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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묘지경

<월간 채널예스> 2018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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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양이랑 살다니, 세상은 묘지경이다. 나뿐 아니라 꽤 많은 친구와 지인이 고양이와 반려한다. (2018. 09.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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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부부가 신혼여행을 떠나며 생후 3개월 된 스코티시폴드 별이를 내게 맡겼다. 그때까지 나는 동물과 함께 지낸 적이 없었다. 계속 돌봐야 하는 존재를 집 안에 들이기 싫었고 그 존재의 털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더 싫었다. 별이가 온 다음 날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뜨자 왼쪽 어깨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별이가 어깨선을 따라 기역 자로 걸쳐 자고 있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뭉치가 목을 살짝살짝 간질였다. 깰까 봐 한참 더 누워 있었다. 화장실에 갔다 왔더니 별이는 공항에 마중 나온 친구처럼 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나를 기다렸다.

 

한번은 싸웠다. 별이가 자꾸만 노트북 키보드 위에 올라가 앉았다. 급한 작업을 하던 중이라 몇 번을 쫓아냈는데도 계속 올라왔다. 급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야! 너 진짜 이럴래?” 하고 소리 지르자 황급히 달아났다. 30초쯤 뒤, 별이는 노트북 모니터 뒤에 몸을 숨긴 채 키보드를 향해 한쪽 손을 빼꼼 내밀었다. 뭉뚝한 손이 탭 키를 눌렀고 화면엔 넓은 여백이 성큼성큼 내달렸다. 그 광경에 내 ‘멘탈’은 모닥불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녹았다. 별이는 털이 인절미 색이었다. 설탕에 콕 찍어 한 입에 먹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녀석이었다.

 

친구 부부에게 데려다주던 날. 고양이의 습성을 전혀 몰랐던 나는 차에 타자마자 별이를 이동장에서 꺼내주었다. 그러자 별이는 운전하는 내내 내 무릎에 올라와 몸을 쭉 뻗고는 스티어링 휠의 스포크 사이에 머리를 집어넣은 채 미동 없이 전방을 주시했다. 계기판이 보이지 않아 각별히 주의해야 했다. 친구네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이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좁은 차 안에서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 밑을 들추고 신발 밑창까지 들어 봤지만 별이는 없었다. 일단 짐을 전부 차 밖으로 빼낼 요량으로 가방을 들려는 순간, 그 안에서 필통을 베고 자던 별이를 발견했다. 옆에 설탕만 있었다면 콕 찍어서 그냥.


몇 해 전 이탈리아에 갔을 때다. 숙박업을 겸하는 노부부의 농장에 며칠 묵었다. 돼지, 닭, 고양이 가족이 함께 살았다. 새끼 고양이 한 놈이 새로 온 손님이 궁금했는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문 앞까지 와서 관찰하곤 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후다닥 도망쳤는데 오동통한 팔다리를 힘차게 내저으며 똥깡똥깡 달리는 모습에 ‘멘탈’이 지중해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녹았다. 옆에 올리브유라도 있었다면 콕 찍어서.

 

결국 똥깡이 두 녀석을 데려왔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새끼 고양이의 영향으로 어린 고양이를 똥깡이라고 부른다. 내가 고양이랑 살다니, 세상은 묘지경이다. 나뿐 아니라 꽤 많은 친구와 지인이 고양이와 반려한다.

 

연희, 연남이는 거실에 발을 디디자마자 처음부터 제 집이었던 양 휘젓고 다니며 놀았다. 발톱이 마루에 부딪쳐 울리는 소리가 봄날의 경마장처럼 경쾌했다. 당시 나는 집에서 작업했다. 아침을 먹고 의자에 앉으면 연희, 연남이가 무릎에 올라와 자세를 바꿔가며 잘 준비를 했다. 그다지 길지도 넓지도 않은 내 허벅지에 두 녀석이 충분히 굴러다닐 수 있을 만큼 작은 똥깡이들의 따스함이 표피부터 뼛속까지 스몄다. 인간이 내키는 대로 만지면 고양이가 싫어한다는 풍문을 들은 탓에 몇 달간 한 번도 만지지 않았다(못 했다). 연희, 연남이는 무릎 위에서 서너 시간씩 깨지 않고 잤다. 곤히 자는 녀석들이 깰까 봐 나는 숨도 꼭 필요할 때만 쉬었다. 가끔 재채기라도 해서 똥깡이들이 단잠에서 깨면 이따위 코 확 잘라서.

 

아무튼 연희, 연남이 때문에 하루 한나절씩 돌부처가 되니 작업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프린터에서 출력물 가져와야 하는데, 옆방에서 교정지 가져와야 하는데, 곧 약속 시간인데, 으악 휴대폰이 저기 있네 등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여러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만히 있는 것뿐이었다. 지금 쓰는 작업실은 그러니까 연희, 연남이 덕분에 생긴 셈이다. 이 녀석들을 집에 두고 출근할 생각을 하니 눈에 밟혀 데리고 다닐까 하고 궁리했지만, 그랬다간 이놈들을 피해 다시 집에 돌아가야 했을 터.

 

자다가 잠깐 눈을 뜨면 연희, 연남이는 다리 사이, 겨드랑이, 목 등 움푹한 데를 찾아 별의별 귀여운 자세로 자고 있었다. 요 녀석들이 가끔 멀찍이서 자면 서운함에 부들부들 떨며 잠을 설치곤 했다. 두 다리 사이의 길쭉한 협곡 지대는 두 녀석이 지금도 좋아하는 잠자리다.

 

출근하려고 몸을 웅크려 양말을 신는 때는 똥깡이들의 등산 시간이었다. 비스듬히 기운 등의 정상을 향해 내 몸에 발톱 아이젠을 박으며 등반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가 머리카락이 풀이라도 되는 양 마구 뜯어 먹는다. 그때는 정말로 먹는 줄 몰랐다. 나중에 토사물에서 인간의 머리카락이 나온 걸 보고 경악했다. 특히 연희가 하늘하늘한 천이나 끈 따위를 좋아한다.

 

식물, 스카프, 책 가름끈 등. 최근엔 책 가름끈 때문에 큰일을 치렀다. 침대에 누워 나는 책을 읽고 연희는 가름끈을 가지고 놀았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툭’ 소리가 났다. 가름끈이 5cm가량만 남아 대롱거렸고 연희는 입맛을 다셨다. 으악. 속히 응급실에 가서 구토 유발제로 끈을 토해내게 했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는데 자고 일어나서 보니 바닥에 피를 토한 흔적이 대여섯 군데 있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두 번 더 토했다. 그날로 입원한 연희는 이틀이나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 스트레스가 컸는지 제대로 먹지도 않았다. 연남이도 평소와 달리 의기소침해 보였다.

 

연희를 집에 데려오던 날 연희, 연남이가 부둥켜안고 서로 핥아주는 상상을 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현관문을 열자 연남이가 과연 버선발로 뛰쳐나와 연희 입가를 킁킁거리더니 갑자기 포악한 표정으로 하악거렸다. 이 자식! 고양이는 최종 판단을 냄새로 하는 모양이다. ‘분명 연흰데…’ 하는 표정으로 수시로 다가가 냄새를 맡고 뜨악 후 하악질을 하는 퍼포먼스를 하루에 열 번씩 했다. 이틀쯤 지나 평소의 패턴을 되찾았다.

 

우리 집에 연희, 연남이가 온 지 2년이 되어간다. 공부는 못해도 좋으니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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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기준(그래픽 디자이너)

에세이 『저, 죄송한데요』를 썼다. 북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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