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오래전 나의 상사는 말했다. '제휴처 전화는 오후 2시쯤 걸어라.' 오전에는 다들 바쁘고 정신이 없다, 점심 먹고 한숨 돌릴 때쯤 전화를 받으면 상대방도 마음이 너그러워진다는 팁이었다. 실제로 어느 정도나 영향을 미치는지는 모르겠으나 잘 써먹고 있다.
최근 이메일의 형식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생각할 일이 있었다. 내 딴에는 근무 시간이라고 보냈지만 상대방은 근무 시간이 아니었던 것. 공교롭게 상대방은 이메일이 올 때마다 알림을 받는 스타일이었고 예상치 못한 시간에 알림이 울렸다는 말을 들었다. 조심해서 나쁜 거 없다는 마음으로 업무 이메일은 되도록, 가급적, 최대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안에 보내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까지 들먹일 필요 없이, 종종 남의 시간이 나와 다르게 흐른다는 걸 깨닫는다. 특히 사무 정규직과 프리랜서는 같은 한국 안에 살아도 서로 다른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어서 전화보다 메시지, 메시지보다 이메일로 소통하려고 한다. (물론 못 지킬 때도 많지만) 저 사람이 답장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싫어서가 아니다. 지금 나보다 느리다고 해서 늘 느린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제가 느리더라도 부디 너그러이 봐주세요)
느림은 빠름 앞에서 사과해야 할 이유가 된다. 9 to 5가 많은 사회에서 9 pm to 5 am은 일하기에 좋은 시간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불편하지만 대개 돈을 받고 일하는 쪽이 양해한다. 양해보다 양지에 가깝다. 아쉬운 사람이 먼저 자기 시간을 내어놓는다. 외국에서 우리 회사 물건을 산다고 하니 시차에 맞춰서 밤에 연락한다. 늦어지는 결과물을 기다린다. 재촉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업무 순서를 바꾼다. 재촉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다. 대개 뒤에서 마감 기한 귀신이 쫓아오면 재촉하는 자와 재촉받는 자의 입장 차이 없이 눈덩이처럼 같이 구르게 된다.
미친 토끼처럼 구르는 와중에 내 시계를 바라본다. 자기계발서를 읽다 보면 돈을 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시간을 버는 데 집중하라는 조언이 많다. 답신을 기다리지 말고 내 업무시간에 맞춰서 일을 건네라고 한다. 시간과 돈을 동시에 버는 방법으로는 아웃소싱이 있다. 나보다 시급이 낮은 사람에게 일을 맡긴다. 그러면 그 시간만큼 돈이 절약된다. 남는 시간에는 다른 일을 벌여서 다시 아웃소싱을 맡긴다. 시간을 들여서 노동하지 말고 돈이 돈을 만들라고 하는데, 그럼 대신 시간을 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 돈이 돈을 불러오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이 돈을 불러오고 있는 건 아닐까.
다들 시간 부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뭐라고 하지 않고 넉넉히 시간 인심을 써주면 좋으련만. 『모모』 의 회색 신사가 어디선가 우리의 시간을 쓱싹쓱싹 썰어 먹고 있지 않나 주변을 둘러본다.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면 늘 마음이 쪼들린다.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누군가에게 곤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약속도 잡기 싫다. 인터뷰할 때도 시간은 나의 편이 아니다. 나에게는 처음 맞는 시간이지만 저 사람은 몇 번이고 반복한 시간일 수도 있다. 나의 시계와 당신의 시계는 늘 다르게 생겼다.
여름 휴가 때 외국에 나갔다. 때마침 모든 철도와 버스와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하고 있었다. 일부 업장에서는 출근을 할 수 없으니 일을 못 하겠다고 연쇄 파업을 했다고 한다. 분명 누군가는 큰 불편을 겪었겠지만, 시간을 들여 파업의 정당성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좋아 보였다. 다들 휴가를 넉넉히 쓰고 느긋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급할수록 남의 시계가 더 커 보이니까. 소박한 일의 목표를 정하자면, 남의 시간을 뺏어서 내 주머니에 넣지 말 것. 5시 전에 이메일을 보낼 것.
정의정
uijungchung@ye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