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X리타] 영원이라는 불가능에 도달하기 –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이상하고 아름다운 책 ③ -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
글 : 구구 (노혜지)
2025.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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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타가 먼저 말을 꺼내 준 김에, 나도 오랜만에 우리의 첫 만남을 곱씹어봤다. 첫 만남에서 우리는 마치 탐욕스러운 미스터리 독자처럼 상대를 향한 수수께끼를 풀고야 말겠다는 일념하에 ‘여성적인 긴장감’을 소거한 채 서로에게 돌진하는 대화를 나눴다. 쾌락 독서처럼 대화는 아귀가 딱 들어맞았고, 그 안에서 찰나의 쾌락이 리듬감 있게 끊어질 듯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이후의 만남에서 우리의 대화는 조금 어긋나거나 어색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는데, 나는 그 이유를 우리가 정말 중요한 이야기, 그러니까 각자가 품고 있는 깊은 구렁을 그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양 모르는 체하고 오직 ‘잘 된 이야기’만을 경유해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아마 어린 시절 읽은 책 이야기를 나눴다면 우리가 품고 있는 구렁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근원에 조금 더 솔직히 다가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 리타의 말대로 책이 나라는 존재에 앞서 어떻게 나를 구성했고 그 존재감을 언제 드러낼지는 알 길이 없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한들 큰 의미는 없었겠다 싶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계속해서 이야기의 둘레에 또 다른 이야기를 보태는 것뿐이라는 시시한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여기서 하나의 질문. 책이 ‘우리의 어린 시절을 소유하고 그것에 관한 권리를 점유’하는 무시무시한 존재라면 우리는 왜 책을 쓰기로 결심했을까? 왜 우리는 독자라는 특권을 포기하고 글쓰기라는 형벌로 뛰어들었을까? 이미 우리의 몸 안팎에 책이라는 저주가 둘러져 있는데도? 이 또한 이야기가 내린 저주일까? 리타에게 질문을 던지기 전, 나는 오랜 시간 마음을 의탁해 온 온다 리쿠 선생에게 질문의 답을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오래 전 내가 좋아했던 한 권의 책을 다시 꺼내주었는데… 그 책은 익명의 작가에 의해 200부 밖에 만들어지지 않은 소문 속 소설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소개하기에 앞서 먼저 온다 리쿠가 얼마나 짓궂은 작가인지 이야기하고 싶다. 그는 『삼월』 시리즈를 통해 소설 속 소설을 다시 소설로 출간하는 엉뚱한 연결을 시도한다. 바깥에서 안으로, 그리고 다시 바깥으로 향하는 방식으로 외부의 소설과 내부의 소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형태다. 그에게 소설은 현실과 구분되는 공간이 아니다. 작가가 책 바깥의 전지적 위치에서 이야기를 제멋대로 주무른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작가 본인이 소설과 현실을 겅중겅중 자유롭게 넘나든다는 뜻이다. 일례로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4장 「회전목마」에서 작가는 직접 ‘나’와 ‘그녀’로 등장한다. 독자는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 소설 안에서 길을 잃는다. 그리고 작가는 길을 잃은 독자가 과거의 어떤 장면에 도달하기를 희망한다. 그 장면이 어떤 장면인지는 작가에게 중요치 않은 것 같다. 얼마나 악랄한 사람인지! 그가 생각하기에 과거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미스터리 그 자체다. 그 곳으로 독자를 귀속시킴으로써 그는 최종 보스처럼 악랄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장르를 완성시킨다. 그가 ‘노스탤지어의 마술사’로 불리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과거와 기억, 그리움에 대한 집착이 지나치게 강하니까. 그 집착이 얼마나 강한가 하면 독자의 과거까지도 자기가 뛰어노는 이야기의 재료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여간 여러모로 징그러운 작가다. 그리고 나는 그의 징그러운 면모를 몹시 사랑한다. 내가 지금 불행하다면, 그건 필시 온다 리쿠의 세계에서 너무 오랫동안 과거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 1964년 미국 초판본 표지 이미지

 

다시 『삼월은 붉은 구렁을』으로 돌아와 보자. 이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4명의 수수께끼 중독자와 1명의 열혈독자를 통해 소문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 어떤 책인지 알려주며 그 존재 여부를 확인시켜 주는 1장, 두 명의 편집자가 『삼월』의 저자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2장, 두 여고생의 죽음 끝에 남겨진 일기장 ‘무지개와 구름과 새와’에 관한 이야기가 3장, 끝으로 작가 본인이 직접 들려주는 『삼월』의 탄생비화와 리세를 주인공으로 한 미스터리 학원물이 4장. 이렇게 읽으면 도대체 무슨 책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데, 읽고 나면 모가지가 부러질 듯 고개를 갸웃하게 되니 이 책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그리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작가가 외부의 『삼월』과 내부의 『삼월』, 두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다. 단서는 『삼월』의 3장 「무지개와 구름과 새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두 여고생 미사오와 쇼코는 아버지가 같지만 어머니는 다른 이복자매다. 서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자란 두 사람은 갑작스럽게 조우한 이후 꿈결 같은 시간을 보낸다. 두 사람은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신들의 근원, 아버지의 묘를 찾아 떠나기로 한다. 떠나기 며칠 전, 미사오는 한 남자가 머리에 폭탄을 두르고 죽음을 맞이하는 영화를 보게 된다. 클라이맥스를 지난 영화에서는 다음과 같은 자막이 흘러간다.

 

찾았다.

뭘?

영원을.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왜 이야기를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써야만 했을까? 나의 경우에는 그토록 떠나오고 싶던 어린 시절을 글이라는 세계 안과 밖에서 뒤엉키고 순환하게 만들면서 그것을 영원이라는 불가능성에 가까이 데려다 놓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다. 글을 쓰는 나는 매일 그때 그 시절을 어루만지며 영원의 전당에 진열해 두고 싶은, 과거에 미련이 많은 사람이다. 현재가 비루해서라기보다 과거의 끔찍했던 시간들에 나 자신조차 의미를 새겨넣지 않으면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렇다. 매일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마음으로 살던 그 날들을 붙들어야만 지금의 나를 수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영원을 향한 갈망이 가진 가장 치명적인 점은 ‘영원한 건 절대 없어’라는 진리를 모른 채로 바라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이것을 사랑한다는 데 있다. 영원한 건 절대 없다. 그러나 나는 진짜와 가짜가 교묘하게 뒤섞여 경계가 모호해진 이야기의 세계에서 그것을 영원히 되살려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리타를 비롯해 여러 친구에게 보여주지 못한 구렁은, 어쩌면 내가 과거의 불행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랑이 지금껏 나를 살아 있게 해왔다는 사실에 놓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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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 (노혜지)

2017년부터 독서모임 공동체 ‘들불’을 운영해온 모임장. 들불이라는 이름은 2019년 모임 구성원들과 ‘함께’ 만들었다. 2020년부터 도서 큐레이션 레터 ‘들불레터’를 발행 중이며 동료와 함께 『작업자의 사전』(2024, 유유히)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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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

기존 장르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는 유연하고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펼쳐 한국에서도 이미 든든한 마니아층을 거느리고 있는 보기 드문 진짜 이야기꾼으로 연간 200편의 도서를 독파하는 문자 중독자로 유명하다. 1964년 일본 미야기현에서 태어난 그녀는 와세다대학교 교육학부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집필한 소설 『여섯 번째 사요코』로 데뷔했다. 이 책은 1991년 제3회 일본 판타지노벨 대상 최종 후보작에 올랐다. 온다 리쿠의 소설은 뛰어난 대중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영상 매체에도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다. 2000년에 데뷔작인 『여섯 번째 사요코』가 TV 드라마화된 데 이어, 2001년에는 『네버랜드』가 드라마화되었다. 2002년에는 『목요조곡』이 영화화되었으며, 2006년에는 『밤의 피크닉』이 영화화되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그녀의 작품은 어떤 장르이든 인간의 원초적인 상실감과 그리움을 일깨운다. 매혹적이고 찬란하지만 그만큼의 어둠과 불안한 기운을 품고 있는 세계, 그 비밀스럽고 중독성 강한 이야기에 수많은 독자들이 열렬한 관심과 애정을 보내고 있다. 2005년에 발표한 『밤의 피크닉』은 남녀공학 고교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아침 8시에 학교에서 출발하여 다음날 아침 8시까지 학교로 걸어서 돌아오는 '보행제' 행사를 배경으로, 24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자신의 고민을 좀 더 성숙하게 이겨내는 소년, 소녀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 책은 그 해 '[책의 잡지]가 선정하는 베스트 10' 중에서 1위에 올랐고, 제26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 및 '서점 점원들이 가장 팔고 싶은 책'을 투표로 선정하는 제2회 서점 대상을 수상하였다. 이 밖에도 『Q & A』는 2005년 제58회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후보에, 『유지니아』는 제133회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다. 또 「도코노 이갸기」 시리즈 중 두 번째 이야기인 『민들레 공책』이 제134회 나오키 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06년 12월에 발간된 『네버랜드』는 일본의 인기 아이돌 그룹인 V6와 쟈니스주니어가 출연하여 드라마로 만들어져 화제가 되었다. 또한 2009년 초, 140회 나오키상 후보에 올라 가장 유력한 수상작으로 점쳐지며 최종까지 경합을 벌이기도 한 『어제의 세계』는 작가 스스로가 “내 소설 세계의 집대성”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의 야심작이다. 온다 리쿠의 트레이드마크인 기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작품 전체를 타고 흐르며, 그녀의 놀라운 진화를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 밖의 저서로는 『나비』, 『한낮의 달을 쫓다』, 『빛의 제국』, 『엔드게임』, 『삼월은 붉은 구렁을』, 『흑과 다의 환상』,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황혼의 백합의 뼈』, 『1001초 살인 사건』, 『코끼리와 귀울음』, 『굽이치는 강가에서』, 『도미노』, 『공포의 보수 일기』, 『토요일은 회색 말』 외 다수가 있다. 『여섯 번째 사요코』, 『네버랜드』, 『빛의 제국』이 드라마로, 『목요조곡』, 『밤의 피크닉』은 영화로 제작되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2020년에 발표된 『스키마와라시』는 오래된 건물을 허무는 곳에 나타나는 신비한 소녀를 통해 옛 시대와 새 시대가 교차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불안을 특유의 향수 어린 시선으로 담아내어, 독자들로부터 이 작품이 바로 온다 리쿠 ‘노스탤지어 문학의 정점’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서구식 추리물과 달리 평범한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긴장감 넘치고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들로 많은 독자들을 매료시켜 온 온다 리쿠는 인간의 원초적인 상실감과 그리움을 일깨우는 묘사로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라 불린다. 미스터리, SF, 호러, 청춘소설, 음악소설 등 장르를 넘나들며 매혹적인 이야기로 독자를 사로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