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펼쳐진 것처럼 보이는 바다 앞에서 우리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독일의 철학자 군터 숄츠가 묻는다. 바다는 인간을 때로는 매혹하고, 때로는 위협한다. 모험가의 가슴에 미지의 세계를 향한 무한한 상상을 부풀리고, 항해자의 눈앞에 운명의 단두대를 세워 잔혹한 좌절을 불러온다. 다리 달린 육상 동물인 인간은 바다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는 동시에, 몸을 단련해 헤엄치고 배를 만들어 항해함으로써 자유를 이룩한다. 헤겔을 빌려 말하자면, 주어진 자연을 넘어서 자신의 잠재된 가능성을 실현해 가는 것은 인류의 역사이고 정신의 운동이다. 바다를 생각하는 것은 곧 인간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다. 바다가 일으킨 생각의 역사, 즉 ‘바다의 철학’을 들여다보는 것이 곧 ‘철학의 역사’를 훑는 것이자 ‘인간의 역사’를 심층에서 이해하는 것인 이유다.
무엇보다 철학의 고향은 지중해가 아니었던가. 삶의 특정한 형식이 지리와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철학적 사유가 바다를 닮는 것은 당연하다. 주지하듯이 최초의 철학은 지중해의 항구도시 밀레토스의 현인 탈레스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까 말이다. 탈레스는 아르케(arche), 즉 “모든 것의 원인이 되면서 자신은 불변하는 단 하나의 존재”를 “물”이라고 했다. 궁극의 존재를 탐구하는 사유 습관인 철학은 결국 ‘물’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다를 생명의 근원으로 보고, 신적인 성격을 부여한 것이다.
플라톤이 찬양했던 것은 빛이었다. 탈레스와 반대로, 플라톤은 바다를 “신조차 망가뜨려 추해 보이게 만드는, 말 그대로 고통으로 혼탁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이 “오물과 진창”의 세상을 떠나 빛을 향해 도약하는 “아름다운 모험”을 꿈꾸었다. 『법률』에서 플라톤이 바닷가 도시는 장사에 몰두해 돈벌이에 치중하는 탓에 사람들이 정의를 몰각하고 공동선을 무시하는 이기적 장사꾼으로 전락하기 쉽다고 비판하고, 『크리티아스』 와 『티마이오스』 에서 한때의 유토피아였던 아틀란티스를 물속에 가라앉힌 것은 이 때문이다.
이로써 바다에 대한 두 줄기 기본 사고가 형성된다. 근대는 새로운 플라톤들이 승리의 노래를 불러온 시대였다. 플라톤의 ‘아틀란티스’는 바다 너머에 존재하는 미지의 세계를 통해 현실 정치를 빗대어 비판하는 유토피아 소설의 원조가 된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노바 아틀란티스』는 이와 관련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아틀란티스인 벤살렘의 주민들은 유용함이라는 기준에 따라 모든 행동을 결정한다. 이 섬에 있는 아카데미 솔로몬 하우스는 “숨어 있는 자연의 힘”을 파악해서 “인간의 자연 지배를 최대한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바다를 경이와 감탄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와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것, 이것이 근대의 세계관이다. 심지어 베이컨은 『노붐 오르가눔』 에서 철학 자체를 수정한다. “학문의 목표는 인류를 새로운 힘과 발명으로 풍요롭게 해 주는 것”이다. 철학은 더 이상 “만물의 궁극적 근원을 탐색하는 일”이 아니라 “인류 생존에 유용하게 쓰일 자연의 보편 법칙을 알아내는 일”, 즉 과학 이론으로 축소된다.
바다가 인간을 위한 개발과 착취의 대상이 되자 “바다가 누구의 것인가”라는 소유권 문제가 불거진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인도로 가는 항로’의 소유권을 다투기 시작한 것이다. 『파우스트』 에서 괴테는 “전쟁과 교역과 해적질이 아닌,/ 그 밖의 항해를 알지 못한다”고 비판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법철학자인 후고 그로티우스는 “자연 전체를 돈벌이 대상으로 삼으려는 경향에 저항”하면서 “바다는 쓴다고 줄어들거나 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므로 “바다는 사유 재산으로 표시해 사고팔거나 계약을 통해 나눌 수 없다”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정의로운 사람은 공유재산을 모두의 것으로, 사유재산은 자신의 것으로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는 키케로의 정의론을 이어받은 것이다. “지구상에 생겨난 모든 것은 인간이 쓰기 위해 창조되었다. 인간은 서로 함께 살기 위해 태어났으므로 자발적으로 서로 돕는 행동을 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다. 베이컨식 사고가 날뛰는 현대의 탐욕스러운 세계에서 탈레스적 사고를 복원해 바다와 인간의 관계를 다시 세우려는 시도는 이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바다는 인간을 확장한다. 헤겔은 이를 “울타리를 넘어감”이라고 표현했다. 바다와 함께 인간은 좁디좁은 소시민적 인생에서 벗어나는 무한한 해방감을 맛본다. 헤르더는 “배에서는 모든 것이 생각에 날개를 달아” 준다면서 “땅에서라면 좁디좁은 상황 안에 갇혀 죽은 생각이나 붙들고 씨름”했을 자신에게서 탈출하는 기쁨을 찬양한다. 더 나아가 사유가 바다를 닮는다는 것은 신적 질서를 누리는 것이기도 하다. 희랍 사람들은 이론을 테오리아(theoria)라고 했는데, 이 말은 ‘보다’는 뜻의 테오레인(theorein)에서 왔다. 인간으로서 신의 눈을 갖는 것, 즉 유한한 것들의 세상을 높은 곳에서 관조하는 시선을 갖는 것이다. 니체는 이를 “독수리의 눈으로 본다”고 했다. 바다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는 것은 무한의 눈으로, 즉 끝없는 수평선이 상기하는 신적 질서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뜻이다. 헤겔은 말한다. “바다는 이런 식으로 별들의 바다, 은하계를 응집해 놓은, 저 하늘의 별들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바다의 철학을 한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눈으로 이처럼 무한의 감격에 참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에 “강렬한 어머니”인 바다처럼 세계를 볼 수 있다면, 우리 인간은 “세계의 잔혹한 왕, 독재를 일삼는 신”(미슐레)처럼 굴면서 자연을 착취하고 다른 생명을 파괴하는 데 몰두하는 대신에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섬세한 애정”으로 자연과 공생하는 윤리, “모든 사물과 생명체의 권리 공동체”(마이어아비히)를 지탱하는 사유의 기둥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바다의 철학이 미(美)를 향해 기울어지는 것 역시 필연이다. “고요한 가운데 바라보는, 그저 하늘과 맞닿아 있는 맑은 수면, 그러나 광풍이 몰아칠 때면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위협하는 심연의 바다”(칸트)는 마음에 기이한 파문을 불러일으킨다. 아름다움과 두려움이 하나로 뭉쳐진 이 마음을 에드먼드 버크는 ‘숭고’라고 불렀다. 『판단력 비판』 에서 칸트는 이 개념을 한층 발전시킨다. 칸트에 따르면, 바다의 압도적인 힘 앞에 선 인간은 “자신의 왜소함, 무기력함, 유한함”을 깨닫는 한편 “이성적 존재로서 자연으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확신”을 얻는다. 숭고란 ‘초감각적 실체’인 ‘무한’을 마주하는 동시에 이를 이성의 힘으로 내면화하는 것이다. 엘리아데라면 “살아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했을 것이고, 보들레르라면 “순간에서 영원을 생성하는 일”이라고 했을 것이다. 무용성의 예술은 언제나 유용성의 자본주의와 대척해 왔다. 바다에서 신성을 발견했던 고대 철학이 미학의 이름으로 부활한 것도 같다.
군터 숄츠의 항해는 철학사의 시간표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유의 나침반은 문학, 역사, 법, 과학, 기술 등이 이룩한 사유의 자장들로 인해 흔들린다. 플라톤과 호메로스, 칸트와 괴테, 야스퍼스와 카뮈를 넘나들면서 사유의 광물을 캐고, 그로티우스 같은 법학자나 페르낭 브로델 같은 역사가 등이 이룩한 언어의 섬들에 닻을 내리고 바다의 산물들을 탐구한다. 요컨대, 바다는 사유의 역사 전체에 흔적을 남겼고, 인간은 바다의 언어를 빌리지 않고는 생각을 드러낼 수 없었다. 바다의 철학을 들여다보는 것은 인류 사유의 가장 깊은 비밀을 탐험하는 것과 같다.
탈레스에서 시작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베이컨, 칸트, 헤르더,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야스퍼스, 카뮈, 슈펭글러, 칼 슈미트, 블루멘베르크 등을 거쳐 ‘바다의 철학’이 마지막으로 닻을 내린 곳은 ‘생명의 윤리’다. 근대 과학기술이 주도한 ‘문명화 과정’, 바다를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베이컨식 사유는 결국 바다를 거대한 “쓰레기 수프”로 만들어 버렸다. 유토피아가 디스토피아가 된 것이다. 현재 ‘기후 위기’라는 이름으로 임박해 있는 이러한 디스토피아를 무찌르려면, 개인이나 국가를 넘어 인류 전체, 나아가 지구 생태계 전체를 사유하는 ‘관조’가 필요하다. “변화를 거듭하면서 더러워지고 착취당한 바다”에서 인류의 생각을 되돌리기 위한 생명윤리학의 탄생, 즉 새로운 바다의 철학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현재 우리가 최선을 다해 사유의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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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철학군터 숄츠 저/김희상 역 | 이유출판
바다를 철학의 발상지로 보고 철학의 바다를 누비는 특별한 항해를 시도한다. 여러 위대한 철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생각을 ‘바다’를 통해 풀어내며 근본적으로 철학적 사고와 바다가 어떤 관계인지 묻는다.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편집자로 일을 시작해 민음사 대표를 지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한국문학번역원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