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단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채워지고, 감각되고, 존재를 증명하는 무대다. 인간이 서 있는 자리, 몸이 머무는 형상, 그 자리에 비추는 빛과 그림자, 그리고 그 빈자리까지. 이러한 물음은 조각가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의 오랜 탐구 대상이며, 그 탐색의 정수가 이번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에서 열리는 《DRAWING ON SPACE: 안토니 곰리》 전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안토니 곰리는 공간을 조각한다고들 한다. 더욱 정확히 말하면, 그는 공간을 몸의 외연을 통해 그려낸다. 그가 만드는 형상들은 하나의 사람처럼 보이지만, 곧 그 사람을 둘러싼 공기, 시선, 움직임, 체온, 침묵 같은 것들로 환원된다. 2025년 6월 20일부터 11월 30일까지 뮤지엄 산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그의 국내 최대 규모 개인전으로, 조각, 드로잉, 판화, 설치 작업을 모두 합쳐 총 48점을 통해 그의 예술 세계를 조망하는 자리이다.
사진 출처 : 뮤지엄 산
주요 작품으로 살펴보는 안토니 곰리의 예술세계
1950년생인 안토니 곰리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고고학·인류학·미술사를 전공한 뒤, 1971년부터 3년간 인도와 스리랑카로 떠나 불교 명상 수행에 몰두했다. 이 동양 수행 경험은 이후 작품 전반에 서정적인 사유의 깊이를 불어넣는다. 물질과 존재의 관계를 탐색하며, ‘몸’을 단순한 외피가 아닌 내면의 우주이자 사유의 장(field)으로 설정한다. 1970년대 말, 그는 자신의 신체를 본떠 만든 납 주물(body‑case) 시리즈를 발표했다. 이 초기작들은 플라스터와 납을 통한 몸의 정지 묘사를 시도하며, 압도적인 물리적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외부에 고정했다.
Seam, 1988, lead, fibreglass, plaster and air, 50 × 197 × 43 cm. 사진 출처 : 안토니 곰리 홈페이지
예를 들어, 'Seam'(1988)과 같은 작품들은 수직으로 세워진 남성 형상을 통해 ‘영웅적 조각’과는 다른, 취약성과 존재의 실재를 강조했다. 1981년 화이트채플 갤러리 개인전과 1982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출품을 시작으로, 곰리는 1980년대 전후하여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91년부터 그는 손바닥 크기의 테라코타 인형 수만 점을 배열한 ‘Field’ 시리즈를 발표했다. 이 설치들은 개별 인형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군중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몸의 개별성과 집합의 시각화’를 동시에 이루어낸다. 가장 상징적인 작품인 《Field for the British Isles》(1993)는 40,000점이 넘는 인형으로 구성되었으며 ‘Field’ 시리즈는 미국, 유럽, 아시아로 전파되며 《European Field》(1993) 등으로 확장됐다. 이 작품으로 그는 1994년 터너 프라이즈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곰리는 인간 형상이 ‘흔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존재’로 새롭게 읽혀야 한다는 예술적 방향을 본격적으로 제시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곰리의 세계
전통 조각을 현대조각의 사유로 해석해 냈다는 측면에서 안토니 곰리의 조각의 과거와 현재의 연결자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이 작가가 놀라운 점은 미래를 아우르는 창의적인 행보를 이어간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면 1994년 이후의 활동은 그야말로 컨템포러리와 공공미술, 지역과 관객의 참여까지 묶어내는 합일의 성과를 이뤄낸다.
Angel Of The North, 1998, steel, 20 × 54 × 2.20 m. 사진 출처 : 안토니 곰리 홈페이지
1994년 터너상 수상 이후 Angel of the North(1998), Blind Light(2007), One & Other(2009)와 같은 작업으로 자연스레 이어지게 된다. 1998년 발표한 <Angel of the North>는 북동 잉글랜드 게이츠헤드의 쇠퇴한 탄광과 철강 산업의 역사 위에 우뚝 선 거대한 철제 천사다. 작가는 자신의 신체를 본떠 만든 이 작품을 통해, 산업의 ‘기계적 힘’과 인간의 ‘정서적 희망’이라는 이중 구조를 공간 안에 불러들인다. 20m 높이, 54m 폭의 스케일은 극적인 시각 효과를 자아내지만, 동시에 거대한 조각이 내포하는 ‘권위’와 ‘풍경의 점령’이라는 정치적 읽기를 피할 수 없게 만든다.
곰리가 이 조각을 통해 지역 주민의 일체감과 자존감을 회복하는 도시 재생을 일궈내는 교두보로 삼았다는 점은, 예술이 얼마나 현실 구조와 얽혀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게이츠헤드가 문화 예술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도시 이미지를 갖게 되는 성공적인 사례로 자리매김하였다.
2007년 헤이워드 갤러리에 설치된 <Blind Light>는 유리 상자 안에 가득 찬 안개로 관객의 시야를 단절시킨다. 곰리는 이 작품을 통해 ‘감각의 전복’을 꾀하는데, 시각이 아니라 촉각·공간 감각으로 인식 지평을 넓히게 만든다. 작품 안에서는 서로 맞부딪히고 흐릿해지는 몸들이 만나고 헤어지며, ‘군중 속 고립된 개인’이라는 중층적 감각을 형성한다. 비평가들은 이러한 몰입이 일종의 ‘명상적 초월’로 이끄는 동시에, 오히려 감정적 여운이 금세 사라진다는 회의적 시선을 동시에 제시한다. 이 전시는 약 3개월간의 전시 기간 동안 2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는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얻으며 안토니 곰리라는 이름을 대중적인 예술가로서 각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Blind Light, Hayward Gallery, 2007, fluorescent light, water, ultrasonic humidifiers, toughened low iron glass, aluminium, 3200 × 9785 × 8565mm. 사진 출처 : 안토니 곰리 홈페이지
시민 2,400명과 함께한 역대급 안토니 곰리의 작업
대중적 주목도를 활용한 대표적인 작업으로 2009년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네 번째 받침대를 다룬 <One & Other>는 무려 100일 동안 2,400명의 평범한 시민이 각각 한 시간씩 올라가 ‘살아 있는 조각’이 되는 퍼포먼스였다. 곰리는 이를 ‘시민 하나하나의 존재’를 시간의 조각으로 기록하는 실험이라 설명하지만, 비평가들은 ‘실제 현장의 시각 경험’과 ‘웹캠 상의 이미지 경험’ 사이의 괴리가 크다고 지적한다. 웹캠 화면에서는 누구나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실제 공간에서 받침대 위 인물은 작게 보이고 고립되어 있다. 이는 곰리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현대인의 소외와 허영”을 전시하는 거울로 기능하기도 한다. 또한, 이 프로젝트는 수많은 ‘낯선 존재’들이 서로 교차하고 충돌하는 장으로서, 단일한 메시지보다는 “무질서로 이루어진 국민 초상”이라는 반이상주의적 풍경을 드러냈다.
One & Other, Fourth Plinth Commission, Trafalgar Square, London, England, 2009. One & Other, 2009. 사진 출처 : 안토니 곰리 홈페이지
안토니 곰리에게 더 이상 전시는 갤러리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길에서, 건물 옥상에서, 들판에서, 바다에서, 고향의 언덕 위를 지나 궁정의 네 번째 기단을 통해 우리의 관계 사이사이에 존재한다.
지금 뮤지엄 산으로 향해야 하는 이유
2025년 한국의 전시가 열리는 뮤지엄 산은 장소 그 자체가 곰리의 예술과 깊이 상응하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이 미술관은 자연과 건축, 인간과 예술 사이의 경계선을 섬세하게 지워내며, ‘존재한다는 감각’을 극대화하는 무대를 제공한다. 곰리의 작업이 제시하는 물리적 명상, 혹은 조각의 침묵 속에서 관람자는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를 투명하게 감지하게 된다. 전시는 네 개의 주요 섹션으로 나뉘어, 곰리의 시선이 조각에서 드로잉, 그리고 공간 전체로 확장되는 흐름을 따라간다.
출처 : 뮤지엄 산
첫 번째 섹션 〈Liminal Field〉는 곰리 조각의 핵심어인 ‘경계’와 ‘존재’를 물리적으로 구현한 공간이다. 여기에서 7점의 인체 형상은 그 자체로 구체적인 인물도, 특정한 감정도 아닌, 단지 ‘존재하는 몸’으로 제시된다. 기포처럼 가볍고 유동적인 조각들은 해부학적 묘사를 회피하며 관람자의 감각을 열어놓는다. 관람자는 이 공간을 통과하면서 ‘누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출처 : 뮤지엄 산
두 번째 섹션은 곰리의 드로잉과 판화로 구성된다. ‘Body and Soul’, ‘Lux’ 시리즈를 포함한 40여 점의 작품들은 그의 사유가 조각 이전의 단계에서 얼마나 섬세하게 축적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드로잉들은 단지 밑그림이 아니라, 곰리에게 있어 몸이 되기 이전의 사유이며, 그림자 이전의 빛이다. 선과 여백, 어둠과 밝음 사이에 놓인 긴장감은 그의 조각에 흐르는 시적인 질서를 드러낸다.
출처 : 뮤지엄 산
세 번째는 〈Orbit Field II〉라는 대형 설치로, 이 전시의 운동성을 강조하는 섹션이다. 스틸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원형 구조물은 마치 전자의 스핀이나 우주의 궤도를 연상시키며, 관람자의 움직임과 함께 구조적 조화를 완성한다. 관람자는 고정된 조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서고, 자신의 동선으로 작품을 ‘완성’해 나가게 된다. 이는 곰리가 추구하는 ‘조각과 공간의 공진화’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출처 : 뮤지엄 산
그리고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섹션 〈GROUND〉는 조각과 건축, 자연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새로운 유형의 예술 공간이다. 안토니 곰리와 안도 다다오가 협업하여 탄생한 이 돔형 구조물은 그 자체가 하나의 조각적 경험이다. 지름 25m, 높이 7.2m, 천창 2.4m의 규모 안에 배치된 ‘Block Works’ 시리즈는 단단하지만 무겁지 않고, 고요하지만 무기력하지 않다. 공간을 채우는 것은 조각이 아니라 빛이며, 그 빛이 낳은 그림자다. 관람자는 동굴 안으로 들어온 듯한 감각을 경험하며, 몸의 중심으로부터 울리는 사유에 귀 기울이게 된다. 외부의 소음은 사라지고, 존재의 온도만이 남는다.
곰리의 조각은 어떤 면에서는 ‘조각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형상화한다기보다, ‘비움’을 조각하고, ‘공기’를 시각화하며, ‘존재의 여백’을 드러낸다. 그의 작업 앞에 서면 관람자는 작품을 보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마주 보게 된다. 이러한 자기 응시의 경험은 이 시대 예술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정신적 휴식이자 도전이다. 뮤지엄 산의 이번 전시는 단지 작품의 양이나 규모로 인해 주목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장소와 작가, 건축과 조각, 자연과 사유가 하나의 공명 안에서 진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곰리의 조각은 이곳에서 정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고요한 형상들 사이를 걷고, 바라보고, 머무는 바로 그 ‘관람자의 존재’ 안에서 끊임없이 다시 만들어진다.
《DRAWING ON SPACE》는 결국 곰리가 묻고, 우리가 답하는 전시다. 우리도 묻고, 곰리의 답을 전시에서 찾아보자. 몸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가?
- 전시명: 《DRAWING ON SPACE: 안토니 곰리》
- 기간: 2025년 6월 20일(금) – 11월 30일(일)
- 장소: 뮤지엄 산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오크밸리2길 260)
- 주최/주관: 한솔문화재단, 뮤지엄 SAN
- 작품 수: 총 48점 (조각 7점, 드로잉·판화 40점, 설치 1점), 신설 전시 공간 GROUND 최초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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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널 위한 문화예술 공동 대표)
널 위한 문화예술 공동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