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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액션 영화의 외투를 입은 역사 영화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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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소비도시 경성은 이면에서 보면 결핍의 도시였다. 식민지에 왜곡되게 이식된 자본주의는 대다수 조선인을 가난으로 내몰았다. 경성은 조선 사람의 희생 위에 친일을 선택한 자와 일본인들만이 그 세련됨을 만끽할 수 있는 도시였던 셈이다. (2018. 0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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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암살>의 한 장면

 

 

 

최근 한국 영화계에는 근현대사를 다룬 역사 영화가 많이 나오고 있다. 역사 영화 하면 대개 사료가 풍부하고 역사적 평가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많았지만, 얼마 전 개봉한 <1987> 에 이르기까지 최근 몇 년 새 20세기 역사를 다룬 영화가 부쩍 늘었다.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이러한 영화 제작의 물꼬를 튼 영화가 바로 <암살>  (2015년 작, 감독 최동훈)이다.


<암살>  은 개봉 당시 관객 1270만 명을 동원하는 흥행몰이를 하였을 뿐 아니라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와 확연히 다른 주제와 내용을 담았다는 데서 의미를 가진다. 2000년대 초반에 개봉된 일제강점기 영화들이 대개 1930년대 이른바 ‘모던시대’라는 흐름을 주요한 재미로 가져오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슬쩍 끼워 넣는 식이었다면, <암살> 은 ‘모던’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가져오되 이에 대한 비판은 잊지 않았으며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다루면서도 대중성을 놓치지 않아 소위 애국심 하면 ‘국뽕’이라는 인식을 전환시켜준 공도 크다. <암살> 의 성공 이후 한국 영화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독립운동가의 면면이 재조명되거나 일제의 폭압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영화가 다수 제작되었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2000년 대 초반에 만들어진 한국 영화는 일제강점기를 다소 애상에 젖은 역사관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짙었다. 2000년에 개봉한 <아나키스트>, 2008년에 개봉한 <모던보이>, <라듸오 데이즈> 등은 1920~1930년대의 모던은 주요하게 이야기하면서도, 결말 부분에서 다루긴 하지만, 독립운동을 전면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컸다. 일제강점기의 주적인 친일파나 일제의 폭압에 대해서도 피상적으로 그린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암살> 은 액션이라는 흥행 영화의 외투를 입고 있었지만 당시 한반도를 점령하고 세계대전을 일으키려 했던 일제의 무도함을 정면으로 보여주고, 역사에서 잊혀가던 무장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호명하고 그들의 삶을 재조명하면서 일제강점기라는 엄혹한 시대를 되돌아보게 했다.

 

 

1930년대 항일 무장 독립운동가들의 부활

 

친일파를 암살하기 위해 만주에서 경성으로 오는 주인공 안옥윤(전지현 분)은 1930년대 무장 독립운동계에서 활약했던 여러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생애와 활동을 재구성하여 만든 인물이다. 이 또한 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발굴이자 소개라고 볼 수 있다.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흔히 남성을 떠올리고 여성은 보조적인 역할로 생각하는 선입견을 깨고 실존했던 여성 독립운동가의 면면을 조합하여 영화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탁월한 역사의식의 발로라고 생각된다.


<암살> 의 주인공 안윤옥은 여성 독립운동가 가운데 대표적으로 남자현 여사(南慈賢, 1872~1933)를 떠올리게 한다. 안옥윤과 나이 차가 꽤 나지만 남자현 여사는 서간도 지역에 있던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였다. 남 여사는 1925년 만주에서 국내로 잠입,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858~1937)의 암살을 계획하였고, 1933년에는 일본괴뢰 만주국의 사실상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관동군 장군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 1868~1933)를 살해하려고 폭탄과 무기를 휴대하고 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순국하였다.


남자현 여사 외에도 우리 역사에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권기옥과 의열단을 조직한 김원봉의 배우자이자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 총을 들고 무장독립운동의 일선에 섰던 박차정, 평안도 안주에서 일본인 경찰을 사살하고 평남도청에 폭탄을 투척한 안경신 등 이름이 조금이나마 알려진 인물 외에도 역사 속에 묻혀 드러나지 못한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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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살>의 주인공 안윤옥과 가장 유사한 인물인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출처: 위키피디아

 


영화에서는 주인공 안옥윤 외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던 독립운동가의 인간적인 면 등이 유쾌하게 소개된다. 안옥윤의 조력자인 속사포(조진웅 분)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마지막 졸업생으로 소개되는데, 신흥무관학교는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서간도 지역에 설립된 독립군 양성 학교였다. 교육 목표는 독립군을 이끌 고급 지휘관을 양성하는 데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9년 3?1 운동 이후에 정식으로 세워졌지만 그 뿌리는 대한제국 말기 신민회(新民會)까지 소급된다.


민족운동 단체이자 비밀 조직이었던 신민회는 1909년 국운이 점차로 기울어가자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고자 이동녕, 이회영 등을 만주에 파견하였다. 1911년 만주에 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세운 이들은, 민족 교육과 군사 교육을 실시하는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이 신흥강습소가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다. 신흥강습소는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의 많은 청년이 독립의 뜻을 품고 몰려들면서 정식으로 군사 교육을 하는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였다. 이때 대한제국 말기, 국가의 지원을 받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지청전(池靑天, 1888~1957)과 김경천(金擎天, 1888~1942) 등이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참가하였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친일파가 되어 일본군 장교로 영달할 수 있었지만 그런 오욕의 삶을 선택하지 않고, 대신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풍찬노숙의 독립운동에 기꺼이 삶을 헌신하였다. 안타깝게도 신흥무관학교는 일제의 탄압, 일련의 사건 등으로 1920년에 폐교되고 말았지만 짧은 기간 동안 무려 2,100여 명의 독립군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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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흥무관학교의 교관 김경천. 출처: 위키피디아

 

 

실제 이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김좌진의 청산리전투와 홍범도의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고, 이후 우리나라 무장독립운동의 역사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1940년에 조직된 광복군에서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역할이 컸다. 영화 속 캐릭터인 속사포가 졸업 때 썼다고 소개되는 시 “낙엽이 지기 전에 무기를 준비해 압록강을 건너고 싶다”는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낸 김경천의 일기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 에 나오는 구절이다.


헝가리인 마자르에게 불법 폭탄 제조술을 배웠다는 황덕삼 또한 독립운동가들이 헝가리인을 통해 폭탄 제조술을 배우고 체코 군단의 무기를 사들인 실제 일을 참고하여 탄생한 캐릭터이다. 당시 세계는 1차 대전 전후의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던 헝가리나 체코 등의 혁명가, 독립운동가 혹은 군인들이 중국이나 러시아 등지에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를 만났고 그들 사이의 교류와 의기투합이 빈번히 일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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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에서 속사포(조진웅 분), 안윤옥(전지현 분), 황덕삼(최덕문 분).

 

 

화려한 소비도시 경성, 그 이면의 결핍

 

<암살> 은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30년대 경성의 모습도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 암살단의 목표가 되는 극렬 친일파 강인국(이경영 분)의 집은 친일파였던 한상룡(韓相龍, 1880~1947)이 지은 가옥에서 촬영되었다. 한상룡은 영화 속 캐릭터인 강인국 이상으로 친일을 했던 인물로 일제강점기 조선 제일의 재계 인사를 운위하며 나라를 배신하고 동족을 팔아먹은 대가로 호의호식한 인물이다. 1913년 그는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2,460㎡(약 744평)에 달하는 부지에 압록강에서 벌목해온 흑송으로 전통 방식과 일본 양식을 접목한 집을 지었다. 영화에서처럼 한상룡은 이 집을 친일 악행의 산실로 삼고 총독을 비롯한 일제 고위관료를 초대하여 연회를 열었다. 실제 미국 재력가인 록펠러 2세도 이곳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 집의 이름이 오늘날 ‘백인제 가옥’이 된 것은 백병원의 창립자인 백인제(白麟濟, 1898~?)가 1944년 이 가옥을 사들였고 2009년까지 백씨 집안에서 보전해왔기 때문이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르기도 한 백인제는 국내 최초로 신장 적출 수술에 성공하는 등 조선 제일의 외과의사로 명성이 높았고, 해방 후 백병원을 설립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백인제 가옥’은 최근 서울시가 역사가옥박물관으로 재정비하여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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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민속자료 제22호로 지정된 백인제 가옥. 사진은 사랑채.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탈


 

한편, <암살>에서 안옥윤이 쌍둥이 언니 미츠코와 재회한 백화점은 1930년 경성에 세워진 일본 미츠코시 백화점의 경성점인데, 이 건물은 지금도 남대문 인근에서 백화점 건물로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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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미츠코시 백화점 경성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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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살>에서 재현한 미츠코시 백화점 경성점

 


일제강점기 경성은 청계천을 기준으로 조선 사람이 살았던 북쪽과 일본인이 신시가지를 형성하고 살았던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1930년대 당시 청계천 남쪽 지역을 북촌에 대응해 남촌이라고 불렀고, 남촌은 본정통(本町通, 지금의 충무로), 명치정(明治町, 지금의 명동) 등 남산 기슭의 일본인 상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지역은 일본이 정책적으로 개발한 곳이니만큼, 일본식 가옥, 미츠코시나 조지야 같은 일본 백화점과 근대 건물이 세워졌고, 일본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문물이 포진해 있었다. 영화 속 안옥윤의 쌍둥이 언니 미츠코가 옷을 맞추고 쇼핑을 하는 장소가 바로 이 남촌 지역이다.


암살단 조력자인 <아네모네>의 마담(김해숙 분)은 겉으로는 카페를 운영하면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한다. 이 이름은 주요섭의 단편 소설 「아네모네 마담」(1932 발표)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1930년대 당시 카페는 근대적 여가 장소로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남촌의 남산 기슭을 중심으로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한 속에서 양장을 입은 ‘웨이츄레스’가 술을 나르는 카페가 골목골목 번창했던 것이다. 이들 남촌에서 노는 부류를 ‘혼부라’라고 비아냥거리며 부르는 말도 생겨났는데 혼부라란, 일본에서 도쿄의 긴자 거리를 떠도는 사람을 일컫는 긴부라에서 차용한 말이다. 남촌의 혼마치(本町)를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형상’(ぶらぶら: 부라부라는 일본어로 빈둥빈둥 돌아다니는 것을 뜻한다)을 비꼰 것이다.


당시 경성은 출구 없는 소비도시였다. 1930년대는 일제가 중국 대륙 진출이라는 무리수를 두면서 우리나라를 병참기지로 만들어가던 시기였다. 미국 발 공황은 세계 경제를 잠식하였고 식민지 조선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밖으로는 연일 전쟁이 터지고 국내적으로는 군수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일제의 가혹한 착취가 심화되던 시기였던 만큼 국내외의 분위기는 암담했다. 그 와중에 일제는 경성을 소비도시로만 키워갈 뿐 식민지 조선의 자생력을 키울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계획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화려한 소비도시 경성은 이면에서 보면 결핍의 도시였다. 식민지에 왜곡되게 이식된 자본주의는 대다수 조선인을 가난으로 내몰았다. 경성은 조선 사람의 희생 위에 친일을 선택한 자와 일본인들만이 그 세련됨을 만끽할 수 있는 도시였던 셈이다.


<암살> 에는 롤스로이스가 돌아다니는 거리에 헐벗은 조선인의 모습이 겹쳐지고, 칼을 찬 일본군이 자기 나라에서보다 더 주인같이 시가지 곳곳을 활보하는 가운데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조선의 어린 여학생들이 동원되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번쩍거리는 소비도시 경성의 그늘에 존재하는 조선인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당시 숨 막혔던 식민지 현실을 잘 재현해낸 것이다. 영화는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일장기에 경례를 하는 치욕의 경성 풍경 위로 왜 주인공들이 친일파를 암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지, 주인공 안옥윤의 대사처럼 왜 ‘계속 싸우는지 알려줘야 하는지’ 시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끝나지 않은 친일파의 역사가 왜 청산되어야 하는지도 일깨워준다.


화려한 액션과 감동적인 대사들의 향연으로 영화적 완성도를 높인 <암살> 은 그것에 더해 1930년대 경성, 우리의 암울하고 서글펐던 서울의 옛 모습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어 더욱 의미심장한 영화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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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정미(영화 시나리오 작가)

이화여자대학교 국사학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박사 과정 수료. 현재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공저), 『한 번에 읽는 역사인물사전』, 『한 번에 보는 세계인물사전』, 『천추태후』,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얻었는가』 『한국사 영화관』 등을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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