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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안 소설>과 함께 본 주목할 만한 독립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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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식 감독의 <러시안 소설>은 충분히 흥미롭고 신비로운 영화로 기억된다.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감독조합상 감독상을 수상하고 제42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 스펙트럼 부문, 제36회 예테보리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신연식 감독은 2005년 300만원으로 만든 장편 <좋은 배우들>로 주목받은 후, 2009년 안성기 주연의 <페어 러브>를 만들었다. 2013년 김기덕이 제작자로 나선 <배우는 배우다>가 개봉을 앞두고 있어 근래 가장 주목 받는 감독 중 한 명이 되었다.

한국영화 전성시대라 할만하다. 2013년 상반기 천만관객을 넘긴 <7번방의 선물>에 이어, <베를린>, <은밀하게 위대하게>, <신세계>로 이어지는 연속 흥행은 하반기에도 계속되어 <설국열차>, <더 테러 라이브>, <감기>, <숨바꼭질> 그리고 곧 천만 영화가 될 것 같은 <관상>까지 한국영화의 흥행 속도는 아찔하고 짜릿할 정도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들썩대며 기뻐할 일이지만, 사실 폭발적인 흥행의 이면에 거대 배급사의 상영관 독점, 악의적이고 기준 없는 심의 등의 문제점이 숨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와중에 작가주의 감독으로 불리는 홍상수 감독의 <우리 선희>와 제한상영등급과 삭제로 논란이 된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가 개봉되었지만 각각 전국 30만, 20만의 관객 동원 후 조기 종영되었다. 세계적인 감독들의 영화도 이러하니 독립영화를 만들어 온 신인 감독이 개봉관을 잡기란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징검다리 상영으로 편법을 쓰고는 있지만 멀티플렉스 극장과 예술 영화 전용관이 저예산 독립영화가 개봉 가능한 틀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잔잔하고 아련한 여운, <러시안 소설>

저예산 작가주의 영화의 뚝심과 상업 영화의 재바르고 명민한 결합 사이에서 신인 감독들은 쉽게 헤매게 된다. 누구도 올바른 길을 가르쳐줄 수 없는데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욕심도 있고, 영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상업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지난한 시스템의 한계 속에서도 신인 감독들은 계속 데뷔하고, 저예산 독립영화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정말 큰 위안이다. 저예산 독립영화는 영화의 다양한 층위와, 소수만이 공감할 수 있는 화법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순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독립영화는 계속 만들어질 수 있도록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줘야 하는 영화이다. 우리는 상업 영화의 틈바구니에서도 독립영화의 모범답안 같은 <지슬>과 놀라운 재기를 확인할 수 있었던 <명왕성>의 신수원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관상>과 <스파이>가 양분하는 추석 영화의 전쟁 속에서 <러시안 소설>은 조용히 개봉했지만, 시끄럽고 떠들썩한 축제에서 잠시 빠져나와 잔잔한 호숫가에 앉아 쉬는 것 같은 아련한 여운을 주는 영화이다.


제대로 된 소설 공부를 한적 없는 신효(강신효)는 당대 최고의 소설가 김기진을 존경하며 그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김기진의 아들 성환에게 부탁하지만, 늘 거절당한다. 신효의 소설은 재혜(이재혜)를 제외하고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신효는 창작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새 소설의 탈고를 마친 27살의 어느 날 사고로 의식불명의 상태가 되고, 27년 후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27년 동안 그는 최고의 작가가 되어 사람들에게 칭송받고 있었다. 하지만, 발간된 신효의 소설은 온전한 그의 작품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수정된 것이었다. 신효는 누가 자신의 소설을 수정했는지 추적하기 시작한다.


신효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식물인간이 되기 전인 과거의 이야기와 깨어난 현재의 이야기를 다루는 <러시안 소설>은 마치 1권과 2권으로 나눠진 이야기처럼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27살 신효의 이야기는 길고 복잡하고 인물이 많고 다소 지루한 러시안 소설과 닮아있다. 신효의 욕망과 열등감은 다양한 인물들과 뒤섞여 흥미로운 발화점을 보인다. 신효가 쓴 소설의 내용과 그의 꿈이 현실에 녹아들어 경계가 희미해지는 내러티브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27년 후의 현재로 넘어온 영화의 후반부가 다소 지루하다는 점은 아쉽지만 문학이라는 고전적인 장르를 화면으로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 같은 우아하면서도 나른한 화법은 <러시안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다. 내러티브가 복잡한 것은 아니지만, 영화가 표현하는 주된 정서가 예술가와 그의 삶이라는 다소 묵직한 주제이기 때문에 조금만 길을 잃어도 지루해질 수 있다. 하지만 신연식 감독의 <러시안 소설>은 충분히 흥미롭고 신비로운 영화로 기억된다.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감독조합상 감독상을 수상하고 제42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 스펙트럼 부문, 제36회 예테보리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신연식 감독은 2005년 300만원으로 만든 장편 <좋은 배우들>로 주목받은 후, 2009년 안성기 주연의 <페어 러브>를 만들었다. 2013년 <러시안 소설>에 이어 김기덕이 제작자로 나선 <배우는 배우다>가 개봉을 앞두고 있어 근래 가장 주목 받는 감독 중 한 명이 되었다.


크건 작건 영화는 계속 된다, 쭈욱


<아티스트 봉만대>

얼마 전 조용히 개봉한 봉만대 감독의 <아티스트 봉만대>는 에로 영화 제작 현장을 담은 페이크 다큐이며 ‘에로 영화감독’으로 불리지만 영화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여전히 영화를 찍어야 하는 ‘감독’ 봉만대 개인의 고민을 담아내는 영화이다. 섹시 스타 곽현화, 성은, 이파니 등이 본명으로 출연해 세 배우의 사연과 극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지만 배우들의 몸을 전시하는데 치중하지 않고, 한국에서 저예산 영화를 찍는 감독과 여배우들, 그리고 인지도 없는 배우와 감독이 여전히 영화판 주위를 얼쩡대야 하는 당위를 얘기해 보고 싶어 한다. 층위는 다르겠지만 저예산 영화의 제작 현장은 영화 속 현장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2>


<명왕성>


<가시꽃>

3월 개봉한 오멸 감독의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2>는 독립 영화의 존재 이유와 그 방향성을 정확하게 제시해준 영화였다. 오멸 감독은 제주 4.3 사건을 스크린에 불러 오면서 ‘그들이 얼마나 살고 싶어 했는지’를 관객에게 보여준다. 감자의 제주 방언인 지슬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놓을 수 없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열망을 담아내며 역사적 반성과 사유를 위해 ‘영화’라는 장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신수원 감독의 <명왕성>은 극단적인 설정을 끝까지 밀어붙인 영화이다. 1980년대 하이틴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1990년대 공포영화 <여고괴담>의 지독한 현실에서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은 대한민국의 입시지옥을 다룬 <명왕성>은 돌직구처럼 직선으로 나아가는 영화이다. 한국의 입시제도가 10대 청소년들을 경쟁에 미친 괴물로 만드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리며, 상위 1% 학생들의 모임, 왕따, 폭행 등 외면하고 싶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을 그대로 담아낸다. 이돈구 감독의 <가시꽃>은 300만원이라는 예산으로 만들어낸 뚝심 있는 영화이다. 영화는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가 만나는 10년 뒤를 이야기한다. 죄의식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의 생활 속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며, 범죄와 단죄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가해자가 겪는 죄의식과 피해자가 감내해야 하는 고통, 그리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들여다본다. 당연히 영화의 결은 거칠고 정돈되지 않았지만 묵직한 주제의식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정돈된 호흡과 통제력은 높이 살만하다.

2010년에 제작되었지만 얼마 전 개봉의 기회를 가진 김곡, 김선 감독의 <방독피>는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김곡, 김선 감독이 <방독피> 다음으로 만든 영화가 상업적 목표가 분명한 장르영화 앞에서 주춤거린 만듦새를 보여준 2011년 <화이트, 저주의 멜로디>, 2012년 <무서운 이야기>라는 사실은 정말 의외이다. <방독피>는 너무 많은 것들이 과장되고 과하게 넘치는 영화이다. 한국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과 정치적 함의를 품고 있음에도 난해한 이야기 때문에 충분히 공감하긴 어렵다는 점은 아쉽다.


<죽지 않아>

황철민 감독의 <죽지 않아>는 2013년 하반기 꼭 보면 좋을 신선한 독립영화이다. 군인 출신의 극우 반공주의자 할아버지(이봉규)의 유산을 노리고 시골로 내려간 지훈(차래형),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든 정체불명의 여자(한은비)가 삼각관계를 이루며 내밀한 긴장감을 만들어가는 스릴러 장르의 영화이다. 극우 1대 할아버지와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었던 2대 아버지, 그리고 돈이면 다 된다는 3대 손자라는 설정은 손쉽지만 흥미로운 발화점을 만들어낸다. 아버지는 극 중에서 어떤 실질적 역할도 하지 않기에, 할아버지와 손자의 사이는 오직 ‘돈’으로 엮인다.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촘촘하게 직조된 내러티브에, 흥미로운 반전까지 숨어있는 알찬 영화이다. 이외에도 에로의 상상력을 녹여낸 공자관 감독의 <허풍>이 부천 영화제를 통해 공개되었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진 못했지만 공정하고 바른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녹여낸 이지승 감독의 <공정사회>와 최승호 감독의 <노리개>도 올 상반기 의식 있는 목소리를 들려준 영화로 각인되었다.


[관련 기사]

-충격적인 교육 현실 폭로한 영화 <명왕성>, 7월 개봉
-여전히 미개한 사회를 향한 쓴 소리: <노리개>, <공정사회>
-이준 “<배우는 배우다> 김기덕 감독님께 먼저 연락했어요”
-혁신의 상징, 故 박철수 감독을 추모합니다
-<춤추는 숲> 부모들이 더 행복해지는 성미산마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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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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