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현대미술관(MoMa)은 드물게 사진 찍는 것을 허락하는 미술관이다.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앤디 워홀 같은 대형작품들을 다 젖히고 언제나 인증샷을 찍으려는 긴 줄이 서 있는 작은 작품이 하나 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다. 나이도 국적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또 각자의 이유로 기쁨의 표정을 짓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면 고흐는 얼마나 좋아했을까? 아마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단 한 명의 화가를 뽑는다면, 그건 단연코 빈센트 반 고흐다. 예술을 잘 모르는 초보자들도, 데리다 같은 세계적인 철학자들도 고흐에 관해서라면 모두 한 마디씩은 말해 볼 수 있다는 예술가니 말이다.
세상을 떠난 지 11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고흐에 입덕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그 중 몇몇은 인생이 바뀐다. 저마다의 관점에서 고흐를 자기 안에 오래 묵혀서 색다른 해석을 더하다 보니, 어떤 이는 노래를 부르고, 어떤 이는 영화를 만들고, 어떤 이들은 책을 쓴다. 덕분에 고흐에 관한 책들은 끊이지 않고 발간된다. 고흐와 책을 동시에 좋아하는 나 역시 “또 고흐 책이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식지 않는 궁금증으로 새로 나온 책들을 읽는다. 근래 발간된 책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마리엘라 구쪼니의 『빈센트가 사랑한 책』이다. 이 책은 우선,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깊은 편견에 사로잡혀 반 고흐를 대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하게 한다. 고흐의 삶과 작품을 그가 읽었던 책과의 관계에서 설명해가면서, 저자는 삶을 위한 진지한 독서가 반 고흐를 새롭게 조명한다.
살아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기 때문에 고흐의 이미지는 사후에 대부분 만들어졌다. 1947년에 벌어진 일을 예로 하나만 들어봐도 알 수 있다. 파리 오랑쥬리 미술관에서 있었던 대규모 반 고흐 전시를 앞두고 정신과 의사 베르와 를와는 『반 고흐의 악마성』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이들은 고흐가 대단한 천재가 아니라 그저 정신질환자였고 주장한다. 이를 읽고 격분한 극작가 앙토냉 아르토는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사회가 자살시킨 사람 반 고흐』라는 소책자를 쓴다. 여기서 아르토는 반 고흐는 결코 단순 정신착란 때문이 아니라, 천재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자살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논쟁은 그냥 병리학적으로 미친 사람이었든 사회적인 몰이해를 때문에 자살에 이른 사람이었든, 결국엔 고흐가 정상이 아니었다는 이미지를 강화시킬 뿐이었다. 이런 류의 분석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어서 고흐의 그림을 보고 병증을 맞추는 글들은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여기서 조금 나가면 고흐는 가난, 질병, 고독, 몰이해의 역경을 오로지 예술적 열정 하나로 극복한 예술적 영웅이 된다는 휴먼 드라마 풍의 서사가 쓰인다. 과연 그게 전부일까?
1890년 6월, 죽기 한달전에 빈센트 반 고흐는 정신과 의사 가세 박사의 초상화를 완성한다. 1888년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두고 고흐는 동료 화가 고갱과의 다툼 끝에 자신의 귀를 자른다. 이 사건으로 고흐는 더이상 아를에 머물지 못하고, 생 레미를 거쳐 오베르 쉬르 와즈로 향한다. 그곳에서는 미술애호가이자 정신과 의사 가셰 박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늘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초상화를 즐겨 그렸던 고흐는 이번에는 가셰 박사를 그렸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해석은 이 그림의 주인공이 정신과 의사라는 점, 그리고 가셰 자신이 우을증 환자인 듯 오른손에 비스듬히 기댄 멜랑꼬리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는 점, 그의 앞에 있는 디기탈리스 꽃은 당시에는 간질 발작 같은 정신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서 쓰였던 약초라는 점 등을 주로 지적해왔다. 이 모든 것들은 고흐의 정신질환의 숨길 수 없는 증거물이었다. 특히 디기탈리스가 약초로 쓰일 때 나타나는 주요한 부작용이 황시증, 즉 노란색 환영이 보이는 것이 지적되었다.
고흐의 그림에 유난히 노랑색이 많은 이유도 약물 탓이고, 우리 모두가 그토록 사랑하는 <별이 빛나는 밤>의 별들이 그렇게 쏟아질 듯 빛나는 것도 약물 탓이라고 주장이 여기서 뒷받침된다. 살아서도 참 많이 외로웠던 고흐는 결국 이런 섣부른 진단의 홍수 속에서 더 외로워진 것 같다. 그런데 마리엘라 구쪼니의 책은 인간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작품들을, 그리고 무심코 지나쳤던 디테일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준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 작은 디테일이 작품 전체의 다른 해석을 이끌어내는 열쇠가 될 수 있다. 다시 <가셰 박사의 초상화>로 돌아가자. 마리엘라 구쪼니는 다른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던 다른 디테일에 주목하라고 권한다. 고흐는 가셰 박사를 두 번 그리는데, 그중 한 점에는 두 권의 노란 책이 그려져 있다.
이 디테일에 주목해보면 몇 가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풀린다. 실제로 고흐는 여러 병증에 시달렸고, 인정받지 못했고 때로는 길을 잃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의 곁에는 책이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 동생 테오나 여동생 빌레미엔, 혹은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는 일, 그리고 작업을 할 수 없는 시간에 고흐는 책을 읽었다. 물론 술도 마셨다. 남아있는 편지를 분석해보면 네덜란드 사람인 고흐는 4개 국어로 책을 읽었으며 200여권이 넘는 책을 언급하고 있다. 고흐는 실로 엄청난 그리고 매우 진지한 독서가였던 것이다. 비이성적인 광인이 아니라 진지하게 책 속에서 길을 찾는 삶의 독서가였다. 이것이 마리엘라 구쪼니가 보여주는 빈센트 반 고흐의 또 다른 모습이다.
자세히 보면 책에는 화가가 <제르미니 라세르퇴>, <마네트 살로몽>라고 의식적으로 써넣은 제목이 보인다. 19세기 프랑스 문인 드 공쿠르 형제의 책들이다. 화가의 길로 본격적으로 접어들 무렵부터 고흐는 이들 뿐만 아니라 찰스 디킨스, 토마스 칼라일, 빅토르 위고, 플로베르, 에밀 졸라, 발자크, 쥘 미슐레, 피에르 로티, 모파상, 도데, 위스망스, 비처 스토 같은 19세기 문인들의 책을 읽었다. 이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19세기 프랑스 문인들이 열렬히 탐구한 것은 자기 시대의 인간과 삶이었다. 반 고흐는 함부로 도덕적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삶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면서 휴머니티를 추구하는 소설들을 사랑했다. 반 고흐는 이런 문학작품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서 우리가 감동받는 것은 약물 부작용으로 인한 황시증에 걸린 눈이 본 환영 때문이 아니다. 모두가 잠든 밤, 언덕에 홀로 올라가 내려다본 마을에 축복처럼 쏟아지는 별빛, 여전히 잠들지 않고 꿈을 꾸고 있는 한 사람이 평온하게 잠든 세상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따뜻함과 안도감을 우리는 사랑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고흐의 노랑색 사용의 문제도 사실은 고흐의 독서와 연관이 있다는 점을 책의 저자 마리엘라 구쪼니는 정확하게 집어낸다. 당시 여러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책은 바로 샤를 블랑의 『데생, 건축, 조각, 회화의 원리』이다. 이 책에서는 두 가지 이상의 색을 동시에 볼 때 단독으로 볼 때와는 색이 다르게 보이는 현상인 ‘동시대비’ 원리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고흐의 ‘노랑’은 절대 단독으로 쓰이지 않는다. 고흐는 샤를 블랑의 이 책을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읽어 나갔다. 노랑은 반드시 파랑과 함께 사용해서 <별이 빛나는 밤> <밤의 카페>, <노란 집> 같은 잊지 못할 찬연한 장면을 그려냈다.
사실 <가셰 박사의 초상화>도 두 번 그리는데, 두 그림을 비교해보면 노랑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책을 그리지 않은 첫 번째 그림의 붉은 테이블이 너무 도드라져 보인다. 반면 노란색 책이 들어간 두 번째 그림은 빨강, 노랑, 파랑의 색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노랑과 파랑의 동시대비 효과를 실험하면서, 고흐는 “새로운 색채 화가”라는 예술적 목표를 향해서 정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셰 박사의 초상화> 속에 드 공쿠르 형제의 <제르미니 라세르퇴>, <마네트 살로몽>라는 책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 유명한 고흐와 고갱의 불화지점이 무엇이었는 지도 잘 설명해준다.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은 단순한 광기의 폭발이 아니라 오랫동안 두 화가들 사이에 쌓여 있던 예술관이 달랐기 때문에 생긴 불화 때문이었다. 고흐와 고갱은 일찍이 파리에서 만났고, 서로의 재능을 알아봤다. 고흐는 화가들이 무한 경쟁으로 치닫는 대신, 십시일반 서로 도우며 예술에 전념할 수 있는 화가 공동체를 꿈꾸었고, 고갱을 최고의 파트너라 생각했다. 그러나 두 예술가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다른 것을 본인들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 두 예술가의 견해차이를 마리엘라 구쪼니는 고흐가 사랑했던 문인들의 작품과 연관시키면서 좀 더 선명하게 설명해낸다. 『제르미니 라세르퇴』는 노동계급을 배경으로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반영한 소설로, 반 고흐가 특별히 좋아하는 소설이었다. 드 공쿠르 형제, 발자크, 졸라 같은 프랑스 자연주의 소설가들처럼 고흐는 자기 삶에 주어진,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그려낸다. 예컨대 고흐에게는 카페 여주인을 그리는 것은 한편의 소설 같은 그녀의 삶을 그리는 일이었다. 물론 그것은 졸라의 소설처럼 전혀 위대하지 않은 주인공의 굽이굽이 굴곡진 삶을 드러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반면 상징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고갱에게는 눈에 보이는 하찮은 것에 매달리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림은 보이지 않는 세상의 본질을 드러냄이라고 생각한 고갱에게는 평범한 카페 여주인을 그리는 일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러므로 고갱은 주어진 현실을 버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관념을 확인할 수 있는 타히티로의 대여행을 감행했다.
고갱과의 불화 후 고흐가 탐독한 것은 강렬한 개성들이 충돌하고 극적인 파국으로 이어지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었다. 셰익스피어와 렘브란트를 비교하면서 고흐는 ‘인간성’과 연민이라 할 수 있는 ‘다정함’이라는 감정을 읽어냈다. 이는 고흐가 세상을 보는 눈이 확장되는 과정이기도 하고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사실 고갱과의 불화는 고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예술가로서 자기가 추구하는 방향이 옳았는가에 대한 생각은 그림을 그리는 매순간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지금 그의 치료를 담당한 가셰 박사의 초상화 옆에는 다시 드 공쿠르 형제의 책이 놓여 있다는 것은 그가 고갱을 비난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길이 옳았음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리엘라 구쪼니의 지적대로 고흐가 갔던 길은 문학과 미술의 경계를 넘어 한 시대의 정신사를 종합하는 위대한 길이었다. 그냥 농사를 짓는 들판, 봄에 꽃 피는 나무, 빨래하는 아낙네들 등등 삶의 지극히 평범한 소재들을 고흐는 그렸다. 그 평범에 바치는 고흐의 헌신과 열정이 지금도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다. 대상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대상에 대한 느낌이 더 중요하게 되면서 고흐는 표현주의로 연결되는 현대미술의 중요한 선구자가 된다. 또 자신의 예술이 ‘보통 사람들’을 위해서 바쳐져야 한다는 통찰은 이후에 팝 아트로 이어지는 예술개념의 확장을 예감할 수 있다.
고흐는 화가가 되기 전에 미술상이었고, 설교자였다. 하는 일은 달라졌지만 저자인 마리엘라 구쪼니는 말대로 그를 이끈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배우고, 이해하고, 논의하고 최종적으로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나름의 방법을 찾고자 하는 지칠 줄 모르는 욕구”였다. 그리고 그 중요한 방법은 책을 읽는 일이었다. 고흐의 독서는 현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길을 찾는 진지한 독서였다. 책과 고흐를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사람은 책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 보는 법을 배우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하듯 말이다.”라는 고흐의 말을 연필을 꾹꾹 눌러가며 책 안쪽에 써넣어 본다.
*이진숙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루카치의 소설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여행 중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본 작품들에 크게 감명 받아 평생의 업으로 여겨 오던 문학을 등지고 미술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모스크바의 러시아 국립 인문대학 미술사학부에서 말레비치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유학 기간 러시아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세계 각 국 미술작품을 보면서 각별한 감동을 받았고, 이를 다른 이와 함께 나누고자 하는 강렬한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귀국 후 청담동 박여숙 화랑에서 5년간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생생한 미술 현장 경험을 쌓았다. 서울산업대 등에서 미술 강의를 하며 월간 『탑클래스』에 우리 시대 미술가들에 관한 글을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현재는 토털 아트 컴퍼니 ‘인터알리아’에서 아트 디렉터로도 활동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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