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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건의 집돌이 소설가의 나폴리 체류기] 왜 나폴리에 왔나?

제2화. 굳이, 해보려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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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나는 예스 맨이라기보다는 '굳이 맨'이었다. 가령, '굳이 비싼 돈을 내고 힘들게 서서 공연을 볼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금방 집에 가고 싶어질 텐데 내가 굳이 술자리에 갈 필요가 있을까?', '내가 그걸 왜? 굳이?' (2023.03.28)


이탈리아 나폴리에 3개월간 머무르게 된 INTJ 소설가는 
90일 동안 나폴리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까? 
격주 화요일 <정대건의 집돌이 소설가의 나폴리 체류기>가 연재됩니다.


앞으로 머무르게 될 숙소 나폴리의 비밀 정원

집을 나서자마자 고난은 시작되었다. 생에 처음으로 끌어보는 30인치 캐리어 손잡이 두 개가 공항 가는 길에 뚝 하고 부러졌다. 불길한 전조였다. 바퀴까지 문제가 생기면 정말 큰 일이었으므로 턱이 있는 곳에서는 몸을 숙여 23킬로그램 캐리어의 몸통을 번쩍 들어야 했다. 엉덩이가 평면이 되어버리는 느낌이 드는 14시간의 비행 동안 1시간도 잠들지 못했고, 밤 11시에 도착한 나폴리에는 비가 내렸다.

늦은 밤인데도 공항에는 사라 선생님(이하 사라 쌤)이 한글로 내 이름이 쓰인 팻말을 들고 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다. 이미 카톡으로 단편 소설 「아이 틴더 유」의 이탈리아어 번역에 대해 몇 차례 질문과 답을 주고받으며 친밀감이 생긴 상태였다. 숙소는 공항에서 가까웠지만 캐리어 고장에 비까지 내려서 사라 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이탈리아 여행자가 마피아를 걱정하는 것은, 일본 여행자가 야쿠자를 두려워하는 것이나, 한국 여행자가 조폭을 무서워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듣긴 했지만, 늦은 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인적이 드문 주황빛 도로는 영화 <시카리오>에서 무서운 도시로 진입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내가 머물게 된 숙소는 'Il Giardino Segreto'라는 곳으로 영어로는 The Secret Garden, '비밀 정원'이라는 뜻을 지닌 곳이었다. 피곤으로 무척 지친 내게 주인인 안나는 내일 아침 숙소에 대한 브리핑을 해주겠다고 했다. 모든 게 낯설고 어둑했고 정신이 없었다. B&B가 Bed&Breakfast의 약자라고 생각한 나는 조식에 관해 물었고, 만난 지 5분도 되지 않아 안나에게 내 볼을 꼬집혔다. 안나는 당황한 내게 더 이상 B&B로 운영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며, 나폴리 사람들은 짓궂은 농담을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방은 사진으로 본 것보다 넓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추웠다. 라디에이터는 작동하지 않는 듯했고 와이파이는 터지지 않았다. 나는 추위에 무척 약한 편이다. 역시 전기장판을 가져올 것을... 껴입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비행하는 동안 모처럼 14시간의 디지털 디톡스는 좋았으나, 숙소에 도착하자 인터넷이 절실했다. 나는 3개월간 세속을 떠나 템플 스테이를 하러 온 것은 아니었기에 걱정이 됐다. 아무리 껴입어도 너무 추워서 '집 나오면 고생'이라는 말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왜 따뜻하고 초고속 인터넷이 깔린 내 방을 두고 이 고생을 굳이...

다음날, 뜨거운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안나의 비밀 정원을 두 눈으로 마주했다. 거대한 야자수가 눈에 들어왔고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안나는 이 숙소가 녹지가 그다지 많지 않은 나폴리에서 정말로 독특한 오아시스라고 했다. 1700년대 지어진 폐허 수준의 건물을 사들여 가꿔낸 안나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비밀 정원에는 온갖 새소리가 들려오고, 강아지 디아나가 혹시나 먹을 것을 주려나 싶어 다가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가끔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레몬 나무에는 레몬이 가득 매달려 있고 바람이 불면 야자수 잎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곧 봄이 오고 꽃이 피면 더 환상적인 정원이 될 거라고 안나는 말했다.

내가 지난밤의 고생에 대해 말하자, 안나는 와이파이를 해결해주고 두꺼운 이불을 내주었다. 안나에게 모카포트 사용법을 배웠고, 나폴리 커피 브랜드인 킴보를 함께 마셨다. 지중해의 태양처럼 강렬한 남부의 맛이었다. 지난밤의 추위와 의혹과 불안이 눈 녹듯 사라졌다.

"정, 왜 나폴리에 왔나?"

안나가 물었다. 앞으로도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게 던지는, 내가 마주할 질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12주간 답을 찾아야 할 물음이기도 했다. 왜 나는 이곳에 굳이 왔는가? 나는 안나에게 대답했다.

"이전에는 해보지 않던 것을 해보려고 왔습니다. 이전에 보지 못한 풍경을 보고, 이전에 먹어보지 못한 맛을 느끼고,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노래를 듣고, 이전에 알지 못하던 사람과 대화를 나누려고 합니다."

여태껏 나는 예스맨이라기보다는 '굳이맨'이었다. 가령, '굳이 비싼 돈을 내고 힘들게 서서 공연을 볼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금방 집에 가고 싶어질 텐데 내가 굳이 술자리에 갈 필요가 있을까?', '내가 그걸 왜? 굳이?'

내가 애초에 이런 사람이었던 것인지, 불안정한 프리랜서의 길을 걷게 되면서 이런 식으로 사고하기 시작한 것인지 이제는 헷갈린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아직은 1인분의 사람이 되지 못했으니 내게는 사치'라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행복을 미루면서 살았고, <GV 빌런 고태경>에서 '내가 비용이 들지 않는 인간이었으면 좋겠다'라는 대사를 쓰기까지 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인색한 것은 시간이었다. 늘 혼자 지내며 외로워하면서도 사람들을 만나면 금방 내 시간을 확보하고 싶었다. "이전에는 안 해보던 일을 하려고 왔습니다"는 내게 다른 말로 하면 이런 말이었다.

"굳이 비용이 드는 일을 해보자. 굳이 시간을 들여보자."


코릴리아노 궁전 나폴리 동양학 대학교 도서관

첫 주는 나폴리 관광객 모드이자 적응 기간이었다. 안드레아 교수님과 사라 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가이드를 자원한 대학원 석, 박사생들을 만나 나폴리 명소를 다녔다. 나는 이국적인 풍경의 비좁은 골목마다 감탄하며 카메라를 들기 바빴다. 도시 전체가 궁전, 수도원 등 유적 같은 곳인데도 어디에나 그라피티로 가득했다.

나폴리가 '세계 3대 미항'이라고 하는 데에는 선뜻 동의가 되지 않았다. 매우 시끄럽고, 도로는 울퉁불퉁하고, 개똥과 지저분한 쓰레기들이 널려 있었다. 좁은 골목길에서 사람을 칠 것처럼 지나가는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만들어내는 매연과 소음들, 아무도 지키지 않는 신호등, 모든 것이 혼돈투성이인 곳. 나폴리에 룰이 하나 있다면, 그건 '노 룰(No Rules)'이라고 했다. 릭샤와 소가 다니지 않는다는 것뿐 여러모로 15년 전에 다녀온 인도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곳의 대학은 한국처럼 캠퍼스라는 공간 개념이 따로 없다는 게 신기했다. 대학에서 사들인 도시 곳곳의 궁전, 수도원 등의 건물에 강의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중 내가 연구실을 제공받은 코릴리아노 건물은 16세기에 지어진 귀족의 궁전이었다. 코릴리아노 궁전의 웅장한 도서관은 무척 좋았지만 너무 일찍, 오후 2시면 문을 닫았다.

다행히 한국의 무형 문화재를 공부하는 박사생 제시카의 도움으로 BRAU라는 인근의 인문학 연구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다. 창 너머로 베수비오 화산과 바다 건너 소렌토가 보였다. 노트북과 책상과 의자만 있으면 어디에서라도 글을 쓸 수 있는 게 작가라지만, 레지던스에 머무는 기간이야말로 본분을 상기하게 된다.

'너는 글을 쓰는 작가다. 글을 쓰라고 이런 좋은 경험을 제공받는 것이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BRAU 인문학 연구 도서관

나는 예측 가능한 것을 좋아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노력만큼 얻어 가는 일을 했다면 (그 일이 무엇일진 몰라도) 그 일을 무척 성실하게 수행했을 것이다. 애초에 군 생활로 소방서에 가서 수많은 죽음들을 체험하지 않았더라면 불안정한 길인 영화를 해보겠다고 무모하게 덤비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느덧 인생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 나는 소설가가 되었고, 역시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나폴리에 와 있다.

첫 주의 적응 기간 동안, 나는 이곳에서 이전 같으면 하지 않았을 무언가를 '굳이' 했다. (이전 같으면 가지 않았을) 지하 터널 어둠 속에서 열리는 네오 클래식 공연을 감상했고, 현대 미술관을 관람했다. 한국에서도 하지 않던 필라테스에도 등록했다. 덕분에 새로운 경험을 하고, 굳이 해보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들을 만났다.

'굳이 맨'의 '굳이'에는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다는 오만한 태도가 내재해 있었다는 걸 새삼 느꼈다. 4k 화질의 나폴리 브이로그를 아무리 본다 한들 이런 도서관을 이용하게 될 줄은 몰랐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박사 과정 친구들과 앞으로 어울리게 될 줄도 몰랐다. 이곳을 매일 이용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폴리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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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정대건

2020년 장편 소설 『GV 빌런 고태경』을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소설집 『아이 틴더 유』를 출간했다. 다큐멘터리 <투 올드 힙합 키드>와 극영화 <사브라>, <메이트>를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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