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 일이다. 어느 날 연립주택 공터에서 노랑새댁네 식구를 만났다. 네 마리 노랑이와 한 마리 삼색이를 거느린 노랑새댁은 처음 만나는 나에게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몸을 부비고 한참이나 발라당을 선보였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같이 여섯 식구들에게 사료 배달을 했다. 식구들 중 삼색이는 유난히 약해보이고 덩치도 작았는데, 내가 밥 배달을 갈 때마다 한참이나 무릎에 앉았다 가곤 했다.
한번은 내가 사료를 내려놓고 일어서려 하자 녀석이 작정한 듯 가슴에 찰싹 매달리는 거였다. 그렇게 랭보는 우리 집으로 왔다. 나중에 동물병원에 가서 알게 되었지만, 랭보는 대략 3개월령이 약간 넘었는데도 이가 망가지고 성치 않은 상태(그런 상태로 녀석은 길 위에서 닭뼈를 씹어먹기 일쑤였다)라고 했다. 아마도 노랑새댁은 그런 여식이 걱정돼 귀띔이라도 한 모양이다. “날씨도 추워지는데, 저 아저씨 따라가거라. 그럼 매일 맛난 거 먹을 수 있단다.”
집으로 온 랭보가 가장 열광적인 반응을 보일 때는 언제나 내가 사료 배달을 다녀온 직후였다. 녀석은 정말 열성적으로 내 몸 구석구석을 킁킁거리며 수색했다. 그런데 랭보만큼이나 열심히 내 몸을 수색하는 녀석이 있었으니, 노랑새댁이었다. 그렇다. 둘은 나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있었던 거다. 어쩐지 내가 사료 배달을 나갈 때면 랭보는 내 바지와 손에 수십 번 볼을 부비며 냄새를 묻혔다. ‘어머니 난 여기서 잘 살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는 일종의 편지였다.
급식소 배달을 가서 사료를 내려놓을라치면 어김없이 이번에는 노랑새댁이 와서 랭보가 보낸 편지를 확인했다. 킁킁거리며 랭보가 쓴 장문의 편지를 다 읽었다. 그러면 또 노랑새댁은 내 가랑이에 얼굴을 문지르며 답장을 썼다. “딸아 보아라, 춥지는 않더냐, 이 아저씨가 못살게 굴지는 않느냐, 에미 걱정은 말아라, 남매들도 잘 있단다, 그럼 이만.” 어쩌면 이즈음의 나는 사료배달부보다 우편배달부의 역할이 더 컸다. 실제로 노랑새댁은 사료를 내려놓아도 식사는 뒷전이고 편지부터 읽곤 했다. 랭보 또한 내가 집으로 돌아오면 만사를 제쳐두고 엄마의 편지를 읽었다.
나는 이 모녀간의 편지를 전달하는 게 기뻤다. 몸이 허약해 길에서 살 수 없는 자식을 나에게 보낸 어미 심정을 어찌 다 알겠나만 이것만은 알 것 같았다. 모녀가 매일같이 주고받는 편지가 얼마나 그립고 아름다운 것인지. 하지만 얼마 뒤, 급식소가 있는 연립주택 주차장에서 노랑이 형제 중 한 마리가 안타깝게 로드킬로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그날 이후 공교롭게도 노랑새댁네 식구들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 같지 않았다. 매일같이 다가와 랭보의 편지를 읽고 답장까지 써주던 노랑새댁조차 1~2미터의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편지를 읽을 수 없으니 답장을 써줄 수도 없었다. 랭보는 계속해서 편지를 보냈지만, 계속해서 답장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내가 살던 집은 전세 계약도 끝나고, 이사를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은 한동네 살던 캣맘이 그간의 사연을 듣고 노랑새댁네 급식소를 맡아주기로 한 거였다. 이사를 오기 전 편지를 기다리는 랭보를 위해 나는 마지막으로 노랑새댁을 찾았다. 오랜만에 통조림 인심도 쓰고 사료도 넉넉하게 부어주었다.
그리고 가만히 노랑새댁에게 손을 내밀었다. 멀리서 랭보의 냄새라도 맡았을까. 경계심을 보이면서도 노랑새댁은 한발씩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아주 잠깐 킁킁거리며 랭보의 편지를 읽었다. “엄마, 괜찮아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안부를 확인한 노랑새댁은 짧게 답장을 썼다. 내 손등에 딱 한번 볼을 문지르고는 멀찌감치 뒤로 물러났다. “난 괜찮다. 걱정하지 말아라.”
그게 마지막 편지였다. 나 또한 노랑새댁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노랑새댁은 고마웠어요. 랭보는 끝까지 책임지고 잘 키울게요. 집으로 돌아와 나는 랭보에게 그토록 기다리던 노랑새댁의 안부를 전해주었다. 녀석은 이삿짐을 싸는 동안 내내 곁에 붙어서 오랜만에 도착한 엄마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이튿날 우리 부부와 랭보는 6번 국도를 달려 한적한 시골에 도착했다.
※ 11년 전 집으로 따라온 랭보는 11년째 함께 동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11년은 더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용한(시인)
시인. 정처 없는 시간의 유목민. [안녕 고양이]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영화 [고양이 춤] 제작과 시나리오에도 참여했으며,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는 일본과 대만, 중국에서도 번역 출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