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우뚝 선 존재로서
서점 위트앤시니컬의 유희경 시인이 들려주는 『부재하는 형상들이 있는 풍경』에 관한 이야기.
글 : 유희경(시인)
2025.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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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하는 형상들이 있는 풍경』

필리프 자코테 저/류재화 역 | 난다


책은 형식과 내용이며 책 읽기는 형식 그리고 내용과 관계하는 사건이다. 형식은 읽는 이, 독자의 신체와 밀접하고 내용은 읽는 이의 내면-영혼에 간여(干與)한다. 독자는, 형식을 통해 준비되어 내용에 의해 잠식된다. 독자 중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애써 언어화하지 않을 뿐, 형식과 내용을 통해 독서가 성립된다는 사실을 읽는 우리는 모두 알거나 짐작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매 되지 않을 리뷰에 군더더기를 붙이는 까닭은 아마 필리프 자코테의 『부재하는 형상들이 있는 풍경』 읽기로부터 내가, 형식과 내용이라는 기본적인 독서 양식이 숨겨놓은 치밀한 아름다움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저 드넓은 곳에는, 물안개 낀 둥지 속에 째깍거리는 영원의 시간이 있었다.” (73쪽)

 

책을 펴서 읽기 시작한 지 한참이나, 아무리 읽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다. 이 독서는 우뚝 서 있다. 우뚝 서 있는 자에게도 시간은 주어지고 그것은 수(數)를 센다. 여기서 내 독서의 오류가 발생한다. 나의 수는 성큼성큼 나아가고 거침없이 종횡무진한다. 어느덧 그렇게 되었다. 항시 접속되어 있고 거리를 무시한 속도가 나를 움직이는 세계에서 우뚝 서 있던 적이 언제였던가. 나는 채 한 장을 읽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그러나 밀어놓지 못했다. 내 의심에 대한 의심이 작동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경험에 의한 추론일 수도 있고 본능적 감각일 수도 있다. 여기 무언가 있다. 우뚝 서 있게 됨의 불편함 속에 그 원인과 이후 다다를 결론에 무언가 있다. 다시 이번에는 바짝 조여진 채로 책을 펴 들었다. 다시 서 있는 자에게 주어진 만큼의 시간이 수를 센다. 서둘러 내달리려는 시선을 잡아채 미끄러지듯 지나쳐버린 단어로 되돌려 놓으며 나는 예상치 못한 향수를 느꼈다. 그렇다. 내가 지나온 시간 속 어떤 지점에서 캐낸 감각이 여기 있다. 거기 있었다. 글자를 배워 처음으로 읽어‘갈’ 때의 느낌이다. 그제야 우뚝 서 있는 자는 고개를 돌린다. 왼쪽에서 하나씩 하나씩 놓치지 않고 ‘거쳐’ 오른쪽으로, 같은 방식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마음의 방향을 따라 외부를 읽어내려고 한다. 그럴 뿐 아니라 헤아려간다. 거기엔 갖은 이름들이 서 있는 자의 것이 아닌, 오직 자신만의 생명을 드러내고 있다. 어떤 것은 알 수 없고 어떤 것은 깨우친다. 모름도 앎도 느릿하거나 벼락같다. 우뚝 서 있는 자는 듣기도 한다. 거기에도 이름이 있다. 역시 모름과 앎의 경계에서 거기 있다.

 

“이런 심려에는 진실한 것이 있다. 그건 멀리서 지나가니까, 저 다른 곳에서 지나가니까. 마치 진짜를 속삭이는 텍스트는 외국어 속에 있다는 듯이. 마치 우리에게 손짓을 하는 것은 저기 경계 너머에 있다는 듯이.” (62쪽)

 

필리프 자코테의 텍스트는 조금도 급하지 않다. 함부로 잡아채려거나 떠밀지 않는다. 독자의 의심을, 견고해지고 쌓아 올려지는 경계(警戒)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내버려둔다. 내버려두는 방식으로 가만 쥔다. 상수리나무 가지에서 발견한 둥지 그 속의 흰 새 알을 손에 쥔 아이처럼. 잘 알고 있는 듯 적고 있지만 낯설어 어리둥절했다고 고백한다. 지금도 나는 필리프 자코테를 떠올리거나 그의 책을 펼쳐 들 때 거대한 손의 온기를 느낀다. 마침내 그 두 손이 나를 감싸 쥐면 나는 자연 앞에 우뚝 서 있다. 이 자연은 우리가 풀, 숲, 바람, 새, 별, 구름, 샘물과 강물, 하고 부르는 그 자연인 동시에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바로 그 자연이다. 자연 앞에 우뚝 섬은 괴리와 동화를 동시에 느끼는 한 방법이다. 이 모순을 이해라고 정의해도 될까. 타자의 올바른 정립이 주체의 회복 문제와 직결되는 자연 바로 그 자연에 서서 나는 읽는다. 읽어간다. 비로소 언어를 배우는 아이처럼, 언어가 가만히 눈을 떠 나를 응시한다. 거기에는 조금의 위협도 없다. 

 

“어둠과 밝음, 무거움과 가벼움, 모두가 너무나 위대하고, 너무나 절대적인 법칙에 복종하기에 여기에는 우울이나 두려움, 단 하나의 쇠락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89쪽)

 

가르치지 않으려는 자의 섬세한 선택을 신뢰하고 따르는 일이 필리프 자코테 독서의 첫 원칙이자 유일한 원칙이다. 그럼으로써 언어는 관습의 진부함이라는 족쇄를 벗어버리고 눈부시게 날아오르며 우리의 사유는 새롭게 태어나 새 눈으로 세계를 둘러보게 된다. 아주 잠시일 뿐이라도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순간”과 그 “순간에 찾아오는 기쁨”에 동참할 수 있다. 이 삶이 하나로 통일되는 일을 목도할 뿐 아니라 체험해 보는 시간은 놀라운 사건이다. 조금의 악의도 없는 선함을 나는 또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아니다. 나는 재차 앞서가려는 나의 부족함을 잡아챈다. 지나치지 않으려고 우뚝 서 있어보려고. 그럴 때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는 내 것이 아니다. 첫 장 첫 문장부터 의심을 갖지 않았으므로. 마치 금세라도 눈을 쏟을 듯한 하늘 모양을 연상케 하는 표지의 이 책은 무구한 나신의 신으로 나에게 왔으므로. 단지 짐작할 뿐이다. 한 세계가 한 세계로 병합되는 소리가 아닐까. 텍스트가 시간을 넘어 걸어들어올 때의 기색이 아니려나. 그러므로 나는 깊은 눈매를 가진 필리프 자코테를 대면하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 순간, 저열한 것만큼이나 틀림없이 존재하는(슬프게도 저열한 것이 더 가시적이고 더 격렬하지만) 아름다움, 그 정연한 세계가 솟구친다. 지독한 의심을 거쳐, 결국은 시인들이 다시 돌아오고 마는 이 특이한 미끼, 함정. (111쪽)

 

언어를 헤치고 언어를 만나는 일이 시 쓰기이고 시 읽기이며, 이 책이 가진 빛나는 면모이다. 만약 당신이 지쳐 있다면, 그 이유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펴 들어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진부함 속에 살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며 자연의 일부로서의 삶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될 터이니. 아닌 게 아니라 근 몇 달 나는 서점주인의 입장에서 실은 시인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이 책을 건넸다. 그때마다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기며 의젓해진다. 그럴 뿐 아니라 풀, 숲, 바람, 새, 별, 구름 샘물과 강물을, 모란디의 그림과 횔덜린의 시를, 시간의 풍경을 쥐여주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 중 여럿이 이 책을 펼쳐 들 것이다. 자신을 옭아맨 시간에 익숙해 미처 숨을 쉬지 못하고 잠시 책을 덮었던 이들도 필경 다시 펼쳐 들고 말 것이라는 확신이 내겐 있다. 마침내 그들이 형식을 통과하여 내용 속에서 이 책을 사랑하게 되는 우뚝 서 있는 존재로서의 기회를 얻었다는 짐작이 들기라도 하면, 서점주인이자 실은 시인이라는 나의 직업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감동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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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하는 형상들이 있는 풍경

<필리프 자코테> 저/<류재화> 역

출판사 |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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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했다. 2007년 신작희곡페스티벌에 「별을 가두다」가,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가 당선되며 극작가와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시집으로 『오늘 아침 단어』,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이 있으며 현재 시집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을 운영하고 있다. 시 동인 ‘작란’의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