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꽃피운 예술가, 사임당
『사임당을 그리다』 정항교 교수
국내 최고의 사임당, 율곡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정항교 교수가 사임당의 일생과 예술을 풀어 쓴 책이다. 여자로서 제한적인 삶을 강요받았던 조선 시대에 자신만의 시선으로 섬세한 예술 세계를 만들어낸 사임당은 모두가 자유를 꿈꾸는 현 시대의 진정한 롤모델이 될 것이다.
최근 SBS에서 <사임당, the Herstory>라는 이름으로 드라마 제작이 결정되면서 5만원 권의 주인공 사임당이 한층 더 관심을 받고 있다. 때를 맞춰 사임당의 일생과 예술을 풀어 쓴 책 『사임당을 그리다』 가 나왔다. 여자로서 제한적인 삶을 강요받았던 조선 시대에 자신만의 시선으로 섬세한 예술 세계를 만들어낸 사임당은 모두가 자유를 꿈꾸는 현 시대에 롤모델이 될 만하다.
저자는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문화재청 강원도고문서감정위원, 오죽헌시립박물관장 등을 지냈다. 『겨레의 어머니 겨레의 스승』 등을 쓴 사임당과 율곡 전문가다. 현재 장강대에서 국어국문학 초빙교수로 지내고 있다.
정항교 교수님은 사임당과 율곡의 최고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데요. 어떻게 두 위인에 대한 인연이 시작됐나요? 지금까지 어떤 연구를 해오셨는지도 궁금합니다.
1987년 동국대 교육대학원에서 「율곡 이이의 시문학」 연구를 마쳤을 때, 오죽헌 경내에 시립향토박물관이 새로이 문을 열었습니다. 학예연구실장이라는 직함으로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율곡의 시문학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하게 되었고, 덤으로 사임당까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두 분과의 인연이야 20여 년이 넘지만 최고의 전문가라고 하기는 힘듭니다. 『율곡의 시문학』을 출판했고 학위도 받았지만, 사임당에 대해서는 아직 두 수의 한시 연구로 그녀를 여류시인으로서 자리매김하게 하는 역할밖에 한 것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율곡과 사임당에 대한 전문가는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율곡의 전문가는 『율곡전서』를 섭렵할 뿐 아니라 율곡의 문(文)사(史)철(哲)을 두루 꿰뚫어야 하고, 사임당 전문가 또한 그녀가 남긴 시?서?화?자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천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사임당의 예술 세계에 대해서 특히 중점적으로 다뤘는데요. 그녀의 예술 세계를 정의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특별히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있나요?
사임당의 예술작품은 하나같이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합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예술인이라는 칭호가 그래서 걸맞겠죠. 그림을 그리되 붓만 놀린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철학을 담았고, 시를 짓되 경치를 읊으며 속 깊은 자신의 상념을 담았습니다. 또 글씨를 쓰되 고법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서풍을 개창해 17세기 초서 명필들의 글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마디로 사임당의 시서화는 하나같이 옛것을 참고하되 답습하지 않았으며,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대부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영역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소세양의 시로만 짐작이 가는 〈박락된 산수화〉가 제일 그립고 아쉽습니다. 일곱 살 때부터 안견의 그림을 바탕으로 개척한 사임당 자신만의 화풍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비록 희미한 흔적만이 남아 있지만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임당, 〈박락된 산수화〉 2폭, 오죽헌시립박물관
또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두 수의 시는 사임당의 존재 가치를 재확인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중국 성당 문호들의 시를 품평한 율곡이지만 어머니의 시만은 품평하지 못했습니다. 천도의 운행이 거짓과 꾸밈이 없듯이 인간 마음 본연의 순수한 울림을 문자로 표현했기에, ‘구난설 필난기(口難說 筆難記)’ 즉 ’입으로 말하기 어렵고, 붓으로 쓰기 어려운’ 경지의 글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임당은 ‘현모양처의 대명사’이지만 책을 읽어보면 결혼하고도 친정인 강릉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등 의외의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이렇듯 당시 일반적인 여성들과 다른 모습은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요? 또 조선이라는 시대상황이 그녀의 예술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사임당을 그리다』를 읽은 사람은 더 이상 사임당을 현모양처의 대명사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임당의 진솔한 참모습이 고스란히 책 속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사임당이 출가 후에도 친정에 머문 이유는 먼저 시집가던 해인 19세 때, 친정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32세 때는 셋째 아들 율곡을 가진 후 출산을 위해 친정어머니의 보살핌을 받고자 내려왔던 것인데 그 길로 6년을 더 머물렀습니다. 친정에 머문 6년 동안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그 기간 동안 시댁을 왕래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사임당 어머니 용인이씨도 서울로 시집은 갔으나 외동딸이었기 때문에 남편과 상의한 끝에 16년간 친정어머니를 모셨습니다. 조선사대부 집안에서 이 같은 사례가 빈번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이것이 사회제도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관습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고 보입니다.
어쩌면 사임당이 예술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도 타고난 재능을 갈고 닦기에 시댁보다는 친정이 훨씬 자유로웠기 때문이 아닐까요?
올해 하반기, 드라마 <사임당 Herstory>에 역사 자문을 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히 강조하신 것은 무엇인가요? 또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없나요?
저는 사임당이 살던 당시의 시대상, 오죽헌에서의 생활, 전하는 주옥같은 작품, 아들 율곡의 인품, 율곡의 어린 시절, 제사상에 올랐을 법한 제수, 강릉의 대표 먹거리 등등을 소개했습니다.
처음 제작진 일행이 오죽헌에 왔을 때는 드라마 촬영 때문인 줄 모르고, 그저 찾아온 손님이니 오죽헌 구석구석을 안내해줬습니다. 너무나 진지하게 듣고 질문도 하는 탓에 저도 사임당과 율곡의 일화까지 곁들여 가며 더 재미있게 설명했지요. 특히 사임당 남편의 주막집 색시와의 일화나 그토록 근엄하게만 여겨졌던 율곡의 연애 이야기에서 한바탕 웃음이 터졌습니다.
〈사임당, the Herstory〉의 극본을 맡은 박은령 작가는 당시 “누가 알아? 사막에서 금이라도 캐낼지…”라고 했는데, 이제는 정말 금을 주워 담을 일만 남았습니다. 미리 축하드리며 방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임당과 율곡은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그녀의 다른 자식인 옥산 이우나 이매창의 예술 세계를 언급한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그들에 대해 좀 더 말해주신다면?
어머니 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명성에 가려져서 그렇지, 사실 사임당의 자녀 가운데 큰 딸 매창은 어머니의 자질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작은 사임당’이라 불릴 만큼 학문과 예술에 뛰어났습니다. 특히 동생 율곡이 병조판서로 있을 때, 변방의 수호를 위해 누님 매창에게 자문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녀의 〈월매도〉는 조선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전형적인 묵매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계수묵화조도〉는 조선시대 ‘영모화조도’의 3절로 불리는 김시, 김식, 조속의 작품보다 오히려 한 수 위라고 찬사를 받기도 합니다.
막내 옥산 이우는 율곡 형님이 중매를 설 정도로 가깝게 지냈습니다. 과거시험을 봐서 먼 임지로 발령 나자, 형님과 떨어져 지내기가 싫다고 부임하지 않은 적도 있을 정도입니다.
특히 옥산은 어머니의 시?서?화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며, 거문고의 경지에까지 올라 4절이라 불렸습니다. 포도 그림은 어머니를 본받았고, 글씨는 어려서는 어머니 서풍을, 그 후에는 조선을 통틀어 초서의 대가로 불리던 고산 황기로의 서풍을 구사하였다. 황기로는 그의 장인이기도 하죠.
『옥산집』에는 참깨에다 거북구(龜)자를 썼고, 팥을 쪼개 한쪽 면에다 각 열자씩 오언시를 썼는데도 획이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율곡은 “내 아우가 학문에 정진했더라면 내가 미칠 바가 아니라”고도 했습니다.
5만 원권의 화폐 속 인물로 사임당이 선정되는 데도 많은 노력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임당을 화폐 속 인물로 지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토록 훌륭한 분이 지금까지 다만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세월의 뒤안길에 묻혀 있어야만 했던 지난날이 원망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사임당과 율곡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틈틈이 시를 연구하다 제 전공도 아닌 서화에까지 발을 담그자 차츰 사임당의 참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고매한 인품과 학문을 겸비한 사임당은 타고난 자질을 갈고 닦으며,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개척한 결과 여류문인이자 화가, 서예가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시?서?화를 꽃피워냈습니다.
무엇보다 사임당은 봉건시대를 살았지만 여성에게 강요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삶을 살면서 자아를 실현한, 강인한 여성이라는 점에서 그녀를 화폐인물로 적극 지지하게 됐죠.
사임당에게 현대의 사람들이 배울 점이 있다면?
현대인들이 사임당에게 배워야 할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임당의 일생을 면면이 들여다본 박은령 작가도 “사임당은 자녀를 위해 무조건 희생한 것이 아니라 자녀들과 정서적, 학문적 교감을 통해 인생의 스승이자 친구로서 서로를 거울삼아 성장했다”고 했습니다. 또 어느 분은 “어느 시대이건 당시 상황에 불만을 갖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수 없으나 중요한 것은 이를 불평만 할 것인지 현실을 수긍하여 받아들일 것인지다. 사임당은 현실을 수긍하여 받아들이고 극복하여 개인의 발전을 이루고 나아가서는 사회를 변화시켰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닐까요?
사임당을 그리다정항교 저 | 생각정거장
이 책은 국내 최고의 사임당, 율곡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정항교 박사(전 오죽헌시립박물관장)가 사임당의 일생과 예술을 풀어 쓴 책이다. 여자로서 제한적인 삶을 강요받았던 조선 시대에 자신만의 시선으로 섬세한 예술 세계를 만들어낸 사임당! 그녀는 모두가 자유를 꿈꾸는 현 시대의 진정한 롤모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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