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나폴리에 3개월간 머무르게 된 INTJ 소설가는 90일 동안 나폴리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까? 격주 화요일 <정대건의 집돌이 소설가의 나폴리 체류기>가 연재됩니다. |
레지던스가 결정이 되고 현지에 작가를 소개할 작가 키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을 때 나의 단편 소설 중에서 고민 없이 『아이 틴더 유』를 선택했다. 데이팅 앱인 '틴더'는 국제적으로 사용되고 있기에 틴더에서 만난 '솔'과 '호'의 이야기로 이곳의 학생들과도 무리 없이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라 쌤과 번역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재밌는 에피소드들이 많이 생겼다.
'신춘문예라니, 왠지 멸치에다 깡소주 잘 마실 거 같다.'
솔과 호의 사이가 소원해졌다가 오랜만에 연락을 했을 때, 호가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고 하자, 솔이 보이는 반응이다. 이 문장을 과연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원문 그대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설명하는 방법과, 이탈리아의 맥락에 어울리게 의역하는 방법. 나는 사라 쌤에게 맥락에 맞게 의역하는 것도 괜찮다고 말했다.
'번역은 신성하다.'
이미 봉준호 감독이 <옥자>에서 강조하지 않았던가.
"강소주의 사전적 의미는 안주 없이 마시는 술이니까 엄밀히 말하면 멸치 안주도 없어야 맞습니다. (사라 쌤에게 설명하면서야 내가 단어의 뜻을 엄격히 따져가며 사용하지 않았구나 알아차렸다) 표준어는 '강소주'라고 써야 맞는데 대사니까 어감상 깡소주라고 썼어요. 그리고 멸치. 유럽에도 멸치가 있긴 하죠? 앤초비.(그러나 앤초비에도 우리나라의 마른 멸치 안주가 갖는 뉘앙스가 있을까?)"
유럽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개념인 '신춘문예'도 설명해야 했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신춘문예 제도와 한국 사회의 특징에 대해 상세히 취재하고 분석한 장강명 작가의 르포 『당선, 합격, 계급』을 권하고 싶었지만 번역을 하기에 한시가 급했다.
"더이상 아무도 종이 신문을 읽지 않는 시대에 종이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콘테스트를 통과해야 작가가 될 수 있다니, 정말 우습죠?"
내가 말했다.
"유럽에서는 어떨지 잘 모르지만 호가 신춘문예에 됐다고 하니까 요즘 아티스트라기보다는 이제는 사라진 중세 시대의 시인이나 작가 느낌이 난다고 하면 될까요? 그런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와인이나 술 같은 게 있으면 그렇게 번역하면 잘 맞을 것 같아요. 이탈리아에서 멸치 대신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안주 같은 것도요. 포인트는 '가난하지만 낭만적이고 술 잘 마실 것 같다'는 이미지입니다."
이런 메일과 카톡을 몇 차례 주고받은 끝에, 어차피 이 작가 키트를 읽을 독자들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대다수일 테니 최대한 직역을 하고 주석을 다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이 단편 소설에서 핵심적인 표현인 '서로의 스페어'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이탈리아에서는 '스페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나라가 영어 단어를 참 많이 사용하는구나, 새삼 느꼈다. 사회 문화적인 차이를 느낄 수 있어서 즐거운 경험이었다.
첫 행사는 코릴리아노 궁전 대학 건물의 근사한 행사장에서 성황리에 치러졌다. 사라 쌤의 도움으로 이탈리아어 자막을 입힌 나의 자전적 다큐멘터리 <투 올드 힙합 키드>의 도입부를 함께 감상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돈 안 되는 예술 같은 것을 해서 어떻게 먹고살 거냐는 어머니는 세계 어디에서나 공감을 일으키는 모양이었다.
이날 행사명인 <네모가 되기를 빌고 빈 세모>는 소설집 『아이 틴더 유』에 실린 동명의 에세이를 편집한 나의 이야기였다. 발표문의 골자는 이렇다. 나는 항상 어디에 있어도 내게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은 것처럼 느꼈지만, 그것이 내가 '네모가 되기를 바라는 세모'라서 그런 것 같다고, 그것이 내 운명인 것 같다고. 그러나 네모가 되기를 바라는 네모였다면 더 안온한 삶을 살 수도 있었겠지만, 이야기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매력적이지 않다고. 네모가 되기를 바라는 세모가 더 문학적이라고.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서 좋았다.
2023년 발간된 한국국제교류재단의 '2022 지구촌 한류 현황'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한류 팬 인구는 87만 명이다. 이는 러시아, 튀르키예, 다음으로 유럽에서 세 번째로 높은 숫자이며, 한류 팬이 많기로 유명한 프랑스(43만), 독일(23만), 영국(11만)의 팬들을 합친 것보다도 많은 숫자이다. 한국 언론에서 다룬 다큐멘터리를 통해 프랑스나 영국의 한류 팬이 많다는 것만 알고 있었기에 전혀 몰랐던 놀라운 사실이다.
나폴리 오리엔탈 대학의 한국학과 학생들은 대부분 K팝과 K드라마로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친구들이 많다. 그중에는 한국 문학을 좋아하는 학생도 있었다. 석사생인 안나 소피아는 최진영 작가님의 『해가 지는 곳으로』를 영어판으로 읽고 팬이 되었다.(아쉽게도 이탈리아어판은 아직 없었다) 나도 최진영 작가님의 팬이라며 팟캐스트 '문장의 소리'에서 최진영 작가님과 함께 녹음을 한 모습을 보여주자 아주 좋아했다.
내가 머무르는 기간에 마침 황석영 작가님이 나폴리에 방문하셔서 『한씨연대기』를 번역한 안드레아 교수님과 함께 행사도 하고 사인회를 가졌다.(안드레아 교수님은 활발히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계시다. 김영하, 배수아, 이문열, 장강명, 황석영 작가의 책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하셨고, 곧 번역하신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도 이탈리아에 출간될 예정이다) 학생들은 행사들에 큰 관심을 갖고 참여했다. 한국 문화와 한국 문학에 큰 관심을 보이는 이탈리아 학생들을 보니, 이전에는 내가 전혀 가늠하지 못했던 독자층의 저변이 넓어진 기분이었다. 사라 쌤이 이탈리아에서 『아이 틴더 유』 정식 출간을 위해 출판사의 문을 두드려 본다고 했다. 성사된다면 무척 기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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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건
2020년 장편 소설 『GV 빌런 고태경』을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소설집 『아이 틴더 유』를 출간했다. 다큐멘터리 <투 올드 힙합 키드>와 극영화 <사브라>, <메이트>를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