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건의 집돌이 소설가의 나폴리 체류기] 등가 교환의 법칙
제4화. 고통으로 얻은 행복
세계는 딱 한 가지 말밖에는 하지 않는다. 흥미를 끌고 나서는 싫증 나게 한다. 그러나 끝내는 집요한 고집으로 이기고 만다. 세계는 언제나 옳다. (2023.04.25)
이탈리아 나폴리에 3개월간 머무르게 된 INTJ 소설가는 90일 동안 나폴리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까? 격주 화요일 <정대건의 집돌이 소설가의 나폴리 체류기>가 연재됩니다. |
"휴, 정신없어."
4주 차가 되자 내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었다. 나폴리가 천국처럼 느껴지고 그토록 행복에 겨운 것은 딱 3주까지였다. 3달간의 해외 레지던스 생활에서 내가 기대하던 것 중의 하나, 고독으로 나를 밀어 넣겠다는 전략은 실패했다. 어느 도시가 매력이 넘치고 마냥 천국과도 같은 이미지로만 남으려면 최대 3주가 적당한 것 같다. 그 뒤로는 '생활'이었다. 그러나 남은 나날이 9주로 훨씬 길었다.
나는 '집돌이 굳이맨'에서 열린 마음으로 모든 제안을 수락하는 '예스맨'으로 지내고 있었다. 나폴리 동양학 대학의 선생님들도 뵙고, 석사생들과 박사생들도 만나고, BRAU 친구들과의 어페리티보도, 나는 무엇하나 새로운 경험을 거절하지 않았다. 너무나 많은 스프리츠와 와인과 페로니(이탈리아 맥주)가 이어졌다. 환대는 무척이나 고마웠지만, 거절을 잘 못하는 나는 중간에 일어서는 것을 어려워했다. 그리고 후회하곤 했다. 이탈리아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집에 간다고 하면 붙잡는 건 마찬가지였다. "건 실망이야..." 하며 누군가 붙잡으면, 나는 붙잡혔다. 그리고 단호하지 못한 나를 싫어했다. 나는 거절에 재능이 없었다. (어쩌면 『미움받을 용기』를 두 번 더 읽어야 할지도...)
불금의 벨리니 광장은 홍대보다 더 장관이었다. 서서 마시는 문화가 발달한 이곳에서, 테이블이 없는 건 이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자리에 일어선 뒤에도, 거리에 서서 페로니 맥주병을 들고 2시간을 넘게 대화했다. 정말이지 수다스러운 이탈리안들!
나는 지쳐갔다. 결국 한국에서도 종종 쓰던 마법의 문장, "제가 마감이 있어서..."를 시전하기 시작했다.(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그것은 영어로 "아이 헤브 어 데드라인"이었고 'Deadline'이라는 그 어감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어서 집에 가서 혼자 카뮈를 읽고 싶었다. ebook을 몇 권 담아오긴 했지만, 실물 책은 오로지 카뮈의 산문집을 들고 왔다. 지중해에 대한 예찬이 담긴 카뮈의 에세이를 지중해에서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시카는 나폴리 앞바다가 지중해가 아니라 '티레니아해'라고 정정해 주었다. 좀 로망이 깨지는가 싶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지중해가 맞다. 카뮈의 산문집 『결혼, 여름』을 읽고 있는데 이런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는 딱 한 가지 말밖에는 하지 않는다. 흥미를 끌고 나서는 싫증 나게 한다."
만물은 변화하고, 형체 없는 사람의 마음은 더욱 그러하다. 페기 리의 노래 'I don’t want to play in your yard'가 떠올랐다. 'I don’t like you anymore' 이 가사는 세상의 모든 슬픔을 축약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폴리에 대한 흥분은 벌써 잦아든 것일까. 마냥 행복하던 나의 마음은 왜 변한 것인가?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것일 수도 있었다. 다른 것은 모두 좋았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소음, 매연, 추위, 와이파이 문제였다.
소음, 그렇다. 나폴리의 특산품이라면 바로 그 정신 사나운 소음이다. 이곳에서 일주일을 보낸 뒤에는 누구라도 고요의 소중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어차피 아무도 신호를 지키지 않는 차도를 건널 때뿐만 아니라, 좁은 골목을 걷고 있을 때도 끊임없이 오토바이와 차들이 경적을 울려대며 지나갔다. 긴장, 또 긴장해야 했다. 그렇게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예민해져 있는 탓에, 숙소에 돌아오면 피곤해서 9시, 10시면 퓨즈를 뽑듯이 잠이 들었다. 예로부터 수많은 저자들이 산책이야말로 깊이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좋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나폴리는 안 좋은 교통편 덕에 많이 걷기는 했지만, 사유를 하기에 좋은 도시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음악 소리, 개 짖는 소리, 비행기 소리, 사람들의 끝 없는 파도, 특히나 번화한 스파카 나폴리나 톨레도 광장의 인파 속에서 휩쓸려 걷다 보면 혼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한국에서도 절대로 가지 않을 곳이라면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백화점 지하의 푸드 코트다.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나면 정말 정신이 사나워서 음식이 코로 들어갔는지 입으로 들어갔는지 식사를 제대로 한 것 같지 않았다. 소음들에 시달리보니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숙소에서조차 비행기 소리와 차 소리는 너무 컸고, 밤 열두 시가 가까워오면 도시 어디선가 대포 소리 같은 폭죽을 터트려 댔다.(대부분은 축구팀의 승리 때문이었지만, 마약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라는 소리를 들었다) 소음이 몸에 새겨지고 있었다. 이 도시 어디에서도 소음으로부터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 도서관의 구석 자리에 앉아 있으면 큰 행복을 느꼈다. 도서관이 닫는 시간은 곧 험난한 소음의 파도 속에 다시 몸을 던져야 하는 시간이었다. 인간은 어찌하여 이렇게 만들어진 걸까.
'인간은 이런 경험을 해봐야 아무 소음 없는 집에서의 평화가 얼마나 귀한지 알고...'
'인간은 돈을 내야 비로소 운동을 하고...'
'인간은 어리석고...'
인간은... 참 재미있다.
나를 힘들게 하는 두 번째는 매연이다. 수많은 차들과 오토바이에서 뿜어 나오는 매연에 더해져, 빵 가판대 앞의 점원도, 유아차를 모는 부모들도 자연스럽게 담배를 피워 댔다. 한국에서 나는 간접흡연에 대해 엄격한 사람이지만, 모두가 당연히 여기는 이곳에서 그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세 번째로 추위가 더해졌다. '남부의 미항'하면 떠올리는 좋은 날씨보다는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가 이어졌다. 길은 언제나 질척였고 잘 포장되지 않은 돌바닥에서 물이 튀어 올라 신발이 젖는 일이 잦았다. 한국은 일찍 봄이 찾아왔다는데 나폴리는 오히려 한국보다 더 기온이 낮았다. 숙소 주인 안나가 두꺼운 이불을 내주었지만, 1700년대 지어진 유럽의 건물들은 기본적으로 추웠다. 비가 오더라도 종일 오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 소나기였다. 우산을 챙겨오지 않은 내게 우산 장수가 다가왔지만, 금방 해가 쨍해지리라는 것을 아는 나는 그를 무시했고, 그제야 비로소 내가 뜨내기 여행객이 아니라 유러피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기다 마침 숙소와 도서관의 와이파이가 말썽을 부렸다. 나는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좋은 숙소란 무엇인가? 난 솔직히 인테리어 따위는 조금의 관심도 없다. 따뜻한 방, 핫샤워, 흔들리지 않는 책상과 의자와 와이파이 그것이면 되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네트워크 고장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어느 날은 폰이 안 되고 노트북이 되고, 어느 날은 그 반대였다. 게다가 다른 친구들은 멀쩡하게 되는데, 내 노트북만 와이파이 문제를 일으켰다. 나는 뭐 달리 건드린 게 없었다. 이건 정말 현대인의 카프카적인 고통이다. 온갖 방법을 써 봤지만 해결할 수 없었다.
물론 행복했지만, 놀라움과 새로운 것에 대한 흥분은 잦아들고, 소음과 매연과 석회수로 인해 내 건강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소음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이 도시의 매연을 들이키고 있노라면, 매일 먹는 맛있는 음식, 내가 맛보는 행복과 나의 돌이킬 수 없는 건강을 맞바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등가 교환의 법칙은 이곳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아무 고통도 없이 행복을 얻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혼, 여름』에서 인용한 문장에 ("세계는 딱 한 가지 말밖에는 하지 않는다. 흥미를 끌고 나서는 싫증 나게 한다."), 카뮈는 곧바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덧붙인다.
"그러나 끝내는 집요한 고집으로 이기고 만다. 세계는 언제나 옳다."
과연 그러할까. 5주 차에는 동양학 대학의 한국학과 학생들과 만나는 첫 행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추천기사
관련태그: 채널예스, 예스24, 정대건의집돌이소설가의나폴리체류기, 나폴리, 결혼여름
2020년 장편 소설 『GV 빌런 고태경』을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소설집 『아이 틴더 유』를 출간했다. 다큐멘터리 <투 올드 힙합 키드>와 극영화 <사브라>, <메이트>를 연출했다.
14,310원(10% + 5%)
14,310원(10% + 5%)
7,920원(10% + 5%)
12,700원(0% + 5%)
12,700원(0%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