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현실의 이분법 사이로
좋아하는 일이 현실의 일이 되었을 때 그 일을 더 좋아할 수 있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큰 좋아하는 마음을 낳기를 기원한다.
글ㆍ사진 김성광
2018.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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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꼬박 모니터 화면만 바라보다 문득 고개를 드니 기척도 없이 저녁이 다가와 있었다. 불현듯 마주하는 고요한 풍경으로부터 나는 쉽게 행복을 느꼈다. 책방 깊숙이 새겨진 한낮의 그림자, 오렌지빛 노을에 푹 젖은 책과 테이블, 살짝 열어둔 문 앞에 앉아 나를 빤히 지켜보는 고양이의 시선, 피로한 매일을 버티게 하는 건 저 먼 나라의 압도적인 풍광이 아니라 일상의 파편들이었다.
- 송은정, 『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  (92쪽)

 

요즘 작고 예쁜 책방들이 많다. 때로 그 책방의 주인이 되는 상상을 한다. 소란한 대로변을 벗어난 고요한 곳에 작은 책방이 있다. 채도가 높은 색은 쓰지 않았다. 나무내음이 옅게 스며있고 약간의 삐걱거림이 정겹다. 볕이 들 땐 포근하게, 물러날 땐 쓸쓸하게 느껴진다. 겨울밤엔 노랗고 따뜻한 조명이 언 발길을 끌어당길 것이다. 그 풍경 안에 내가 앉아 있다.

 

서가의 책은 고심해 골랐다. 하늘이 파란 날, 비가 창을 두드리는 날, 세상이 분노하는 날, 마음이 더없이 고요한 날... 그 날의 분위기에 따라 디스플레이가 조금씩, 선곡도 조금씩 바뀔 것이다. 그 미세한 변화를 알아챌 줄 아는 독자들이 책방을 찾고, 차 한 잔 앞에 둔 채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한 권의 책에서 다음 책으로 다리가 놓인다. 그리고 또 다음, 다음, 다음 책으로...

 

상상은 또 다른 상상으로 연이어 다리를 놓지만 결코 현실로 다리를 놓진 않는다. 업계에서 일하는 나로서는 "언젠가 책방을 해보고 싶어"라는 막연한 희망에 냉정해진다. 책방이 본업이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상상은 사업이 될 수 없다.

 

책방은 책을 파는 곳이다. 정확하게는, 책을 사와서 책을 파는 곳인데, 책방이라고 책을 대단히 싸게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최근 수년 간 대형서점들은 만 원 팔면 대략 백 원 혹은 그 이하를 남기고 있다. 작은 책방도 임대료와 인건비, 제반 운영비를 제하면 이 구조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자리잡기가 쉽지 않다. 장사하는 사람이 ‘남는 것 없다’는 말만큼 믿을 수 없는 말 없다지만 내가 알기로 책방에 관해서는 믿어도 좋다. 책방은 분명 낭만을 품고 있는 곳이지만, 밥벌이로서도 낭만적인 곳인지는 불확실하다.

 

온라인 상에서 '좋아요'를 누르는 마음과 시간을 내 책방을 찾는 행동이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4쪽)

 

책방으로 예전만큼의 돈을 벌겠다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대신 적게 벌고, 적게 일하자. 초과근무에 시달리며 개인 시간을 뺐기는 상황을 감내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꾸준히 습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선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153쪽)


막상 공간을 열고 보니 무엇 하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책방은 작업실이 될 수 없었다. 여느 직장이 그렇듯 그저 일터일 뿐이다.

요즘은 매일 돈에 대해 생각한다. (156쬭)

 

현실을 충분히 고려치 않으면 결국 곤란을 겪는다. 사업이나 삶을 지속 가능한 궤도에 올려놓는 일은 현실의 압력을 충분히 버텨낼 때에야 가능하다. 낭만적 오해는 결코 긴 동력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냥 월급쟁이의 자리에 앉아있다. 이곳 저곳 생기는 책방들에 설레지만 현실의 어려움을 근거로 상상이 커가는 것을 막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방은 새롭게 늘어가고 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현실의 손익만이 아니라고, 책과 책방 그리고 독자가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힘도 있는 것이라고 조용히 반박하는 것 같다. 책방의 냉혹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 를 읽다가 나도 이 마법의 힘을 느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 믿음을 가지게 되는 이야기, 책이 만들어낸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냉혹한 현실을 이해하긴커녕 책방을 향한 마음만 무한정 키워버렸다. 책은 뭔가 특별할거라는, 책을 읽는 사람은 무언가 다를 거라는, 어쩌면 오해일 수 있을 생각이 마음을 뒤흔든다.

 

잠깐의 고민 끝에 우선은 책을 가져가고 돈은 입금해주길 부탁했다. 메모지에 이름과 계좌번호, 연락처를 적어 건네자 이번엔 상대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뭘 믿고 덥석 책부터 주냐며 농담 섞인 타박을 듣기도 했다. 괜찮다며 내가 고집을 피우니 손님들도 그제서야 고맙다며 책을 받아 든다. 오히려 고마운 사람은 나였다.


무슨 생각으로 책부터 들려보낸 것일까. 깊게 생각하고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그래도 괜찮겠지 하는 막연한 느낌을 따른 것인데 운 좋게도 아직까지는 그 느낌에 배신당하지 않았다. 책값은 통장으로 매번 돌아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딘가 확실히 다르구나. 그렇게 기분 좋은 오해를 가져도 괜찮지 않을까. (48쪽)

 

그녀가 돌아간 뒤 나는 젖은 낙엽처럼 쓰러져 앉았다. 수십 명의 손님을 동시에 응대한 직후처럼 기진맥진했다.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이리도 살갑지 못한 내가 그저 책방 운영자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고 있다. 이곳이 책방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로부터 한없는 신뢰를 받고 있다.  (138쪽)

 

낭만적 오해를 걷어내고 현실적 이해로 나아가는 과정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책방 이야기를 읽다 보면 끝내 ‘오해의 힘’을 기각할 수 없게 된다. ‘낭만적 오해’야말로 현실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책방을 낳는 산파 역할을 하기도 하고, 궁극적으로는 이 오해를 더 키우는 일이야말로 책방이 현실의 압력을 버텨내는 가장 큰 무기가 아닐까 싶어지는 것이다. 오해로 출발한 책방들이 현실을 이해해가며 기반을 닦은 후 더 큰 낭만과 오해를 발산해가길 기대하게 된다. 어쩌면, 낭만과 현실의 이분법적 대립에 맞서 그 사이의 길을 내는 소명을, 작은 책방들이 감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도 된다.

 

현실의 어려움과 맞서고 있는 이들을 두고 낭만의 힘, 오해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구경꾼의 속 편한 이야기다. 월급 따박따박 받는 안전한 자리에 앉아서 무거운 소명을 다른 사람에게 부여하는 일은 민망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책을 읽고 나면 응원의 마음을 속에만 담아둘 수 없게 된다. 좋아하는 일을 취미로 남겨두지 않고 일로 끌고 들어오는 사람들, 그리고 현실의 냉혹함을 거친 뒤에도, 끝내 낭만을 거둬들이지 않고 오히려 더 큰 낭만을 품는 사람들을 응원하게 된다. 마음이 아니고 현실적으로 응원하는 방법을 찾고 싶다. 좋아하는 일이 현실의 일이 되었을 때 그 일을 더 좋아할 수 있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큰 좋아하는 마음을 낳기를 기원한다.

 

"좋아하는 일은 역시 취미로 남겨둬야겠지?"


나의 최종 결정에 연민 어린 눈빛이 쏟아졌다. 좋아하는 일로는 먹고 살 수 없다. 아무리 좋아하던 취미도 정작 일이 되면 지긋지긋해진다더라, 세상 모두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 순 없다. 지금의 내 처지가 그들이 오랜 시간 품어온 의심에 확신을 심어준 듯했다. 나는 그 시선을 못마땅히 여기거나 일일이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 그러지 못한 이들보다 특별히 더 행복할 거라 주장하고 싶은 마음 또한 없다. 밥벌이에 관한 문제 앞에서만큼은 늘 공평했다. 회사원일 때도 책방 운영자일 때도 글을 쓸 때도 나는 고루 기쁘고 불행했다. 언제나 그랬다.

 

다만 일단멈춤에서 머무는 동안 더 많은 책이 읽고 싶어졌고,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큰 좋아하는 마음을 낳았다. 훌륭한 책방 운영자는 아니었지만 예전보다 더욱 선명하게 책을 둘러싼 일을 사랑하게 됐다. 책방을 닫겠다는 결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과 닿아 있었다. (168쪽)


 

 

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송은정 저 | 효형출판
인건비도 나오지 않는 매출에 좌절하고,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조직을 벗어나 자립하는 삶을 선택한 사람이 직면하게 될 기쁨과 슬픔을 온전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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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현실 #이분법 #예쁜 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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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광

다행히도, 책 읽는 게 점점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