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이택광의 영어로 철학하기
영어로 철학하기라고?
여하튼, 시도는 해보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영어의 사고방식을 파헤치고, 거기에 담겨 있는 철학적 의미들을 차근차근 따져나가다보면,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도 스며들어 있는 삶의 태도와 영어의 상관관계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그 탐색을 시작해보자.
영어로 철학하기라고 하면 영어를 사용해서 철학책을 읽거나 영어논문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언어가 생각의 구조라고 한다면 말이다. 이런 '착각'까지 포괄해서 영어로 철학하기라는 무리한 제목을 여기에 붙인 까닭은 영어와 철학이라는 우리에게 낯선 문제들을 한번 맞부딪혀보겠다는 야심 때문이다. 이 시도를 통해 탄생할 것이 무엇인지 나도 모른다. 원래 의도는 영어에 묻어 있는 생각의 흔적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생각을 사랑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영어로 철학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의도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영어에 대한 글이거나 철학에 대한 글이거나 아니면 둘 중에 어떤 것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 글이 태어날 수도 있지 않겠나. 여하튼, 시도는 해보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왜 하필 영어냐,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영어와 철학은 어딘가 조합이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분석철학이라고 불리는 영미철학이 있긴 있지만, 우리 분위기에서 철학이라는 말은 불어나 독어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우리에게 철학은 뭔가 형이상학적인 것처럼 들리고, 따라서 철학의 언어도 영어처럼 뭔가 간단하고 단순할 것 같지 않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나의 시도는 생뚱맞기 그지없게 여겨질 것이다. 어디 약을 팔려고 드나 싶을지도 모른다. 영어면 영어고 철학이면 철학이지 둘을 섞어서 사기를 친다고 비난해도 억울하긴 하지만 딱히 변명할 말은 없다. 굳이 이게 문제라면 처음부터 손을 안 대는 게 상책이다. 말하자면 이런 짓을 해서 내게 남을 만한 이문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뜻이다.
나름대로 '사명감' 같은 것이 없으면, 모두에게 욕 들어먹을 짓을 할 필요는 없다. 역시나 나는 '사명감'이라는 말을 끄집어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학까지 가서 철학을 하겠다고 했을 때, 나의 뇌리를 맴돌았던 것이 바로 이 '사명감'이었다. '사명감'은 남들이 말리는 일을 할 때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핑계다. 영어에 담겨 있는 어떤 생각들을 밝혀내는 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가 수용하고 있는 영어의 이데올로기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이자 동시에 영어를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돌아봄'의 순간을 제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영어에 대한 딱딱한 추상적 사고를 늘어놓지는 않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영어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영어를 통한 생각'을 펼쳐보려는 것이다. 여하튼 이런 목표를 두고 슬슬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는 심산이다. 반복하지만 결과는 나도 장담하지 못한다. 다만 한번 해보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영어에 대한 숱한 책들이 있지만 영어와 철학을 하나로 엮어 보는 시도는 없는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이게 왜 없을까 고민도 해봤는데, 아마도 앞서 말했듯이 철학의 언어는 프랑스어나 독일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짙기 때문에 영어와 철학을 연결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이상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게다가 영어를 주요 언어로 삼는 학문은 대체로 철학에 대해 쓸데없는 말들만 많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뭐니 뭐니 해도 영미권에서 대접 받는 학문은 사회학이나 경제학 같은 것이지 프랑스나 독일에서 유행하는 철학은 아니다. 이런 불일치가 아마도 영어와 철학을 하나로 엮어보려는 시도를 처음부터 접게 만든 게 아닐까.
내가 영어와 철학을 서로 엮어보자는 생각을 처음하게 된 것은 법에 대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글을 읽었을 때였다. 『법의 힘』이라는 에세이에서 그는 역시나 해체주의의 창시자 답게 말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프랑스 철학자로서 법에 대해 논하기 위해 영어로 글을 작성하는 문제가 앞머리를 차지했다. "영어로 내 자신을 당신에게 전달해야만 한다는 것, 이것이 의무사항이다"(This is an obligation, I must address myself to you in English)는 발언은 인상적이었다. 이 문장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법의 힘』에 붙은 부제가 바로 "권위의 신비한 토대"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런 진술은 예사롭지 않다. 영어로 자기 자신을 전달하는 의무사항은 누가 만들어낸 것인가. 특정한 누구라고 말할 수 없다면 영어라는 언어를 의무적으로 사용하게 강제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충 이런 질문을 데리다의 첫 문장에서 유추할 수가 있다.
굳이 데리다에 기대어 증명하지 않더라도, 영어는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언어가 되었다. 그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무엇보다도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 중심으로 재편되었던 세계질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구조적 변동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같은, 역시나 프랑스 철학자가 말하는 '신자유주의'의 확산일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이데올로기라기보다 앵글로색슨 문화를 구성하는 삶의 규범으로 세계를 통일한 것에 가깝다. 영어를 통해 생각할 때 이 문제는 핵심이다. 앞서 나는 짧게 영미철학 또는 분석철학에 대해 언급했는데, 실제로 앵글로색슨 문화를 거론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도덕철학의 전통이다. 처음부터 도덕철학이라는 게 있지는 않았다. 몇몇 철학자들이 앞으로 이런 철학을 하자고 작정하고 도덕철학이란 것을 만든 건 아니었다는 뜻이다.
루이스 앰허스트 셀비-비기(Lewis Amherst Selby-Bigge)라는 사람이 『영국 도덕주의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선집을 묶으면서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에서 존 로크(John Locke)로 이어지는 일련의 자유주의 철학을 편의상 도덕철학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공리주의라고 불리는 자유주의에서 핵심적인 도덕철학은, 차차 논의하게 되겠지만, 영어의 사고방식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도덕철학은 정치와 경제, 그리고 자아를 아우르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는 '근대사상'이다. 근대 영어가 여기에서 기원한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영어의 기원은 다양하고, 수많은 외래어로 구성되어 있지만, 오늘날 영어의 사고방식을 결정하고 있는 많은 기호학적인 '약호(code)‘는 도덕철학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어의 사고방식을 파헤치고, 거기에 담겨 있는 철학적 의미들을 차근차근 따져나가다보면,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도 스며들어 있는 삶의 태도와 영어의 상관관계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그 탐색을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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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비평가가 되는 법 『이것이 문화 비평이다』 - 이택광
관련태그: 이택광,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철학, 영국 도덕주의자들
미술, 영화,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고 있는 작가.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경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에 자신을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환경에 한동안 적응하지 못했으며 우주여행을 떠나는 그림을 그려서 꽤 큰상을 받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는 자신의 모토를 "그림의 잉여를 드러내는 글쓰기" 라고 밝히며 글쓰기는 그림 그리기의 대리물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림에 대한 글을 계속 쓸 생각이라고 포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 21>에 글을 발표하며서 본격적인 문화비평을 시작한 이후, 다양한 저서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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