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저/김윤하 역 | 은행나무
“언제든 말해주마.” 그녀의 이모가 대답했다. “너무 멋대로 행동한다고 생각하면 말이다.”
“그래주세요. 하지만 이모의 충고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할 거라고는 말씀 못 드려요.”
“그렇겠지. 넌 네 방식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니까.”
“그래요, 전 제 방식이 정말 좋아요. 하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알고는 싶어요.”
“그래서 하려고?” 그녀의 이모가 물었다.
“그래서 취사선택을 하려고요.”
(헨리 제임스 지음, 유명숙·유희석 옮김, 『한 여인의 초상』, 창비)
위 대화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 『한 여인의 초상』(1881)에 등장합니다. 대화에서 느껴지듯이 상당히 진취적인 성격의 독립적이고 지적인 신여성 이저벨 아처가 등장하죠. 이 작품은 현대소설의 선구적 거장으로 불리며 영국과 미국 문학사 모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헨리 제임스의 대표작으로서 “『한 여인의 초상』이 [제임스의 방대한 작품 세계에서] 지니는 대표성을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한데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문예평론가 F. R. 리비스는 “영어로 쓰인 가장 뛰어난 두 소설 중 하나는 제임스의 『한 여인의 초상』이다”라는 평을 남긴 적이 있는데요. 이때 또 다른 뛰어난 소설 하나가 바로 오늘 소개할 제임스의 소설 『보스턴 사람들』(1886)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뛰어난 영미소설 두 편 모두 제임스의 작품이 되는 셈이네요.
『보스턴 사람들』은 여성 참정권 운동이 활발했던―‘여성해방운동’이라는 용어가 여섯 번 등장합니다―19세기 보스턴을 배경으로 하는데요. 남부 출신의 변호사로 남북전쟁 참전자이자 보수주의자인 베이질 랜섬(“야위고 창백하니 안색이 안 좋고 차림도 추레한데 어딘지 모르게 이목을 끄는 이 청년, (…) 지방 사람 같은 외모 속에 걸물의 풍모를 지닌 그는 남성의 대표자”), 랜섬의 먼 친척이자 여성 참정권 운동가 올리브 챈설러(“이 모든 점을 통틀어 그녀의 외양에는 매우 모던하고 고도로 세련된 면이 있었다. 그녀는 신경질적인 체질이 갖는 특유의 결점과 함께 장점도 가지고 있었다”), 여성 권리 옹호 연설가 버리나 태런트(“보스턴에서 처음으로 본 미인이라고 그는 은근히 생각했지만, (…) 그야말로 경이로울 정도로 명쾌하고 우아한 연기였다. 10분간의 연설이 끝나자 랜섬은 청중 전체가 그 연설에 매료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소설입니다.
제임스의 소설 가운데에서는 드물게도 정치적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사실주의 작품인 한편, ‘의식의 흐름’―헨리 제임스의 형인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저서 『심리학의 원리』(1890)에서 쓴 용어입니다. 의식이란 단편적이지 않은 것이며 끊임없이 흐르는 강의 흐름과 같다고 보았던 것이죠―에 대한 자유로운 서술이 곳곳에 포진한 만큼 모더니즘으로의 이행 또한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실험적인 성격의 소설이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돌봄과 연대감, 로맨스가 가미된 두 여성 간의 관계를 가리키는 ‘보스턴 결혼’이 유래된 작품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보스턴 결혼’은 미국에서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존재한 여성들 간의 동거 관계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고도 독립적으로 살아갈 만한 전문직 일자리들이 생겨나면서 여성은 결혼하지 않으면서도 잘 살 ‘궁리’를 해냈다. 청교도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미혼이면 당연히 금욕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와 여성들 간의 친밀성을 결합해낸 여성의 문화적 능력이 바로 ‘보스턴 결혼’이었다. (에스더 D. 로스블럼, 캐슬린 A. 브레호니 지음, 알·알 옮김, 『보스턴 결혼』, 이매진)
올리브의 초대를 받아 보스턴을 방문한 베이질 랜섬은 여성의 권리에 대해 연설을 하는 버리나를 보고 첫눈에 반하는데요. 물론 “원래부터 그 누구보다도 완고한 보수주의자였던 그는 소녀가 한 공허한 말들에 굳게 마음을 닫”고 허튼소리로 치부해버립니다. 한데 여기서 버리나에게 첫눈에 반한 이는 랜섬만이 아니었죠. 올리브 역시 버리나의 매력에 바로 빠져듭니다. 이때 올리브는 버리나를 여성해방운동의 기수로서 내세울 수 있음을 확신하고, 버리나와 함께할 이상적인 삶을 꿈꿉니다.
“이 집에서 혼자 사세요?” 버리나는 올리브에게 물었다. “당신이 오셔서 저와 함께 살아주신다면 혼자가 아니죠!” 이렇게 진짜로 감정을 드러내는 응수에도 버리나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 그러는 동안 올리브의 눈앞에는 램프를 밝힌 조용한 겨울밤의 평화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작은 탁자에는 차가 놓여 있고 고르고 고른 동반자와 함께 괴테를 훌륭히 번역해내는 광경. (…) 이런 광경을 떠올려보는 것은 그녀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탐닉이며, 게다가 아주 가끔밖에 맛볼 수 없는 기쁨이었다. 버리나 역시 그 광경을 얼핏 엿본 듯했다. 얼굴을 한층 더 빛내면서 정말 꼭 그러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보스턴 사람들』, 은행나무)
작가는 『보스턴 사람들』에 수많은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섬세한 묘사, 얄궂은 어조와 재치를 구사합니다. 특히 인간 군상의 허위와 이기심을 꼬집을 때 재미가 배가되는데요. 입체적인 성격의 세 주인공뿐만 아니라 경박하고 피상적인 올리브의 언니 루나, 열정적인 사회운동가로 존경받지만 표리부동한 모습을 보이는 퍼린더 여사, 진보와 사이비 종교가 기묘하게 결합된 버리나의 부모 태런트 부부, 여성운동의 대의보다는 실용주의에 경도된 닥터 프랜스 등을 통해서 말이죠.
방대한 분량 때문에 책을 집어 들기가 다소 망설여질 수 있겠는데요. 지금껏 읽어본 제임스의 작품 중에서는 ‘페이지 터너’에 가까운 소설입니다. 현대 영문학사 최초의 레즈비언 소설이라고 하는, 래드클리프 홀의 『고독의 우물』(1928)과 함께 읽으면서 두 책의 결말을 비교해보면 더욱 흥미롭지 않을까 싶습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보스턴 사람들
출판사 | 은행나무
한 여인의 초상 1
출판사 | 창비
한 여인의 초상 2
출판사 | 창비
심리학의 원리 1
출판사 | 아카넷
심리학의 원리 2
출판사 | 아카넷
심리학의 원리 3
출판사 | 아카넷
고독의 우물 1
출판사 | 펭귄클래식코리아
심하은 (출판 편집자)
은행나무 해외 문학 편집자.
이정훈myself
2025.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