 해왔다. 직업윤리상 밝히기 어려운 초대형 베스트셀러 한국소설을 보며 나는 도무지 지루해 읽을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나의 정서가 B급 취향이라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나도 ‘기욤 뮈소나 더글라스 케네디’ 같은 얄팍한 작가들의 책도 좋아하고,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의 책도 곧 잘 읽는다. 세속적 성공을 거둔 작품들은 어떤 면에서는 내 취향과 굉장히 잘 맞아떨어지면서도, 대부분의 면에서는 내 취향과 굉장히 어긋난다.
아울러, 내 소설 역시 공들여 쓰며 스스로 만족한 작품은 철저히 외면을 받았지만, 스스로 만족하지 못해 부끄러워한 작품은 가장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즉, 열심히 썼는데 안 되고, 대충 썼는데 돼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럼 대충 쓰면 되겠네! 야호’ 라는 간단한 등식을 성립케 하는 건 아니다(그렇다면 정말 좋겠죠?). 막상 그렇게 생각하고 대충 쓰니, 더 안 돼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주에 내가 얻은 것은 겸손해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이다.
작가는 열심히 쓴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통하지 않는다는 건 어쩔 수 없다. 작가가 대충 썼는데, 세상이 좋아해준다는 것은 부끄럽지만 고마워해야할 일이다. 그러므로, 이러나 저러나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겸손. 그것이 이 업계에 통용될 수 있는 유일한 미덕이다.
6km를 달렸다. 술은 여전히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예약 주문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왔다.
이번에는 실수 없이 예스24에서 주문했다. 참고로, 총알 배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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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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