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제목이자 이 책의 부제는 세상에 틀린 불편함은 없다거나, 나쁜 불편함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이 비록 최종적으로는 잘못된 것으로 판명 난다 할지라도, 무시하고 공론장 안에서 배제해도 되는 불편함은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상식처럼 통용되는 어떤 표현이나 담론, 관습에 대해 누군가 불편함을 느낄 때 그 불편함에 대해서 성의 있게 논의하지 않으면 그것이 틀렸는지 맞았는지 따져볼 기회조차 없기 때문이다.
- 위근우, 『프로불편러 일기』 중에서
지난 5일 마포구 카페 비플러스에서는 위근우 작가의 『프로불편러 일기』 출간 기념 북 콘서트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월간잉여>의 편집장이었던 최서윤 작가가 함께 했다. 스스로를 ‘프로불편러’로 자처한 두 사람은 관객들과 가벼운 인사를 건네며 ‘불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중은 ‘불편’을 느끼는 사람을 과도하게 예민한 사람으로 몰고 있지만, 오히려 이는 문제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대중의 잘못이라는 것. 작가는 개인이 느끼는 불편은 타인이 느끼지 못한 문제점을 발견한 것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개인을 과도하게 예민한 인간을 뜻하는 ‘프로불편러’로 몰고 가는 사회적 인식에는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작가의 말에 청중들은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행사에 모인 이는 모두 ‘불편’이라는 소재에 관심과 공감을 가진 이인만큼 그들은 작가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행사장을 가득 채운 이들은 모두 하나의 ‘프로불편러’로서 사회의 편견과 그 해결 방법을 논의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청중의 뜨거운 관심 속에 곧 두 작가의 대담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위근우 X 최서윤 대담
최서윤: 오늘 우리 사회에서 ‘프로불편러’라는 단어는 부정적 뉘앙스로 불리고, 많은 이가 그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프로불편러로서 작가님이 경험하신 편견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위근우: 가끔 사람들이 쟤(위근우)는 왜 이렇게 예민하지,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는데 억울하긴 하지만 틀린 얘기는 아니에요. 제가 실제로 예민한 성격인 건 맞으니까. (웃음) 다만 제가 모든 이야기를 여성 혐오적 맥락에서 해석한다는 의견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같아요. 작년에 한 스타가 욱일기 사진을 올려 비난을 받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 당시 많은 사람이 (사건 자체를 논하지 않고) 그 스타가 명품 백 사진을 올린 것에 대해 비난을 했어요. 개인이 잘못한 것과 별개의 문제를, 그것도 명품 백과 관련해 갑작스레 비난을 퍼붓는 것은 분명 여성 혐오적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일이었죠. 그래서 그에 대한 발언을 했는데 (모든 일을 여성 혐오와 연관시킨다는) 그 같은 반응이 나와 무척 놀랐습니다. 제가 모든 일을 여성 혐오와 연관시켜 말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 혐오와 관련되지 않은 일을 찾기가 더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최서윤: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논리적인 글을 썼는데, 오히려 그 같은 (논점에서 벗어난) 반응을 받으면 무력감이 굉장히 클 것 같아요. 설득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대할 땐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위근우: 기자로서 논증이라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려고 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실제로 논증이라는 게 사람을 바꿀 수 있느냐’는 질문이에요. 과연 논증을 통해 실제로 사람을 바꿀 수 있느냐는 거죠. 저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어떤 문제에 대해 성실히 답해서 한 명의 사람이라도 마음을 바꿀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무척 많거든요. 이를테면 SNS에서 말싸움을 할 경우, 많은 이가 상대방의 논리를 최대한 피하면서 대화를 끝까지 이어가면 승리한다고 믿는 모습을 보이고 있죠.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이런 상대를 만나면 좌절스럽지만, 그럼에도 제가 논증을 포기하지 않는 건 대화를 보는 제삼자가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당장 이 사람이 설득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대화를 보고 있는 사람에게 제 생각이 더 논리적으로 옳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거죠. 그런 과정에서 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바꿀 수 있었다면, 제 글에도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다만 이것과 별개로 저 스스로도 논증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논증만 하기보단, 미문을 통해 마음을 흔들 수 있을 때도 많거든요. 상대를 설득할 때 있어 가장 좋은 방법은 논증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표현을 논증과 적절히 합쳐 활용했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최서윤: 저는 스스로 아마추어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한 조직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창작 방식을 통해 제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런 아마추어의 정체성을 가진 제가 처음으로 프로로 인정받은 건, ‘프로불편러’로 불렸을 때였어요. (웃음) 이렇게 쉽게 프로가 될 수 있다니, 기분이 좋았던 한편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과연 나는 프로불편러가 될 자격이 있으며, 프로불편러란 무엇일까.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성실한 논증과 감정을 자극하는 미문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프로불편러는 이 두 가지를 갈고닦는 사람일까요?
위근우: 프로불편러가 되는데 별도의 자격은 없습니다. (웃음) 프로불편러라는 말은 애초에 다른 이들이 느끼지 못하는 문제의식을 지적한 사람에 대한 멸칭으로 시작된 말이니까요. 저널리즘, 즉 지금껏 제가 누군가를 비판하려 했던 작업 역시 넓게 봤을 때 프로불편러라고 볼 수 있겠죠. 사회의 부정적 시선과 상관없이, 저는 이 같은 프로불편러가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 생각해요. 사회에서 비판자는 굉장히 오랫동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거든요. 그 역할을 최서윤 작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스스로를 ‘프로’로 부르는 능동적 자세로 수행한다면 정말 긍정적인 일이겠죠. 너무 큰 의미나 의무를 둘 필요는 없겠지만, 그에 따라 자신을 맞춰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불편함이 용인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 불편함은 내가 잘못 생각해서 (또는 편견으로) 일어난 것일 수도 있죠. 불편함을 대할 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편하다는 느낌만을 가진 채 생각을 멈추는 것도 위험한 일이에요. 개인은 왜 자신이 그 같은 불편함을 느꼈는지 생각해보고, 자신의 불편함이 온당하다는 결론이 나면 상대방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적극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정리된 생각을 상대방에게 직접 얘기할지는, 또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겠죠. 서로 서있는 자리가 다르고,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다른 법이니까요.
최서윤: 문제를 직감하는 순간 개인에게는 크게 두 개의 선택지가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직접 말하거나, 안 하고 참는 거죠. 후자의 경우 상대방과 마찰을 겪을 일은 피할 수 있겠지만, 문제가 야기된 ‘구조’ 자체를 깰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위근우: 작가님 말처럼 전자의 경우는 일상을 살아갈 힘은 얻을 수 있어도 (일상의) 구조를 깨기는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를 택한다고 해서, 과연 개인이 구조를 바꿀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거든요. 이 같은 싸움을 견딜 수 있는 개인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사적인 곳’에서는 굳이 싸울 필요 없다는 겁니다. 사회적 자아로서 우리에게는 이미 어쩔 수 없이 맞이해야 하는 부분이 많이 있거든요. 이 피할 수 없는 고리를 인내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엄청난 에너지를 써야만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내 사적인 시간을 기울여가며, 얼마 없는 인내심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죠. 그보다 사적인 시간에는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며 일상을 살아갈 힘을 키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요.
최서윤: 친구가 얼마 없어서인지 작가님 말씀에 공감이 갑니다. (웃음) 그렇다면 사적 영역이 아닌, 이를테면 조직의 문제를 생각해보도록 하죠. 생계를 위해 계속 조직에 머물러야만 하는 사람(군대의 이등병과 같은)이 지속적으로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는 매일 인내심을 잃는 셈인데, 이 경우는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요?
위근우: 그 경우는 개인에게 조언을 해주기 어려운 부분이라 생각해요. ‘구조’ 문제는 개인의 선택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이도 자유롭게 참가해 의견을 펼칠 수 있는 ‘공론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이등병이 됐든, 후배가 됐든 내가 겪은 불편함,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없거든요. <메갈리아>라는 사이트가 자신의 주장을 과격하게 드러낸 것 역시 (차근차근 말할 수 있는) 이 같은 공론장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러한 공론장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외부적 전제가 선결되어야 합니다. 자유로운 토론에 대한 규범적인 기대, 자유주의적인 정치문화, 민주적인 갈등 해소 절차가 그것이죠. 가령 간단히 군대라는 곳을 보아도, 그곳은 결코 민주적인 갈등 해소 절차가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것이 절대 저절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그 과정이 수행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강제력이 필요하죠. 이점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 즉 군대, 후배, 여성 문제 등에 대해서 개인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개인으로서는 이러한 일을 수행하기 어려운 만큼, 저를 포함한 언론 종사자들은 (공론장에 대한 주장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이 문제에 대해 맡아야 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다시 한 번 밝히지만 구조 차원의 문제는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지 못하는 개인을 쉽게 비판하거나 지적하도록 강요하긴 어렵다고 봐요.
최서윤: 설득이 통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는 그 대상이 느끼기엔 폭력적 방식일지라도 조직적인 싸움, 힘이 필요한 거군요. 방금 전 말씀하셨던 일상에서의 ‘힘’을 채워놔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위근우: 사적인 시간에 원하는 일만 할 수 있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의무를 위한 관계를 굳이 유지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저도 친구는 얼마 없거든요. (웃음) 편하게 술을 마시는 사람은 세 명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최서윤: 그렇군요.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본인이 ‘노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위근우: 재미(잼)란 건 다양한 것이기 때문에 저도 재미있는 사람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사회적인 재미와 제가 생각하는 재미는 다를 수 있겠죠. 재미란 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지만, ‘노잼’은 확실히 쓸데없이 진지하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 같긴 하네요. 만약 노잼의 의미가 그런 것이라면 저도 노잼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웃음) 저 개인적으로는 매우 떳떳하지만요.
최서윤: 본인이 생각하는 재미의 의미가 다른 이와 다를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재미는 무엇인가요?
위근우: 일단 불편한 건 재미없어요. 불편한 걸 보고 웃고 싶진 않으니까요. 윤리적인 게 충족되어 있지 않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같아요. 예전엔 분명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라는 게 있었어요. 강용석씨의 <고소한 19> 같은 프로그램은 저도 참 재밌게 봤었거든요. 불편하긴 하지만 웃기긴 하다고 생각했었죠. 마찬가지로 웹툰 <마음의 소리>도 제가 참 좋아하는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이제 이런 것들을 다시 보면 (마음에) 걸리는 게 많더라고요.
최서윤: 혼자 있을 땐 재미있게 보시다가 남들이 보면 다른 태도를 취하시는 건가요?
위근우: 선한 마음의 눈치를 본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 작품을 볼 때면 웃으면서도 마냥 웃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사회에는 옳지 않은 소리를 하면서도 재미있는 작품이 참 많잖아요. 그런 작품을 보고 웃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도 어려운 일일 거에요. 당장 그것을 보고 웃음을 멈추기 어렵다면, 웃더라도 어떤 부분이 확실히 잘못됐다는 사실만큼은 인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사실을 인식하고도 (작품이 재미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신다면, 작품을 올바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단순히 문제를 인식하는 것만으로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가지 시진 마시고요.
최서윤: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문득 질문이 하나 더 생각납니다. 작품에 대해 비평하는 사람들을 창작에 ‘기생’하는 존재로 여기며, 재미나 아름다움을 알면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창작자들이 간혹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에서 나온 태도일 텐데요, 작가님은 비평가로서 그런 창작자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위근우: 자연이라는 세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과학이 필요하듯,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선 비평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어요. 비평이 과학만큼의 권위를 가질 순 없겠지만, 어떤 작품도 해석을 거치지 않고 존재할 순 없다고 생각해요. 어떤 의미에서는 텍스트도 해석에 기생하는 셈이죠. 세상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비평가의 존재 의무는 그에 대한 좀 더 성실한 해석을 제공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성실한 해석을 제공하는 게 창작물에 대한 무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 역시 비평가로서 많은 작품에 비판을 가한 바가 있습니다. 제가 그 작품들을 비판한 건 단순히 그 작품이 싫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 있는 피드백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창작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피드백을 줄 수 있어 좋은 거고, 설령 그들이 설득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작품을 보는 제 3자에게 문제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거겠죠.
최서윤: 작가님 본인의 높은 안목 때문에 작품에 너무 많은 비판을 가하시는 건 아닌가요?
위근우: 제 안목은 절대 높지 않고요. (웃음) 한 작품을 비판할 때 제가 갖출 수 있는 최대의 예의는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한 근거를 들어 말하는 거예요. 작품을 비판할 때 창작자의 기분을 의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최서윤: 작가님은 기자로서 경력을 쌓으셨는데, 혹시 기자를 꿈꾸는 이에게 조언을 줄 수 있다면 어떤 말씀을 하시고 싶나요?
위근우: 이런 질문을 들을 때가 가장 답하기 난감합니다. 제가 기자가 되기까지는 굉장한 운이 작용했거든요. 지금의 여러분과 제가 기자가 되려고 했을 때의 토대가 다르기도 하고요. 제가 졸업을 앞두고 구인사이트를 뒤졌을 때 미디어파트에 있던 일자리 개수와, 지금의 개수는 많은 차이가 있겠죠. 조언으로서는 별 가치가 없겠지만 제가 기자로서 취직하게 된 얘기를 해드릴게요. 제가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건 대학교 4학년 때였어요. 군대를 전역하고 한 사이트에 리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매달 우수 리뷰에 당선돼 책을 살 수 있는 포인트를 받을 수 있었죠. 그렇게 꾸준히 글을 쓴 후에는 골프잡지에서 첫 취직을 할 수 있었고, 그 뒤로 다른 회사에 이직했는데 그 회사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두 번째 회사가 망하기 전에 <매거진t>에서 연 공모전에 당선됐는데, 회사에서 제 글을 좋아해 기고할 기회가 생겼고, 나중엔 일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게 됐습니다. 그렇게 본격적인 기자 생활을 하게 되었죠. 지금 돌이켜 봐도 운이 무척 좋았네요. 글을 잘 쓰는 비법 같은 건 없지만, 본인이 공모(취직)하려는 대회가 있다면 전 회의 수상작을 보는 것을 추천해 드리고 싶어요. 전 수상작을 보고 매체가 좋아하는 문장 구성, 패턴 등을 파악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
프로불편러 일기위근우 저 | 한울
여성혐오와 일상의 폭력이 난무하고 “여전히 전근대적인 정치의식이 지배력을 발휘하고 반지성적 선동이 소위 정치적 진보 진영 안에서도 등장”하는 지금 이곳이 불편하지 않은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기자라는 직업은 필연적인 프로불편러”여야 한다고 말하는 웹매거진 [아이즈] 취재팀장 위근우가 섬세하고 치열하게 3년 반 동안 써온 글 85개를 선별하여 『프로불편러 일기』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었다.
이창호(예스24 대학생 리포터)
진심을 담아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