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과 낮』
버지니아 울프 저/최애리 역 | 아카넷
각자가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습성을 가지게 된다면…… (『자기만의 방』, 이미애 옮김, 민음사, 2006)
우리는 너무나도 바보들이야, 빅토리아 거리를 건너며 그녀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하늘만이 아시기 때문이지, 왜 우리가 삶을 그렇게 사랑하는지, 왜 삶을 그렇게 보는지, 구성하고, 하나를 중심으로 쌓아 올리고, 무너뜨리고 그리고 매 순간 새롭게 삶을 창조하는지 말이야. (…) 그녀가 사랑하는 것이 있다. 삶이, 런던이, 유월의 이 순간이 말이다. (『댈러웨이 부인』, 정명희 옮김, 솔출판사, 2019)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적인 작품에는 페미니즘 비평적 글쓰기의 선구적 에세이 『자기만의 방』과 ‘의식의 흐름’이라는 실험적 기법으로 탁월한 예술성에 도달한 모더니즘 소설 『댈러웨이 부인』 등이 있겠습니다. 특히 『댈러웨이 부인』은 니콜 키드먼,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주연 영화 〈디 아워스〉의 원작인 『세월』을 변주한 소설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요.
한데 오늘 소개할 울프의 두 번째 소설 『밤과 낮』은 위와 같은 작품들과 결을 달리한다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전통적인 결혼소설의 플롯을 차용한 성장소설로, 1919년 출간 당시 소설가이자 친구인 캐서린 맨스필드로부터 “현대판 제인 오스틴”이라는 비판을 받기까지 합니다. 울프는 오스틴 작품의 문학적 가치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가부장적 질서 안에 안주하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오스틴 문학과 거리를 두었는데도 말이지요.
『밤과 낮』에서 울프는 리얼리즘 소설이라는 전통적 형식 아래 “마음의 변화 (…) 새로운 생각과 감정의 새로운 틀”(캐서린 맨스필드)을 모색하고자 했습니다. 20세기 초 에드워드 시대 잉글랜드, 유서 깊은 가문의 (저명한 문필가가 외할아버지인) 젊은 여성이 전통적 가치관에 맞서 사랑과 결혼, 진로 등을 고민하고 갈등한다는 줄거리에 가부장제와 남성 지배, 여성의 정체성과 주체적 삶 등에 대한 비판적이고 혁신적인 생각을 싣고자 한 것이죠.
주인공 캐서린 힐버리는 고루한 가문의 전통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삶을 살고자 열망하고, “자신이 바라는 바를 얻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관문에 지나지 않는” “애정 없는 결혼”을 결심합니다. 한데 하필 캐서린의 약혼자는 잉글랜드 남서부의 오래된 가문 출신으로 남성우월주의를 대변하는 보수적 인물 윌리엄 로드니였어요.
“알다시피 그녀는 끔찍하게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고―적어도 여자한테는 끔찍한 일 아닙니까―매사에 똑똑한 척하면서 모든 일을 자기 멋대로 하고 집에서도 아주 오냐오냐 떠받들린단 말입니다. (…) 그 여자도 바보는 아니에요. 취향도 있고 지각도 있어요. 말이 통하지요. 하지만 그래봤자 여자는 여자니까요.” (…)
그는 그녀가 입도록 자기가 특별히 골라준 옷들이 담긴 상자가 엉뚱한 역으로 배송된 데 대해 짜증을 냈다. (…) 식탁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두 번이나 나무랐고, 한번은 자기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고 비난한 적도 있었다. (『밤과 낮』, 최애리 옮김, 아카넷, 2017)
결국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윌리엄과는 파혼하게 되고(이때 셰익스피어 희극 같은 소동이 일어나는데요, 이 작품의 패러디적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처음 만났을 당시에는 서로 적대적이었지만 몽상적 기질이 공통적이고 지향하는 삶이 비슷한, 한미한 집안 출신의 랠프 데넘과 맺어집니다. 그사이에 약혼한 캐서린을 단념했던 랠프는, 여성참정권협회 간사로 일하며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캐서린의 부러움을 사는 메리 대칫에게 청혼하지만 거절당해요. 메리는 “이 세상의 거대한 역사에 태엽을 감는” 일을 선택하는 겁니다. 캐서린의 가지 않은 길이랄까요.
지난 몇 달 동안 그녀의 인생은 한 단계를 넘어섰고, (…) 이 여성은 이제 쓸 만한 인간이요,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 자신은 더 이상 랠프를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 (…) 옛 사랑의 자리에 또 다른 사랑이 타고 있었다. (…) “사랑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어요.” 그녀는 마침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밤과 낮』)
이에 울프는 (메리와는 다른) 캐서린의 선택을 제시합니다. 사랑과 결혼의 이상을, 합일적 삶과 독립적 삶의 이해와 공존을, 외적 삶과 내적 삶 양쪽에서 깊은 소통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각자의 영역과 자유를 존중하는 관계 말입니다. ‘밤과 낮’이라는 제목은 이 지점에서 의미심장해집니다.
왜 생각과 행동 사이에, 혼자 있을 때와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사이에, 이렇게 끊임없는 간극이, 이 어이없는 절벽이 있어야 하는 걸까? 절벽 한쪽에서는 영혼이 환한 대낮인 듯 활발해지는데, 다른 쪽에서는 밤처럼 어둡고 명상적이 되는 걸까?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아무런 근본적인 변화 없이, 똑바로 고개를 들고 건너갈 수는 없는 걸까? 그가 그녀에게 제안하는 이것이, 드물고도 놀라운 우정의 기회야말로―바로 그 기회가 아닐까? 어떻든 그녀는 데넘에게, 조바심과 안도가 동시에 느껴지는 한숨과 함께,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옳은 것 같다고, 그의 우정의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밤과 낮』)
울프의 젊은 시절, 즉 울프 부부의 구혼 시절이 반영된 이 소설은,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결혼소설의 틀을 빌리되 주인공이 결혼에 이르지 못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형식을 추구한 자전적 소설이자 데뷔작 『출항』과 의식의 흐름 기법이 탁월하게 사용된 작품으로 유년기 경험이 강하게 투영된 소설 『등대로』와 함께 읽으면 좋을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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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은 (출판 편집자)
은행나무 해외 문학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