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채널예스가 매달 독자분들의 이야기를 공모하여 ‘에세이스트’가 될 기회를 드립니다. 대상 당선작은 『월간 채널예스』, 우수상 당선작은 웹진 <채널예스>에 게재됩니다. ‘나도, 에세이스트’ 공모전은 매월 다른 주제로 진행됩니다. 2020년 2월호 주제는 ‘두 번 만나고 싶은 사람’입니다.
절대 일어나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끌어안았던 살결, 냄새, 온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듯하여 깨어나서도 한참을 웅크리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할머니는 더 이상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질 않는다. 마지막 순간처럼, 얼굴은 무너져 내리고, 한쪽 다리는 펴지 못한 채로. 그래도 꿈속의 나는 할머니의 그런 모습이라도 무조건 남겨놔야 한다는 생각에 카메라를 찾으러 뛰어다닌다.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도록 동영상도 많이 찍어놔야지. 가까운 미래에 인공지능이 더 발달하면 할머니 목소리만으로도 기가지니처럼 대화를 할 수 있다는데, “그랬어?” 한마디만 들어도 좋으니 오늘 있었던 일, 좋았던 일, 속상했던 일 시시콜콜 떠들고 싶은데.
한때는 나의 지나치게 긴 애도 기간이 스스로도 이상하게 생각된 적이 있다. 할머니는 서너 해가 지나도 문득문득 나를 울어버리게 만들었다. 드라마를 보다가도 “할미가 평생 너를 지켜 줄 거야”하는 고두심의 대사에 “하하 지켜준대!”하며 웃다가 오열을 하고 만다. 할머니의 다정한 글씨체로 ‘생일축하’라고 쓰여 있는 봉투를 머리맡 벽지에 붙여놓고 생각날 때마다 쳐다본다. 오래 공부한 시험에 합격했을 때에도, 직장에서 부당한 차별을 당했을 때도, 결혼식을 마치고 호텔 침대에 누워 오늘 누가 왔는지 곱씹어봤을 때도. 나는 늘 할머니를 부르며 엉엉 울었다.
유독 나에게만 가혹하다 느껴졌던 사회생활 속에서 길고 긴 방황을 끝내고자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나의 어린 시절을 되짚어본 적이 있다. 교육 운동 후 해직 및 복직을 거치면서 어린 나의 마음을 돌볼 여력이 없었던 맞벌이 부모님이 집을 비운 동안 두 동생들을 돌봤었다. 나는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퇴근한 부모님 눈앞에 놓인 세 어린아이 중에서는 그나마 사랑을 독차지한 기간이 가장 길었던, 어른스러운 큰 딸이었다.
우리 가족은 주말마다 할머니가 혼자 사는 아파트에 놀러 갔다. 32평 아파트에서 복도까지 들리는 큰 소리로 테레비를 보던 나의 할머니. 두 동생과 부모님이 건넛방에서 잘 때 나를 꼭 안방으로 초대했던 나의 할머니. 세 어린아이 중에서 내가 비로소 특별한 존재가 되었던 그 밤, 할머니는 “이번 주에는 비밀이야기 없었어?” 하며 내 이야기를 궁금해한다.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할머니는 나를 통해 막내딸의 먹고 사는 이야기를 여과 없이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어린 나는 할머니 손을 꼭 잡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탈탈 털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나의 근황(에 숨겨진 엄마의 근황)을 남김없이 할머니께 고해드리고 나면, 나와 할머니 사이에 쌓인 추억 이야기를 사골처럼 우려내기 시작한다. 손을 하나라도 덜기 위해 할머니 댁에 종종 맡겨졌던 나는, 할머니 손을 잡고 할머니가 사는 거성빌라 주민들을 다 꿰고 다녔다.
“ 103호 할머니는 아직도 병원에 다니는 거야?”
“헤보아줌마(아줌마는 헤헤 웃고다니는 나를 헤보라고 불렀다)는 오늘 왜 안 나오지?”
한 번은 빌라의 조그만 놀이터에 있는 유일한 놀이기구였던 그네를 타러 갔는데, 나보다 머리 두 개 정도는 더 큰 오빠들이 한참을 비켜주지 않았다. 한쪽에서 모래를 뒤적이며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데, 이를 창문으로 지켜보던 나의 할머니가 달려 나왔다.
“얘, 너희 거성빌라 사니?”
“아니요”
“여기 친구는 거성빌라 사는데. 여기 거성빌라 놀이터니까 너희 다른 데 가서 놀아. 할머니가 너희 아까부터 계속 탄 거 다 봤어”
그 순간 할머니 아니 나의 잔 다르크 뒤로 부서지는 빛이란. 나는 비록 일주일 뒤에 우리 집으로 돌아가지만, 그래도 (일주일) 사는 건 사는 거니까.
거성빌라에서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바로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
할머니는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부터 우리 둘만의 기억을 조금씩 머리에서 마음으로 옮겨놓았다. 어느 날엔 나의 나이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내가 사는 동네를 잊어버리기도 했다. 할머니가 모든 기력을 다 쓴 채로 요양원에 누워있을 무렵에는, 내가 어제 찾아왔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왜 이제야 왔냐고 자꾸만 물었다.
그래도 나는, 할머니 보고 싶어서 또 왔다고 할머니는 어떻게 매일매일 봐도 또 보고 싶냐고 허풍을 떨었다. 할머니는 힘없이 웃고, 약간 이야기하다가, 다시 눈을 감고 조금 자다가, 눈을 떠 언제 왔냐고 물어봤다.
때로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나를 쳐다보기만 한 적도 있었다.
“너를 보고 있으면 너를 키운 것이 다 생각나.”
할머니가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온전한 문장이었다. 그렇게 할머니를 천천히 조금씩 보냈기 때문에 할머니 장례식장에서도 많이 울지 않았었는데.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할머니는 나의 가장 안전한 세상이었다. 어린 나의 모든 것을 숨김없이 꺼내 보여도 비밀을 약속하는 사람, 그 비밀을 평생 지켜준 사람, 어디서나 나를 제일로 생각해준 어쩌면 유일한 사람. 나의 가장 안전하고 따뜻했던 할머니를 떠나보낸 다음 해에 나는 불안전한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젊은 여자에게 유난히 모질었던 지난 몇 년의 사회. 나는 할머니를 다시 한번 만나는 꿈을 꾸기를 매일 바랐다. 어딘가에 나 있는 창문으로 나를 지켜보다가 달려 나와 줄 거라고. 아까부터 봤는데 너희 정말 너무 한다고. 나 대신 외쳐주길 바라고 또 바랐다.
그렇게 나의 유난스런 애도 기간이 지나면서, 할머니가 나의 가장 안전한 세상이었음을 깨달았고, 그제야 나는 할머니와의 기억을 머리에서 마음으로 옮길 수 있었다. 언제든지 꺼내서 추억할 수 있는 기억으로. 차곡차곡.
마지막으로 겨울의 햇살과 가장 잘 어울리는 기억을 꺼내 본다. 할머니가 처음으로 요양원에 들어간 후에, 매일 엄마에게 전화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소연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할머니를 찾아갔다. 병원에 들르기 전 꽃집에 들러 화분을 하나 샀다. 꽃이 아직 피지 않은 화분으로 골라 달라고 부탁했다.
다홍색 스웨터를 입은 할머니는 나를 보고 언제나처럼 빙긋 웃었고, 밥 한 숟갈에 나 한번, 반찬 하나에 나를 또 한 번 쳐다보면서 병원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나를 보니 기분이 좋다는 할머니에게 꽃망울이 주렁주렁 달린 화분을 선물했다.
“할머니 매주 수요일에 이 화분에 물을 줘야 해. 그럼 예쁜 꽃이 필 거야. 할머니가 지금 지는 꽃이라고 생각하지 마. 할머니는 늘 나에게 피어나고 있어. 우리 매일매일 피어나면서 살자.”
앞뒤가 맞지 않지만 어쨌든 우리 활짝 피어날 것이라는 대충 그런 말에 할머니가 또 활짝 웃는다. 그 모습이 마치 다홍빛 꽃 같았다. 나의 가장 안전했던 다홍빛 세계. 할머니가 떠났던 연말이면 지독하게 그리워지는 그 세계.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김산하 상처투성이었던 20대를 넘어 적당히 타협하고 내 마음을 돌보며 연대의 재미를 아는 30대를 지나고 있다. 40대가 더 재밌다는 언니들의 말을 믿고 기다리는 중이다. 외할머니를 닮아가는 엄마의 모습을 사랑한다.
* 나도, 에세이스트 공모전 페이지
http://www.yes24.com/campaign/00_corp/2020/0408Essay.aspx?Ccode=000_001
김산하
상처투성이었던 20대를 넘어 적당히 타협하고 내 마음을 돌보며 연대의 재미를 아는 30대를 지나고 있다. 40대가 더 재밌다는 언니들의 말을 믿고 기다리는 중이다. 외할머니를 닮아가는 엄마의 모습을 사랑한다.
아침동화물빛
2020.08.03
lhe963
2020.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