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표기식
『우는 나와 우는 우는』. 지난 3월, 이 이상한 제목의 책이 출간되자 곳곳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랑 이야기여서일까? 사랑을 떠나는 이야기여서일까? 이 묘한 제목이 실은 제목이 아니라 저주였던 것일까? 이 책의 아름다움 앞에서 전의를 상실하고 울어버리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내 경우에는 본문을 읽기도 전에, 손 위에 얹힌 이 책의 무게를 가만히 느껴보다가 울었다. 그와 나는 오랜 시간 서로의 초고를 읽는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로 지냈다. 원고는 쌓여만 가는데, 누가 읽기는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2년 전 어느 날에는 갑자기 <최초의 독자>라는 팟캐스트를 만들어 서로의 원고를 낭독하고 합평하기도 했다. 그때 낭독했던 글도 어엿한 본문이 되어 책을 이루고 있었다. 첫 단독 저서의 주인공이 된 하은빈 작가를 인터뷰이로 만났다. 오랜만에 팟캐스트를 녹음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그렇게 하면 어때요? 편안하게, 평소처럼, 친구처럼 하면 어때요? 인터뷰라고 존대하지 말고, 그냥 반말도 하고요. 그럽시다, 맞장구를 치다가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평소에도 거의 존대를 한다는 것을…사리지 않는 작가인 동시에 매사에 여미는 인간, 하은빈과 함께 어느 오후를 다 보냈다. 글과 죄에 대하여, 잠과 꿈에 대하여, 몸과 몸짓에 대하여, 무엇보다 세계와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 나누면서.
독자를 바라는 마음에 대하여
안담 여태까지 두 권의 책을 내셨어요. 하나는 번역서인 일라이 클레어의 『눈부시게 불완전한』이고, 하나는 에세이집 『우는 나와 우는 우는』 입니다. 『우는 나와 우는 우는』은 지난 3월 출간된 하은빈 작가의 첫 단독 저서인데요. 이 책을 짧게 소개해 주신다면요?
하은빈 네, 하은빈이고요. 이 책은 부제에 달린 것처럼 저의 지난 사랑, 장애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맥락들을 가졌던 사랑에 대해서 쓴 책이에요. 장애는 이 책의 표면에 해당하는 것 같고요, 이 표면 아래에서 제가 몰두한 주제는 어떤 잘못이나 실패, 후회에 대한 이야기예요.
안담 하지만 은빈은 이전에도 쭉 글쓰기를 해왔지요. 제가 집에서 하은빈의 터치가 들어갔다라고 하는 책들은 싸그리 모아왔는데요. 우선 은빈이 몸담았던 서울대학교 장애인권동아리 ‘턴투에이블’에서 발행했던 문집, ‘디스에이블’ 4호 「내 장애에 노련한 사람이 어디 있나요」와 6호 「병신육갑」이 있습니다. 김원영 작가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도 이 문집에 실린 은빈의 글을 인용한 대목이 있어요. 지난 12월 신촌극장에서는 싱어송라이터 이끼의 이름으로 단독콘서트를 열었고, 거기서 출간 준비 중이던 원고 일부를 묶어 만든 책과 가사집을 배포했지요. 이 외에도 고려대 대학원 신문과 서울연극센터의 웹진 「연극in」 등에서 연재 또는 기고해 온 공연 비평들이 있고요. 말하자면 첫 저서 이전에도 은빈은 어림잡아 10년은 써 왔어요. 계속 쓰기는 하지만 독자가 잘 느껴지지 않았고, 그건 저도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에 <최초의 독자>라는 팟캐스트를 만들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정말로 독자를 만나게 되었어요. 기분이 어떤가요?
하은빈 일단 제가 <최초의 독자>에서도 한동안 응답 받고 싶다, 응답에 욕심이 있다, 그런 얘기를 해왔는데요.
안담 맞아요. 좀 후회하나요? (웃음)
하은빈 (웃음) 그렇다기보다는, 사실 제가 응답에 제때 응하는 사람은 또 못 되는 거예요. 응답을 잘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비평을 쓴달지, 어떤 응답을 연습하고 싶다는 얘기를 해 왔던 거죠. 사실 읽히는 경험을 가지고 싶은 마음, 제가 가진 인정 욕구를 “응답에 욕심이 있다”고 표현해 왔던 게 아닐까 싶어요. 막상 많은 화답을 받아보니까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고요. 좋기도 하면서…제가 응답에 대한 에너지가 상당히 저조하고 오히려 이런 즉각적인 응답의 방식에 피로를 느낀다는 걸 알게 되기도 했고요.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독자를 만나서 좋다, 그런데 좀 도망가고 싶습니다.
안담 근데 응답하기에 재능이 없더라도 응답받기를 너무 원할 수도 있잖아요. 저도 가끔 밑바닥이 고장 난 8톤 항아리처럼 말도 안 되는 양의 반응을 바랄 때가 있어요. 응답의 재능과는 별개로, 은빈이 응답에 욕심을 내게 된 계기가 있나요? 책 이전에도?
하은빈 제 생각에는 공연을 많이 만들면서 그런 욕심이 생겼던 것 같아요. 공연이 너무 가성비가 떨어지는 작업인데요. 일상의 너무 많은 시간을, 그리고 몸과 마음을 많이 소진하면서 공연을 만드는데, 그 공연은 두고두고 볼 수가 없고 내려가면 그냥 사라지죠. 그에 비해서 공연에 관해 나오는 얘기는 굉장히 적어요.
안담 SNS에서 회차마다 반응 한두 개만 찾아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하은빈 그렇죠. 다른 예술 형태, 예를 들어 책이나 영화는 만들고 시간이 지난 이후에도 독자나 관객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걸 수 있잖아요. 공연은 그렇지 못해서 너무 아깝다. 이건 관객으로서의 마음이라기보다는 창작자로서의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누가 뭔가를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모른다, 이걸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어떤 감각을 느꼈는지를 들어볼 기회가 창작자들에게 없다, 그런 게 아쉬워서 내가 그런 일을 좀 해볼까 했었어요. 그런 생각으로 2019년에 <연극in>을 비롯해 여러 지면을 통해 연극 내지는 무용 작품에 관한 글들을 쭉 썼던 것 같습니다.
안담 근데 한편으로는 공연이 공연이라서 다행이라고 느낄 때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공연이 사라진다는 사실, 때로는 그게 있었는지도 믿을 수가 없단 사실 때문에 공연이 좋다. 근데 책은 증거가 남잖아요? 계속 다시 펼칠 수 있고 계속 밑줄 그을 수 있어요. 공연보다는 확실하고 선명한 반응을 장기적으로 주고받는 게 가능하다는 점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이번에 책에 관한 반응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게 있나요?
하은빈 어떤 분의 한마디가 기억에 남아요. “...세상이 너무 밉고 삶은 너무 아름답다…” 『눈부시게 불완전한』에도 수나우라 테일러가 일라이 클레어와의 대화 속에서 그런 문장을 도출하는 순간이 있거든요. “나는 군대를 증오하고 내 몸을 사랑해요.” 군사적 오염으로 인해서 망가진 자신의 몸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거죠. 말하자면 군대를 향한 분노와 내 몸을 향한 사랑이 양립 가능하다는 것을, 그 말이 이 몸속에서 둘 다 진실이라는 것을 도출하는 부분이 있어요. 저는 그분의 문장이 수나우라 테일러의 문장과 같은 문장이라고 느꼈어요.
사진 : 표기식
둘 중 하나만 하라는 명령
안담 그 분이 실제 적으신 표현이 좀 다르다고 하더라도, 은빈의 기억에 그렇게 남았다는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은빈이 짓고 부른 노래들의 가사에 드러나는 세계와도 연결성이 있다고 느껴지는데요. 은빈의 가사에는 유독 하나를 취하면 하나는 잃어야 해, 둘은 가질 수 없어, 이런 사고방식이 많이 등장해요. 그러니까 세상을 사랑하기에 너도 사랑해, 너를 사랑하기에 이 세상도 사랑해, 이렇게 둘 다를 취하는 세계는 은빈의 가사에 없어요.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혼내는 듯한 음성이 들리지요. 누가 혼내는 걸까요? 둘을 가질만한 분수나 자격에 관한 생각 때문일까요?
하은빈 그러게요. 제 가사 중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사랑하고 싶었어 사랑을 하면 /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았어”, “사랑받고 싶었어 사랑받으면 /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어”. 말하자면 사랑과 용서는 제게 있어 둘 다 하거나 둘 다 받을 수 있는 경우가 없는 거예요. 안과 밖처럼, 낮과 밤처럼, 서로 이어져 있지만 같이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 안에 균형에 대한 어떤 감각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궁금하네요. 왜 그럴까?
안담 저도 그런 세계관에 공명이 돼서 물어봤어요. 둘 다요!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잖아요. 잃기는 싫고요, 얻고만 싶습니다, 할 수도 있죠. 왜 꼭 잃어야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까? 사실 그보다 제가 더 친숙하게 느끼는 건 뭔가를 얻었다면 뭔가는 반드시 잃어야 한다는 감각이에요.
하은빈 관련이 있는 얘기인지 모르겠는데…제가 아주 어렸을 때 생일이었는지, 선물을 고르러 부모님과 함께 인형 가게에 갔어요. 제 마음에 드는 인형은 그 한국 바비 인형들 아시죠? 그런 인형이었어요. 한쪽에 미미가 있고, 한쪽에 쥬쥬가 있었다 치면 일단 그걸 둘 다 갖는 건 안 돼요.
안담 안되죠.(웃음)
하은빈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하나만 가질 수 있어. 그런데 나는 미미가 마음에 들었는데 쥬쥬를 사달라고 했어. 왜냐하면…그래야 되는 것 같은 거예요. 아무도 나한테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저건 내가 가질 수 없어, 이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누가 봐도 미미가 너무 예뻤거든요. 쥬쥬는 너무 안 예뻤는데도 쥬쥬를 골랐어요. 미미는 너무 예쁘니까, 나는 분수에 맞는 쥬쥬를 가져야지,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
이 책의 반대편에는 누가 있을까
안담 자기 주제라든가, 분수라든가도 우리의 단골 대화 주제였어요. 미미와 쥬쥬의 사례에서도 보듯이, 응답을 너무나 바라는 마음에는 그것을 결국 받지 못할 거라는 체념이 포함되어 있기도 한데요. 그런데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게 굴지만 않는다면, 이런 체념이나 포기는 내 글의 독자를 정하는 과정을 돕기도 하는 것 같아요. 저는 누구를 설득할지 정하기 어렵다면 반대로 누구를 설득하기를 포기할 건지를 생각해 보거든요. 내 독자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반드시 누가 내 독자가 아닌가? 라는 질문이기도 한 거죠. 우는 나와 우는 우는을 쓰면서 이 글이 설득하지 않을 독자, 이 글에 설득되지 않을 독자를 상상해 보기도 했나요?
하은빈 사실 그런 독자를 제가 생각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의식되지 않은 건 아니었던 독자가 있다면… 누군가의 부모님들, 부모 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을까 신경 쓰였어요. 우의 부모에 이입할 수도 있고 나의 부모에 이입할 수도 있는데, 어느 쪽이건 자식 가진 입장이 의식됐어요. 인스타를 통해 반응을 전해주셔서 계정을 들어가 보았더니 아이를 키우고 계시네, 그럴 때 좀 긴장이 돼요. 이 책 안에서 부모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은빈의 입장에는 덜 서게 되는 거기 때문에.
안담 사실 어떤 책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화가 이미 서로 동의할 준비가 된 사람들끼리의 대화뿐이라고 한다면, 창작자로서 그건 무섭거나 맥 빠지는 일이기도 해요. 그리고 창작자가 아니더라도 그런 음모론적인 대화만 나누며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만날 수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동의와 먼 반응을 할 누군가가 누굴까? 그런 상상을 해본 것 같아요.
하은빈 누군가는 분명히 안 좋아하겠죠? 이건 위선이다, 이렇게 말하는 반응도 한번 접했어요. 물론 위선이라고 말할 수 있고, 다만 어떤 문장을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가 궁금했는데요. 그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리를 빤히 바라보는 아이들의 얼굴을 남몰래 노여워했다.” 이 문장에서부터 이 은빈이라는 사람을 더욱 팔짱을 끼고 보기 시작하셨다고 해요. 제 입장에서 그 문장은 쓰는 내가 ‘아이들을 노여워하는 나’를 인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니까 거리 두지 않았더라면 쓰이지 않을 문장이지만, 그 점을 어떤 독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있구나. 꼭 그런 식으로가 아니더라도 어쨌든 누군가는 나를 도덕적으로 평가하거나 비난할 거라는 생각은 들어요. ‘위선’이라는 표현도 이 작가가 윤리적인 뭔가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라는 평가잖아요.
안담 방금 깨달았는데 제가 ‘반대편’을 생각했다고 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최고의 대화를 상정하고 질문했던 것 같아요. 반대이지만 정확한 반대, 통찰력 있는 반대에 대해서요. 말하자면 이 글을 깊이 이해했기 때문에 하는 반대말이죠.
하은빈 그런 측면에서는… 장애 당사자의 반응이 궁금했어요. 저는 이 책에서 장애 당사자와 사랑을 하고 그를 떠나는 과정에 대해서 쓰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의 비장애인 연인과 비슷한 작별을 맞이할 수 있거나 그러한 작별을 예정하고 있는 이들, 내지는 그런 작별을 이미 한 사람들, 말하자면 우의 위치에 갈 사람들을 정확히 결여하고 있기도 하죠. 말하자면 우의 입장에 자신을 포개볼 이들이 의식됩니다.
안담 반대로 이런 사람을 꼭 설득하고 싶다, 그런 생각도 해보았나요?
하은빈 음… 우와 제가 나온 다큐멘터리를 봤을 사람들이요.
안담 정말 중요해요. 저는 쓰복만 씨에게 이 책이 닿는다면, 이 책에 쓰복만 씨의 내레이션이 중요한 웃음 포인트로 들어갔다는 걸 알려드린다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웃음)
잠과 꿈과 도망자의 세계
안담 저는 잠과 꿈에 관심이 많아요. 잘 못 자서 그렇고, 그리고 악몽을 자주 꿔서 그렇습니다. 악몽은 내가 사랑하는 것,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고통스러운 경고등이에요. 그래서 소중한 무엇이 또 생길 것 같을 때마다 너무 두려운데요. 3장의 부록인 「동이를 부탁해」에 그런 문장이 나오더라고요. “얼마나 달콤할까요, 사랑하는 것도 소중한 것도 가지지 않는 삶이란.” 저한테 그건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는 삶이란 말로도 들렸어요. 은빈의 이야기가 너무나 고통과 접붙어 있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보니까 이후의 사랑이 좀 궁금해지더라고요. 사랑은 더 이상 안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을까? 너무 힘드니까?
하은빈 제가 이후에 했던 사랑들이 없지 않은데, 결국 우와의 사랑과 이렇게 견주게 되더라고요. 근데 이 사랑은 제가 더는 반복하거나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의 어떤 순간이라서, 이제는 견주어 보기를 그만두었어요. 이 사랑을 넘어서거나 대체할 수 있는 종류의 관계나 사랑은 이제 제 삶에 없을 것이다. 저에게서는 깨끗하게 결론이 난 지점이고, 요새는 사랑에 대해서 그리 많이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모르겠어, 사랑이라고 했을 때, 물론 로맨틱하거나 에로스적인 사랑이 제게 여전히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이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시점은 우와의 시절과 함께 지나가 버린 것 같아.
안담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도 잠과 꿈에 일가견이 있다고 느꼈어요. 책 전체에 너무나 피곤한 사람의, 마침내 1인분의 침대를 마련하게 되었지만, 도무지 잘 수 없는 사람의 어떤 피로가 깔려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책도 불면의 책인 것이죠. 또 잠자리 옆에 두는 물인 자리끼라든지, 화해하지 못한 이들의 장소로서 꿈이라든지, 잘 자라는 인사가 가사가 된다든지, 이렇게 잠과 꿈에 결부된 표현들을 노래에 자주 쓰기도 해요. 『눈부시게 불완전한』에 옮긴이의 말을 쓰면서도 ‘도망자와 자장가’라는 제목을 붙였지요. 은빈에게 잠은 무엇이기에 이렇게 잠에 골몰할까요? 혹시 잘 못 자나요?
하은빈 음, 잠은 제가 우에게 주고 싶었던 것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우도 굉장한 불면에 시달렸었어요. 우리 그런 얘기 많이 했잖아요, 먼저 잠드는 연인에 대한 이야기.
안담 그쵸. 저는 한 번쯤은 나를 재우고서야 자는, 나보다 나중에 자는 연인을 가지고 싶었는데요. 다 저보다 먼저 자더라고요.
하은빈 저는 그 이야기에서 항상 먼저 자는 사람이고 아주 잘 자는 축에 속했었어요. 불면의 연인을 두면 잠의 시간이 좀 달라지잖아요. 저는 자고 일어나서 보게 되는 거죠. 밤에 밀린 잠을 오전이나 오후에 몰아 자는 사람을... 호흡기 때문에 편안히 잘 수 없는, 악몽을 계속 꾸면서 깊은 잠에 들지 못하는 사람을. 그래서 우에게 정말 좋은 잠을 주고 싶었었어요. 우와 있을 때나 우와 없을 때나, 잠이란 제가 우에게 줄 수 없는 선물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제가 우를 떠난 다음에도 뭐, 저 혼자 두 다리 뻗고 잘 잘 수는 없는 것이죠.
안담 자장가 앞에 붙은 도망자라는 단어도 재미있어요. 도망가서 잠잘 수는 없을 것 같거든요. 무슨 범죄까지 저지른 건 아니라고 하더라도, 도망간 사람의 잠자리가 편하지는 않을 텐데요. 왜 도망자를 생각했을까요? 또 다른 도망자를 알고 있나요?
하은빈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도망자’라는 말은 김사월의 <도망자>라는 곡에서 온 것 같아요.
안담 가사를 잠시 읽어볼게요.
오늘 아침에 당신 떠나고
나는 후회했어요
내가 먼저 가야 했는데
당신 베개엔 옅은 향수 냄새
나는 후회했어요
내가 먼저 가야 했는데
있죠 가장 먼저
도망가는 사람은 내가 돼야 해요
남겨지는 건 당신이어야 해요
당신 베개를 베고 생각해요
나는 용서할래요
같은 도망자니까
이것도 굉장히 잠의 노래네요.
하은빈 그러게요. 제가 「도망자와 자장가」라는 글을 쓰면서 이 ‘도망자’라는 표현을 취할 때에도 분명 그런 잠의 이미지가 컸던 것 같아요. 그 글 속에는 호흡기 병동의 너무나 시끄러운 배경 속에서 잠에 들지 못하는 두 사람, 애들이죠, 두 애들이 나와요. 번역을 하는 내내 그 호흡기 병동의 캄캄하고 끝없는 복도에서 배회하고 있는 도망자의 이미지를, 가진 거라곤 떠나온 세계의 사물들로 꾸린 커다란 보퉁이 뿐인 도망자의 이미지를 떠올렸어요.
안담 “...그곳에서는 침대의 머리맡을 불 밝히는 호흡기들이 끝나지 않는 자장가를 부르며 아직 오지 않은 이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도망자의 보퉁이를 끌러서 떠나온 세계의 사물들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안담(작가)
1992년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났다. 봉고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다가 강원도 평창에서 긴 시간 자랐다. 미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에는 예술의 언저리에서만 서성였다. 2021년부터 ‘무늬글방’을 열어 쓰고 읽고 말하는 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2023년에 활동가들을 초대해 식탁에서 나눈 대화를 담은 첫 책 《엄살원》을 함께 썼다. 가끔 연극을 한다. 우스운 것은 무대에서, 슬픈 것은 글에서 다룬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대개 슬프다고 생각한다. 정상성의 틈새, 제도의 사각지대로 숨어드는 섹슈얼리티 이야기에 이끌린다. 존재보다는 존재 아닌 것들의, 주체보다는 비체의, 말보다는 소리를 내는 것들의 연대를 독학하는 데 시간을 쓴다. 주력 상품은 우정과 관점. 얼룩개 무늬와 함께 산다.

표기식
사진 작가.
짜피
2025.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