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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로 이르는 모험

『미술 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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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9년차에 미술 기자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내게 “원하던 바를 이루어서 좋겠다”라며 축하 인사를 건넸는데, 그중 한 선배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네 진정한 고민은 지금부터 시작될 거야. 원래 인간은 목표를 이루면 그때부터 갈등하게 되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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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9년차에 미술 기자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내게 “원하던 바를 이루어서 좋겠다”라며 축하 인사를 건넸는데, 그중 한 선배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네 진정한 고민은 지금부터 시작될 거야. 원래 인간은 목표를 이루면 그때부터 갈등하게 되는 법이지.”


인생이란 항상 그런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큰 상처를 주고, 가장 갈망했던 일이 가장 무거운 짐을 등에 얹는다. 전시회를 보고 그에 대한 리뷰를 쓰는 것 정도로 생각했던 미술 기자 일은 시작부터 내게 엄청난 부담감과 고통을 주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미술품과 연관된 기업 비자금 사건이 터졌고, 미술계의 큰손으로 불리는 유명 화랑주가 검찰에 소환되곤 했다. 한동안 나는 문화부 기자라기보다는 사회부 기자에 가까웠다.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헤매고 있으면 데스크의 질책이 떨어졌고, 회사에서 하루 종일 깨지고 자정 넘어 퇴근하는 택시 안에서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싶어 한숨을 내쉬며 눈물 흘리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화랑업계와 기업 불법 비자금과의 관계를 다룬 기사를 연이어 썼던 시절, 회사로 찾아온 화랑업계 관계자는 내게 “당신에게 살인청부업자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예술은 고귀한 것이라 금력金力의 세계와는 연관이 없는 것이 정의(正義)라고 믿는 철부지였고, 돈으로 예술을 사고파는 행위에 대해 강한 반발심마저 있었다.


시간은 흘러가고 모든 것은 변화한다. 결벽증에 가깝게 고지식했던 초짜 미술 기자도 시장의 생리를 조금은 이해하는 중견 기자가 되었다. 나는 여전히 예술이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킬 수 있다고 믿지만, 더 이상 예술이 세속을 초월한 고귀한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가 역시 은자隱者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상품으로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시간은 일에 대한 시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2011년 2월 처음 미술 기자가 되었을 때는, 이 일을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2014년 1월 중순, 미술 담당을 그만뒀다. 그로부터 1년여가 흘렀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 일은 ‘하고 싶은 일’이라기보다는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는 걸 알겠다. 작가들과, 전시회와, 미술시장을 취재하는 일은 흥미로웠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1970년대의 끄트머리에 태어난 나는 “일을 사랑하고, 그에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 여기는 사회 분위기에서 자랐다. ‘하고 싶다’고 믿었던 일이 생각만큼 사랑스럽지 않아 당혹스럽고 실망스러운 날도 있었다. 그러나 지나 보니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사람이 배신하는 것처럼, 때때로 일도 우리를 배신한다. 배신감은 애정의 농도와 비례한다. 나는 이 일에서는 배신당한 적이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보고 싶은 일’이어서, 최선을 다하되 무심했고, 일관적으로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고용불안 시대의 회사원에게 ‘일이 곧 나’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일은 그저 일일 뿐’이라는 자세가 일과 자신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무기武器가 된다.


이 책은 전형적인 책상물림형 미술사학도였던 30대 여기자가, 작가와 화랑주, 큐레이터와 컬렉터, 옥션 관계자와 평론가 들이 움직이는 거대한 미술 ‘현장’에서 3년간 보고 듣고 느낀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중에서도 데이미언 허스트라든가 제프 쿤스, 로버트 인디애나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을 인터뷰했던 경험, 아트바젤이라든가 베니스 비엔날레 같은 굵직굵직한 미술 현장을 취재한 이야기들에 초점을 맞췄다.


책 내용의 대부분은 출장기다. 책이 취재기인 동시에 여행기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출장’이란 ‘가고 싶어서 가는 여행’이라기보다는 ‘가야 하기 때문에 가는 여행’이지만, 어쨌든 그 여행들을 통해 나는 성장했다. 낯선 곳보다는 익숙한 곳을, 호텔의 고급 침구보다는 내 집의 낡은 침대를 더 사랑하는 내게,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고 낯선 나라로 떠나 일주일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매번 새로운 미션을 완수하고 돌아오는 일정은 설렘보다는 두려움에 가득 찬 모험이었다. 그러나 그 여행이 끝날 때마다 나는 열두 가지 과업을 마친 헤라클레스와 황금 양털을 획득한 이아손이 어떻게 영웅의 자리에 앉았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모험은 인간을 단련시키고, 한 임무를 완수한다는 것은 다른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 되어주며, 낯선 곳에서의 분투는 더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을 경감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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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내 첫 해외 출장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2004년 6월, 장소는 로스앤젤레스, 인터뷰이는 키라 나이틀리. 그녀가 귀네비어 왕비로 출연한 영화 「킹 아더」 홍보 시사회 취재였다. 출장 때엔 비행기 안에서부터 정장을 입어야 하는 줄 알고 재킷에 정장 바지 차림으로 열 시간 가량의 긴 비행을 감수했는데, 함께 간 다른 언론사 기자들은 다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라 당황했었다. 인터뷰 장소에 나타난 키라 나이틀리마저 청바지에 노란 티셔츠를 입은 발랄한 차림새에, 손엔 커다란 잠바 주스 컵을 들고 의자 위에 편안하게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던 장면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그 출장 이후로 수없이 해외 출장을 다녔다. 이젠 간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비행기에 올라, 출장지에 도착해 취재의 성격에 맞는 옷차림으로 갈아입는 요령쯤은 부리게 되었다. 출장 일주일 전부터 떠나기 전날까지 자료 찾고 읽으며 논문 쓰듯 ‘공부’를 하기보다는, 일단 비행기에 올라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집중해 ‘벼락치기’를 할 줄도 알게 되었다. 자그마한 발전이지만 이 또한 사회인으로서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티스트를 인터뷰하고 미술시장과 전시회를 취재하러 간 출장이었지만, 나를 성장시킨 건 취재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취재 과정의 부산물들이었다. 머나먼 타국에서 자신을 만나러 온 기자에게 인터뷰이가 정선해 내놓은 말들, 그들이 보여주는 행위들은 잠시 인상적이지만 여운 깊은 감동을 남기기는 어렵다. 고급 레스토랑의 준비된 상차림보다 아주 배고팠던 날 길을 지나치다 포장마차에서 사 먹은 호떡 맛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인터뷰나 아트페어, 혹은 전시회보다는 그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겪은 일들에 초점을 맞추려 애썼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변화와 깨달음은 항상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서 온다. 인터뷰 대상과 독자 간의 매개자인 기자 일을 하면서 나는 때때로 내 인터뷰가 누군가의 삶을, 그리고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10여 년간 인터뷰를 거듭하면 할수록 확실해진 것은 서너 시간 마주앉은 것만으로 한 인간의 실체를 파악하겠다는 시도가 오만이라는 사실이었다. 그와 함께 타인의 메시지가 내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길 바랐던 것도 게으른 자의 욕심임을 깨달았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나는 나이며, 나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타인과 외부는 내 안에 원래 있던 것을 끌어올리는 자극으로 작용할 뿐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_헤르만 헤세, 『데미안』(전영애 옮김, 민음사)

 

그리하여 이 책은 온전히 나의 이야기다. 그와 함께 밥벌이란 고달프고 버거운 일이지만, 그래도 그를 통해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 독자 여러분의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2015년 봄,
곽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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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출장 곽아람 저 | 아트북스
3년간 미술기자로 있었던 일간지 기자가 작가와 화랑주, 큐레이터와 컬렉터, 옥션 관계자들과 평론가들이 움직이는 거대한 미술 현장에서 그간 보고 듣고 느낀 것들에 대한 기록을 담았다. 데이미언 허스트, 제프 쿤스, 로버트 인디애나, 트레이시 에민 같은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과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고, 아트바젤 인 바젤, 베니스 비엔날레 같은 굵직한 미술계 이벤트를 취재한 경험들이 빼곡히 담겼다. 기사화된 공식 취재 내용 외에 취재 과정에서 있었던 다사다난한 에피소드들이 들어 있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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