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 우리 사랑해도 될까요?
정말 좋은 세상은 다름과 다름끼리 서로의 영토를 존중하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때 가능해진다. 그럴 때 세상은 비로소 온전한 '사랑의 모양'을 갖추는 것이다.
글ㆍ사진 허남웅(영화평론가)
2018.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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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의 한 장면

 

 

좋은 괴수물은 시대를 소환하거나 혹은 반영한다. 다시 말해, 괴수는 시대의 산물이다. 괴수의 정체를 살피는 건 그 시대의 욕망을 살피는 것과 같다. 괴수물 이야기로 서두를 연 건 바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하 ‘<셰이프 오브 워터>’)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괴수가 사는 곳은, 더 정확히 말해 감금된 곳은 미국 항공우주 연구 센터의 비밀 실험실이다. 때는 1960년대. 맞다, 미국과 구(舊)소련의 우주 개발 경쟁이 한창이던 시기다. 그럼 이 영화는 1960년대 당시의 사회적 욕망을 살피는 건가? 아니다, 일단 좀 더 내용을 살펴보자.

 

미국 항공우주 연구 센터가 비밀리에 괴생명체를 포획해 온 건 인간과는 다른 피부 조직을 살펴 이를 우주 계획에 적용, 소련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다. 인체 실험이 목적인 만큼 이 괴수에게 인권, 아니 괴수권(權)이 있을 턱이 없다. 이 실험의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는 전기봉으로 때리고 찌르고 틈만 나면 괴생명체를 괴롭힌다.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지 괴수가 방어 차원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 스트릭랜드의 손가락을 동강내기까지 한다.
 
청소부 엘라이자(샐리 호킨스)는 피투성이 실험실을 깨끗이 하던 중 온몸이 비늘로 덮였지만, 사지는 인간과 같은 괴생명체를 보고 호감을 느낀다. 도시락으로 싸 온 삶은 달걀을 두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을 들으며 식사를 함께 나누는 등 급속도로 친해진다. 그러면서 엘라이자는 스트릭랜드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괴수에게 자유를 주려고 탈출 계획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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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의 한 장면

 

 

흔히 괴수물의 괴생명체는 인간 문명을 파괴하는 악의 존재일 때도, 주류 사회에 속하지 못한 소수자의 처지를 은유하기도 한다. 후자의 세계관에 기울어져 있는 <셰이프 오브 워터> 는 극 중 괴수로 대표되는 소수자와 이들의 상급자인 스트릭랜드의 대립을 이야기의 전선 삼아 지금 이 시대에 유의미한 메시지를 밝힌다.

 

2018년에 1960년대 배경을 소환한다는 건 시대의 퇴행적인 면과 관련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의 권력 관계를 살피면 미국 백인 남성이라는 강자의 소수자 억압이 시퍼런 멍처럼 두드러진다. 멕시코 이민자를 특정한 국경의 장벽 세우기, 트랜스젠더 군 복무 금지와 같은 성 소수자 차별, 거지소굴과 같은 비열한 단어를 동원한 흑인 비하와 같은 인권 말살의 언행과 정책이 트럼프를 위시한 미국 권력층의 헤게모니로 자리 잡았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인물 간 권력 양상은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성별과 인종과 젠더의 역학 관계를 반영한다. 숱한 무기를 두고도 의미심장하게 ‘봉’을 앞세워 폭력적인 남성성을 드러내는 스트릭랜드의 욕망은 앞으로 내세우는 이미지와 뒤로 감춘 속내가 비열하게 꼬여 있다. 컬이 강조된 금발의 아내와 강아지 같은 딸과 아들과 함께 하는 전원주택에서의 생활은 모범적인 중산층 가족의 전형을 과시한다. 집에 있는 동안 잠시 유예해둔 포악한 성정은 ‘비밀’ 실험실에서는 결코 비밀이 아니다.

 

스트릭랜드의 앞뒤 다른 면모는 자신의 지위를 기준으로 윗분과 아랫것을 확연히 달리하는 태도에서 맥락이 일치한다. 그에게 상관은 계급장이 높은 백인 남성에 한정한다. 그 외의 모든 비주류, 즉 들을 수 있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 엘라이자와 청소부 동료이자 흑인인 젤다(옥타비아 스펜서)와 백인 남성이지만, 동성을 사랑하는 엘라이자의 이웃집 화가 자일스(리차드 젠킨스)와 중남미(이 영화를 연출한 기예르모 델 토로는 멕시코 출신이다!)에서 산 채로 잡아 온 괴생명체는 스트릭랜드의 권력 그물 안에서 제멋대로 다뤄도 좋을 폭력의 먹잇감이다.

 

스트릭랜드의 눈 밖에 난 비주류들에게는 수면 위보다 아래가 숨쉬기에 더 적합한 세계다. 국내 개봉명의 부제가 ‘사랑의 모양’인 것과는 다르게 원제가 ‘물의 형태 The Shape of Water’인 배경이 이에 있다고 본다. 물은 가장 투명한 형태다. 모든 것을 투과하고 받아들인다. 차별과 배제와 같은 불순의 요소가 끼어들 틈이 없는 다양성의 생태계를 구축한다. 그래서 가장 평등한 세계다. <셰이프 오브 워터>가 메인 포스터의 이미지로 앞세우는 물속에서의 엘라이자와 괴수의 결합, 에둘러 말할 것 없이 이들의 섹스는 종을 초월하고 성의 개념을 확장한다.

 

수면 아래에서 이뤄지는 엘라이자와 괴수의 사랑은 손에 쥘 수 없는 물의 형태처럼 기계적으로 확정되지 않는다. 이들뿐 아니라 사랑 자체가 실은 물의 속성처럼 한정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어서 특정 기준을 들어 규정하려 들 때 차별이 발생한다. 차별은 사람을 구별하고 정상과 비정상을 인위적으로 갈라 폭력의 세계를 형성한다. 그럴 때 한쪽의 괴수는 파괴의 신으로 군림하고(스트릭랜드처럼!) 나머지 ‘괴수’들’은 다르다는 이유로 평등의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

 

하나 되는 세상은 듣기에는 좋아도 환상일뿐더러 다르다의 개념이 틀리다로 왜곡될 때 소수자에게는 엄청난 폭력으로 작용한다. 세계는 성별과 인종과 젠더 등 존재하는 사람의 수와 정확히 일치하는 다양성으로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 세상이 매일같이 시끄러운 이유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이 그 힘을 과시하려 폭력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처럼 트럼프 시대의 미국을 삶의 터전 삼아 살아가는 비주류가 느끼는 위기감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 폭력의 시대는 결국 괴수를 불러내고 괴수의 존재가 시대의 정체를 인식시킨다. 시대는 인간과 무관한 채 중립적으로 그의 시간을 가지 않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시대와 방향을 달리 해 실재하지 않는다. <셰이프 오브 워터> 는 수면 위와 아래의 경계가 일방적으로 파괴되는 상황에서 사랑의 신화를 앞세워 시대의 탁류를 영화적으로 정화한다. 정말 좋은 세상은 다름과 다름끼리 서로의 영토를 존중하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때 가능해진다. 그럴 때 세상은 비로소 온전한 '사랑의 모양'을 갖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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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기예르모 델 토로 #엘라이자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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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잎미경

2018.02.25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그 감동을 주체하지 못한 채. 내가 아는 지인들에게 무조건 보라고 추천했다. 적어도 자신의 삶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사랑은 그 어떤 이유로도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감정이라는 것을. 사랑은 그 어떠한 경계도 장벽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서 무한한 감동을 얻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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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