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달에 두 번, 달에서 전화가 내려오는 마을이 있다. 저승과 연결되는 시간은 단 18분. 과연 당신은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 『달에서 내려온 전화』는 판타지 소설답게 기발한 상상력을 선보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에 단단하게 발붙이고 서서 우리네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관조한다. 여기에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이 더해져, 정말 어딘가에 펄랭이 마을 사람들이 살아 숨 쉬고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사장님으로 그려지는 염라대왕과 민원에 시달리는 저승차사가 등장하는 등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저승세계를 구경하는 건 덤. 글지마 작가를 만나보았다.
2권의 에세이는 물론, 소설 단편집을 출간하신 적도 있지만 장편 소설을 쓰신 건 처음이에요. 집필에 앞서 다양한 소재를 고민하셨을 것 같은데, ‘한국형 저승 판타지’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제 유년시절은 판타지 소설로 꽉 차 있었답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 『헝거 게임』, 『트와일라잇』 등 그야말로 환상적인 외서로 넘쳐났던 시기였죠. 그러면서도 내심 ‘한국 소설들은 왜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그러다 성인이 되면서 한국사에 관심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관련 책을 많이 읽게 되었죠. 장편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먼저 떠올려보았어요. 그렇게 애정이 깃든 소재들을 버무려 탄생한 것이 한국형 저승 판타지 소설인 『달에서 내려온 전화』예요.
달에서 내려오는 전화줄이라든지, 죽음을 신청할 수 있는 저승 서비스, 민원에 시달리는 저승차사나 사장님으로 묘사되는 염라대왕 등 설정이 참신합니다. 그런데 또 배경은 굉장히 현실적이에요.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시나요?
소설 설정이 참신하다는 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아요. 저는 판타지 소설이 현실에 바탕을 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늘을 바라보고 있더라도 발은 땅에 붙어 있어야 한달까요? 지나치게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오히려 공감도 안 되고 흥미를 잃어버리기 십상이거든요. 사실 우리의 일상은 조금만 비틀어도 재미있어져요. 흔히 ‘공상’이라고 말하는 것들이죠.
펄랭이 마을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왕왕 들어요. 그건 아마 2020년 겨울, 제가 실제로 방문했던 어떤 지역을 떠올리며 소설을 썼기 때문일 거예요. 경사가 가파른 산속을 운전하던 순간이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눈 내린 시골 풍경이 참 아름답더라고요. 그때의 광경이 제 마음을 강렬히 사로잡았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런 단순한 행복과 가벼운 감탄은 방문객일 때만 느끼는 게 아닐까?” “실제로 교통이 불편하고, 인프라도 구축되지 않은 시골에 내가 살고 있다면 느끼는 애로사항은 무엇일까?” 이런 의문을 품게 되면서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가미됐던 것 같습니다.
아이디어 이야기로 넘어가자면, 영감은 정말 모든 곳에서 받아요. 예능을 볼 때나 새로운 장소를 방문할 때, 심지어 잠들기 직전에도요. 그때그때 메모장에 적어두고 추후에 소설 흐름에 맞춰서 하나씩 꺼내어 쓰는 편이에요. 참 신기한 건 새로운 소설을 써야겠다 싶어 컴퓨터 앞에 앉는 순간이면, 곳곳에서 수집했던 아이디어가 툭하고 튀어나와요. 나는 주인공의 이름도 모르는데 그 친구의 성격, 취향, 문제를 대하는 태도 등등은 이미 알고 있어요. 언제 결정된 건지 작가인 저조차 의아할 정도로 명확하게. 이러한 경험은 매번 신기하면서도 익숙해요.
소설에는 폭언에 못 이겨 저승줄을 탄 경비원이나 의붓아버지의 폭행으로 사망한 어린아이의 이야기 등, 사회의 부조리한 일들이 날카롭게 서술되고 있어요. 이를 통해 들려주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다면요?
사람들은 세상일에 ‘나’를 대입해보는 경향이 강하다고 생각해요. 내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지만, 아니라면 그만큼 무관심하죠. 그게 인류가 세상을 이해해온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이야기에 관심이 생긴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냈을 당시의 일인데요. 한 번은 다리를 삔 적이 있어요. 캠퍼스 안에는 횡단보도가 몇 개 있었는데 평소에는 그 길이에 비해 보행신호가 ‘필요치 않게’ 길다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불편한 다리로 10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20초 안에 건너려고 하니 그게 진정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생소한 절망감이었어요.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몸이 불편한 이들에게는 신호등의 초록불 시간이 짧을 수 있다는 뉴스는 익히 들어왔지만, 몸소 다쳐본 다음에야 비로소 ‘내 문제’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요. 그때 생각이 크게 변한 듯합니다. 세상의 기준은 다수가 아닌 소수, 비장애인이 아닌 장애인에 맞출 필요가 있다고요.
독자분들도 이 책을 읽으면서 간접적으로나마 이런 경험을 해 보시길 바랐습니다. 세상에는 이토록 다양한 상황의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다 보면 모두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제가 보낸 신호에 응답할 테고, 내 소설은 그걸로 의무를 다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대부분의 등장인물에 마음이 쓰이지만, 저는 유독 주요비에게 눈길이 가더라고요. 요비의 부모님이 왜 전화줄을 내리지 않았는지도 궁금해지고요. 작가님이 가장 마음이 갔던 인물, 혹은 애정을 쏟은 인물은 누구인지 궁금해요.
누구나 그럴 때가 있잖아요. 누가 봐도 잘못된 판단인데, 무엇에 홀린 듯 나의 비이성적인 주장이 너무도 옳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실수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고, 그 대가는 너무 컸던 거죠. 결국 아이만 이승에 남겨둔 게 미안하고 후회돼서 요비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도 매 순간 참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가장 마음 가는 인물은 ‘한봄’입니다. 주인공에게 더 애정이 가는 건 작가 입장에서 어쩔 수 없네요. 일반적인 사람은 가까운 지인 혹은 반려동물의 한 번의 죽음만으로도 평생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잖아요. 한봄은 자신을 스쳐간 생자의 영혼만큼 상처를 받았을 테죠. 그래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점점 메마른 성격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종의 방어기제죠.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애잔할 수밖에요.
작가가 아닌 개인으로서 가장 감정 이입을 많이 했던 인물은 ‘권은경’이었어요.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성인이라면 무릇 강요받는 것들이 있잖아요. 대학 입학과 원만한 졸업. 힘든 취업 이후 몇 번의 연애 경험. 종내 결혼. 제가 그 틀에서 처음 벗어났던 순간, 큰 상실감을 느꼈던 게 기억나요. 다수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소외감, 뒤처졌다는 자괴감. 권은경의 이야기를 쓸 때는 그때의 제 경험을 떠올리곤 했어요.
『달에서 내려온 전화』는 텀블벅을 통해 먼저 독립출판했던 책이죠.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도 펀딩률 576%를 기록하고 ‘에디터 PICK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에 선정되는 등 성공리에 펀딩을 마치셨다고요. 비화가 있을까요?
사실 『달에서 내려온 전화』는 이전 3권의 출판물과 달리 크라우드 펀딩 오픈 때부터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물론 감사한 일이지만, 예상치 못한 빠른 성공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래서 원고나 디자인, 인쇄 부분에서도 이전에는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들에 도전하며 다방면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여드리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책의 물성으로 따지자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내지가 가볍게 넘어가며, 그 재료는 자연에 최소한의 해를 끼치길 바라며 친환경 종이를 썼었어요. 그리고 책의 표지가 소설의 분위기를 잘 반영할 수 있게 디자인을 단순화하고자 노력했었죠. 아, 소설이 재미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이고요. 이 모든 과정을 홀로 소화하기 힘들었지만 “독자들이 내 책을 기다리고 있어!”라고 생각하며 버텼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책을 쓰고 싶으신가요?
책을 다 읽고도 인물들의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한 소설을 쓰고 싶어요. 또 문득 떠오른 소설 속 어떤 장면 때문에 다시 꺼내보고 싶은 책을 만들고 싶고요.
차기작으로는 두 작품을 생각하고 있어요. 하나는 『숲의 엑스』란 작품이에요. 3권의 시리즈로 구상 중이라, 장편 판타지 소설이 되겠네요. 사실 『달에서 내려온 전화』 이전에 내고 싶었던 책이지만, 워낙 장편인지라 단행본을 먼저 경험하고 시리즈물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순번을 넘겼었답니다. 다른 하나는 7명의 남녀가 동거하며 생긴 다양한 일화를 담은 소설입니다. 『숲의 엑스』를 끝마치고 쓸 텐데 그러면 2026년쯤 돼 있을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는 독자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면요?
저는 해일처럼 덮쳐오는 크고 작은 고비들을 넘기기만 한다면 더 멋진 나를 마주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고통을 소화한답니다. 풍랑을 견디고 나면 너울성 파도쯤은 거뜬히 넘길 수 있는 회복탄력성 높은 어른이 되는 거죠. 내가 생각하는 ‘나’는 나약하지만, 내가 모르는 ‘나’는 의외로 강할지도 모른답니다. 그러니 완전한 타인인 제가 믿는 만큼만이라도, 여러분들 스스로가 내 삶은 소중하며 그것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길 바랍니다.
*글지마 ‘글쓰기를 멈추지 마’라는 의미를 담은 필명이다. 좋은 소설을 쓰는, 참 독한 작가를 꿈꾼다. 2017년 독립출판 클래스 수강을 계기로 현재는 4권의 책을 낸 작가다. 매주 금요일이면 네이버 오디오클립 ‘크래커스 북’을 통해 독자와 청취자를 만나고 있다. 출간한 책으로는 유학 에세이 『미국 로망 깨기_교환학생 편』, 여행 에세이 『불친절한 여행 에세이_미국 편』, 단편소설집 『유럽 단편집』, 그리고 첫 장편소설 『달에서 내려온 전화』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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