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자 한승훈의 '신화의 질문' 칼럼이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신화를 새롭게 읽으며, 인류의 흥미진진한 질문과 만나 보세요. |
루마니아 출신의 소설가이자 종교학자인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한국에서도 가장 저명한 신화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DC코믹스의 간판 히어로인 슈퍼맨에 대해 언급한 일이 있다는 사실은 아마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1963년에 발간된 『신화와 현실』에서 그는 현대의 대중예술 속에 신화의 구조가 “위장한” 채로 남아 있다는 예로 히어로만화를 들고 있다. 그에 의하면 만화 속 히어로들은 “신화나 민속의 영웅들을 현대판으로 나타낸” 결과다.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평소에는 소심한 저널리스트 클라크 켄트로 살고 있는 슈퍼맨은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는 영웅의 겸허한 위장”이라는 신화적 주제를 전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속에서 신화적 사고나 기능이 사라지는 일은 없다. 그것은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근대 민족주의는 공동체의 “신성한 기원”을 찾으려 하는 신화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고통 받는 의인들(오늘날의 프롤레타리아트)이 세계의 존재 양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말론적, 천년왕국론적 신화들의 후계자다. 나아가 엘리아데는 비록 현대 소설의 경향이 신화적 소재를 꺼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구조를 해부해 보면 우리는 여전히 세속적인 형태로 위장된 신화적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아마도 그는 신화적 소재를 전면적으로 내세운 장르문학이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대중문화를 휩쓸 것이라고까지는 예견하지 못한 듯하다. J. R. R. 톨킨으로부터 비롯되어 C. S. 루이스, J. K. 롤링으로 이어진 영국 판타지 문학의 세계적인 유행은 엘프, 드워프, 오크, 고블린, 드래곤이 등장하는 영웅 서사시를 현대에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이들은 북유럽신화, 켈트신화, 그리스신화, 히브리신화 등의 전통적인 소재와 주제를 활용하면서도 신화적 상상력이 제한 없이 발현될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을 설정했다. 톨킨의 “가운데땅”과 루이스의 “나니아”가 대표적이다. 이들 세계가 더욱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 잡게 된 데에는 할리우드의 자본과 기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영화는 꿈과 상상 속에 존재하던 신화 세계를 감각적으로 현실화해 주었다. 이제 사람들은 전문적인 종교적, 문학적 훈련 없이도 환상 속 영웅들의 모험을 자신들의 것처럼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현대 신화 가운데에도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는 특출난 면이 있다. 이 세계의 마법사들과 신비한 동물들은 별도의 가상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 속에서 활약한다. 이들은 평범한 인간들(머글, 노마지)과 공존하고 있지만 마법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의 이면에서 활동한다. 현실과 상상을 같은 세계 속에서 중첩하게 하는 설정은 고전 신화의 문법에도 잘 들어맞는다. 많은 신화들은 오늘날의 세계가 형성되기까지 신들과 영웅들의 활약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리고 왜 지금은 그들의 직접적인 개입이 좀처럼 없는 것처럼 보이는지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중들에게 가장 생명력 있는 신화로 기능하고 있는 이야기는 엘리아데가 언급한 슈퍼히어로 장르다. 오늘날 이 분야의 양대산맥인 마블과 DC는 수십 년간 축적된 경전(코믹스)을 바탕으로 구축된 통일된 세계관 위에서 영화 시리즈를 제작하고 있다. 대단히 적절하게도 이 프렌차이즈 세계관은 “유니버스”라고 불린다. 이 세계는 현실 세계와 많은 점에서 닮았지만 몇몇 세부사항(특히 초인들의 존재 여부)에서 차이를 보이는 평행우주다. 오늘날 가장 성공한 대중문화 콘텐츠인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는 개별 영웅들의 이야기를 하나의 거대한 서사 속으로 엮어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특히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들이 팀을 이루어 거대한 적에 맞서는 <어벤저스> 시리즈는 이아손, 메데이아, 헤라클레스, 테세우스, 오르페우스, 아탈란테 등의 영웅들을 하나의 “배”에 태운 아르고 호 원정 서사시의 현대판이다.
20세기 말의 포스트모던 사조는 가상현실의 부상을 예측했다는 점에서는 옳았지만, 거대 서사가 붕괴할 것이라 보았다는 점에서는 틀렸다. 현대의 창작 신화는 현실 사회에서는 반쯤 냉소의 대상이 된 정의와 악의 투쟁, 세계의 구원과 같은 이야기를 현실과 겹치는 가상 세계 속에 구현하고 있다. 여기에 추가된 현대적 주제들(억압과 저항, 대안적인 가족, 다양성에 대한 관심 등)은 그런 서사들이 진부해지는 것을 막으면서 비상한 생명력까지 더한다. 더구나 이 이야기는 첨단 기술과 거대 자본이라는 매개를 통해 지구적으로 공유된다. 이렇게까지 광범위한 사람들이 “믿는” 신화는 역사적으로도 드물다. 사람들은 여전히 신화를 듣고, 말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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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훈(종교학자)
digidab
2021.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