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의 해군
늙은 서점직원으로 바다의 시대를 맞이하고 싶다.
글ㆍ사진 김성광
2018.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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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직장에서 만 10년을 앞두고 있다. 한 직장에서 10년을 채운 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이지 아리송하다. 내게 잘 맞았다는 뜻이니 좋은 듯 하면서도, 너무 단조로운 커리어를 쌓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요즘 저자 프로필을 읽으면 퇴사 경험 한 번 없는 사람이 드물다. 십여 명의 입사동기 중에서 아직도 남아있는 건 단 세 명이다.

 

원래 일하고 싶던 곳은 출판사였다. 독자로서 동경했던 출판사들에 지원하기도 했다. 서점에 입사한 것은 계획에 있던 일은 아니었다. 친구가 공고를 알려주어서 생각해보게 되었고, 손때가 잔뜩 묻은 교정지에 고개를 파묻은 모습만큼이나 온갖 책들 사이에서 비명을 지르는 모습도 낭만적으로 보였다. 나이브한 이미지에 의지한 채 지원을 했고, 운이 도왔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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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부터 서점에서 일하는 게 재밌었다. 드넓은 책의 세계에서 내가 얼마나 구석진 자리에 머물러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매일 도착하는 가지각색의 책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다. 어떤 날은 아름다운 문장을 탐하고, 어떤 날은 세계의 운명을 걱정했다. 어떤 날은 먼 옛날의 광대한 제국을 떠올렸고, 어떤 날은 우주의 먼지와 몸 속의 유전자를 상상했다. 주중에는 컴팩트한 책을 후루룩 읽으며 출퇴근 했고, 주말에는 두꺼운 책을 펼치고 밑줄을 수백 개 그어가며 읽었다.
 
독자들도 큰 자극이 되었다. 온라인 서점이라 독자를 직접 대면하지는 않지만 독자의 움직임은 실시간으로 전달된다. 자산시장의 변화에 따라 부동산 책이 뜨기도 하고 주식 책이 뜨기도 했고,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 변화하면서 자기계발 독자와 인문학 독자가 섞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변화에 대한 기대는 『정의란 무엇인가』『닥치고 정치』  『안철수의 생각』 같은 책으로 전달되었다. 아날로그에 대한 독자들의 목마름은 『초판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열풍으로 서점에 유입되었고, 여성들의 목소리는 서점가에 페미니즘 도서 붐을 일으키고 있다.

 

비단 베스트셀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책의 작은 오르내림에도 사람들의 욕망과 관심사가 반영되어 있고, 나는 세상의 복잡한 무늬를 볼 수 있는 현미경을 얻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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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기만 했을 리는 없다. 내가 좋아하던 저자의 예상치 못한 민낯을 보기도 했고, 독자로서 좋아하던 출판사를 더 이상 좋아할 수 없게 되기도 했다. 그런 글을 쓴 사람이, 그런 책을 출간한 곳이 어떻게… 라며 탄식했던 사건이 10년의 시간 동안 간혹 있었다. 언제나 책이 열어주는 인식의 길에 찬탄을 표했지만, 그런 날엔 책이 올바른 인식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이 내놓은 너무나도 훌륭했던 책은 그들을 위한 훌륭한 방패가 되곤 했다.

 

늘 책에 에워싸여 있었지만 책에 대한 갈증이 오히려 커지기도 했다. 사실 가장 아쉬운 것은 이부분이다. 독자로서의 나는 나름의 취향을 가진 존재다. 하지만 직원으로서 손이 많이 가는 책은 다르다. 주문이 많은 책일수록 손이 더 많이 갈 수밖에 없다. 업무과 취향의 종합을 꾀하면서 일하려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확실히 깨달은 사실은 내가 좋아하는 책들은 대개 요즘의 트렌드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최근 뜨겁게 솟구치거나 꾸준한 사랑을 받는 책으로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신경 끄기의 기술』  『자존감 수업』  『약간의 거리를 둔다』 같은 책들이 있다. 주변의 사람이나 상황이 내게 가하는 압력들로부터 나를 적절히 지켜내는 법에 대해 사람들은 관심이 많다. YOLO나 워라밸과도 이어지고 저출산과도 하나의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퇴사 관련 책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연결된다.

 

이런 책들의 인기는 그 자체로 주목할 사회적 현상이고 나도 이 책들에 관심이 많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이런 압력을 낳는 세상의 큰 구조나 이런 압력을 이완시키기 위한 구조 변경에 관심이 더 많다. 하지만 내가 꽂히는 책의 대다수는 요즘 그리 인기를 얻지 못한다. 정권이 바뀌는 큰 변화가 진행되는데도 그랬다. ‘구조’나 ‘체제’ 같은 단어는 학술서가 아니라면 책제목으로 가장 기피되는 단어 중 하나다. 소설가 김성중의 말을 빌리면 ‘바다의 시대’는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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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 국가인 볼리비아에는 묘하게도 해군이 있다. 패전 후 영토를 뺏기고 남미 최빈국으로 전락한 볼리비아는 자신들의 지도에서 바다가 사라진 이후에도 해군을 해체하지 않았다. 오늘날 볼리비아 해군은 해발 삼천팔백십 미터에 있는 티티카카 호수에서 배를 탄다. 2년 전 내가 티티카카에 갔을 때 바다없는 해군들은 하얀 제복을 입고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었다.
 
문학이 전체성의 바다를 잃어버린 후에도 작가들은 호수에 배를 띄우고 훈련을 한다. 더 이상 도스토옙스키나 멜빌, 마르케스처럼 인류 자체를 폭로하겠다는 야심과 역사를 하나의 캐릭터처럼 간주하는 포부와, 위대함에 대해 쓰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 작가들은 사라진 게 아닐까. 정확히 말해 그런 작가들이 탄생할 수 있는 바다의 시대는 지나가버리지 않았는가라는 의심을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독자가 품고 있는데도 말이다.
- 김성중, 『국경시장』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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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의 시대’가 지나간 후 서점에 발들인 것이 아쉽지만, 그래서 나는 서점에서 되도록 오래 일하고 싶다. ‘볼리비아의 해군’(3년 전에 읽은 이후 이 말이 잊혀지질 않는다)처럼 계속 배를 띄우고 싶다. 파도란 밀려 왔다가 쓸려 나가고, 또 다시 밀려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나는 늙은 서점직원이 되어 바다의 시대를 맞이하고 싶다. 그때까지 나의 독서를 꾸준히 밀고 나가는 ‘볼리비아의 해군’이 되고 싶다.

 

서점 직원, 특히 온라인 서점 직원은 인공지능이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자리다. 각 도서의 주문수량이나 개별 독자의 취향에 맞춤한 책을 추천하는 일은 잘 설계된 알고리즘이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간 시대를 회고하는 것, 다시 바다의 시대가 오기를 기대하며 지금 주목받지 못하는 책을 읽고 추천하는 것, 이것을 인공지능이 할 수 있을까? 트렌드를 무시하지 않되 트렌드와 거리가 있는 일을 꾸준히 지속할 수 있을까?

 

기술적 변화와 업계의 경쟁과 경제의 구조 속에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단조로운 커리어를 유지하며, 한 장 한 장 책을 읽으며, 업계의 좋은 분들께 가르침을 받으며, 서점 직원으로 늙어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늙은 서점직원’ 그리고 ‘바다의 시대를 기다린다’는 말에 깃든 낭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참 나이브한 이미지를 그리며 미래를 기약하고 있다. ‘볼리비아의 해군’이라는 말을 자꾸 스스로에게 덧씌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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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 해군 #티티카카 호수 #정의란 무엇인가 #닥치고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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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광

다행히도, 책 읽는 게 점점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