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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대리 운전을 부탁한다. 대리기사가 와서 내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데 딱 그 길목에서 음주단속이라도 하면 “만세!”를 외치게 된다. 본전을 몇 배는 뽑은 셈이니 말이다. 십여 년 전에 외국인 친구에게 대리운전에 대해서 설명을 하자 눈을 반짝이며 굉장히 재미있는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말하고는 바로 “넌 네 차를 남이 모는데 안심이 되니?”라고 되물었던 일이 인상적이었다.
그에게 처음 보는 타인에게 그것도 취한 상태에 운전대를 맡기고 집 앞까지 가게 하는 것은 꽤 위험한 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한국의 대리운전은 대부분 안전하고, 빠르고, 또 어떨 때에는 오고 가면서 택시를 타는 것보다 비용적 측면에서 저렴할 때도 있다. 가끔 이상한 기사를 만나서 비용 문제로 실랑이를 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안심하고 이용을 하게 된다. 더욱이 요새는 모 포탈에서 앱을 출시해 신용카드로 결제를 하게 된 덕분에 그런 실랑이를 할 이유도 없어져 편안히 이용하는 중이다.
그동안 내가 편안한 것, 내가 남에게 내 차의 운전을 맡기는 것이 안전한가에 대해서만 생각해왔지, 대리기사 본인의 심리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전작 『도시심리학』에서도 대리운전에 대해서 다뤘을 때 기사의 측면은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리기사의 삶이 사실은 현대인이 사회에서 생존하는 방식일지 모른다고 체험을 통해 통찰적 분석을 한 책이 등장했다. 김민섭의 ‘대리사회’다.
저자 김민섭은 만년 시간강사 생활을 하던 중에 페이스북에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글(세칭 지방시)을 309동 1201호라는 필명으로 연재하다 대학을 나와 프리랜서 작가가 된 사람이다. 그의 전작도 그렇듯이 이번 책도 그가 직접 체험한 내용에 인문학적 깨달음을 더한 것이다. 이전의 글이 시간강사라는 신분이 대학사회에서 비정규직, 경계인, 자기자리 없음을 대표하는 정체성이었다면 이번 책의 대리기사도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을만한 부분이 많았다.
그는 오랜 현대소설 연구와 글쓰기 교양과목 시간강사 일을 그만두자 생계가 막막했다. 우연히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대리기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에게 이 일은 새로운 세상의 경험이었다. 공부만 하던 책상물림이 휴대폰의 알림에 목을 매고, 조금이라도 빨리 콜을 받아 다른 경쟁자로부터 손님을 뺏기지 않기 위해 전력질주를 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 그가 만나던 사람은 대학사회안의 교수, 학생이란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존재들이 전부였다면, 이후 그가 대리기사를 하면서 만난 인간군상은 예측불허였다. 사장님부터 회사원, 불륜 커플에 만취한 진상손님까지 인간사회 삼라만상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택시에 탔을 때와 대리기사로 남의 차를 몰았을 때의 차이를 예민하게 느꼈다. 택시란 택시기사 본인의 공간이다. 자신이 꾸민 공간에 손님이 올라탄 것이다. 비록 손님이 원하는 곳으로 차를 몰고 가지만, 대화를 끌고 나가는 것도, 내리고 탈 선택도 기사가 갖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반해서 대리기사는 운전을 하는 시간 동안 타인의 차의 운전대를 잠시 점유했을 뿐이다. 불편하더라도 운전석과 사이드 미러를 조작하지 않은 채 원래 차주인의 그것에 세팅을 맞춘 상태로 운전을 해야 한다. 이 곳을 그는 ‘을의 공간’이라고 부른다. 대화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그 내용이 ‘정의롭다, 아니다’를 떠나서 그는 오직 ‘네’라고 답하고 맞장구를 쳐줄 위치에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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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강사로 교단에 섰던 저자로서는 대리기사로서 소통의 주도권 역전을 다른 누구보다 예민하게 인식한 듯하다. 그는 그의 강사 시절에 교수가 강의실의 유일한 주체로 말을 한다면 들으며 필기만 하는 학생은 지금 그가 대리기사로 행위 하듯 대리기사와 무엇이 다른지 묻는다. 강의실 밖을 나와야 비로소 사유와 발화의 자유를 되찾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리기사도 운행을 마치고 차에서 내린 다음에야 자신의 신체의 자유를 온전히 되찾고 사고의 자유도 가질 수 있다. 처음에는 낯설고 힘들다. 이런 일에 점차 익숙해지는 ‘순응’을 거치면서 어느 순간이 지난 다음에는 누가 나를 주체로 대우해도 익숙해진 몸은 오직 순응만 하는 객체가 되어버린다고 분석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타인의 운전석에 앉은 대리기사’와 다름없는 을의 공간이 직장, 학교, 가정 등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갑인 의사결정론자는 “자유롭게 얘기하세요”, “먹고 싶은 것 먹어”라고 말하지만 그 누구도 선뜻 자기 의견을 내거나, 회식이나 점심식사에 먹고 싶은 메뉴를 주장할 수 없다. 아이도 부모 앞에서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게 된 집안도 많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어릴 때 부모-자식, 학교에서 선생-학생, 직장에서 상사-부하의 관계에서 을의 공간에 순응 하는 방법만 배워왔다고 저자는 대리기사 생활을 하면서 깨달았다.
대리인간의 삶을 살고 있다. 자식은 부모의 욕망을 대리해서 그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롤 플레잉 게임’의 육성 캐릭터와 같이 살고 있다. 선생은 학생이 참신한 아이디어로 반항적인 도발을 하는 것을 용인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지식체계에서 붕어빵을 찍어내기를 원하고, 붕어빵1과 붕어빵2 사이의 작은 완성도 차이로 줄을 세운다. 회사에서는 사원에게 ‘주체적으로 일을 하라’고 주문하지만, 주체적으로 결정을 내리면 “네가 뭔데 마음대로 해!”라고 혼을 내고, 가만히 있으면서 시키는 일만 하면 “넌 도대체 몇 년 차인데, 아직도 일 하나 혼자서 못하냐”는 혼을 내기만 할 뿐이다.
우리 사회 모든 영역이 어찌 보면 대리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 중 하나는 대리기사만 있을 뿐 대리기사를 고용한 차 주인은 실체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부모나, 교사, 회사의 상사 그들 모두도 또 다른 대리기사들일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청과 재하청의 대리의 삶의 미션의 대물림은 디지털 사회이자 욕망의 자본주의 사회인 현대사회에서 한쪽방향으로 대물림이된다. 어느 순간부터 “00동으로 가주세요”라는 지시는 받지만, 그 지시를 하는 차주인 격의 시스템의 윗선들도 정작 왜 거기를 가야 하는지 모른 채, 그저 남들이 가니까 우리도 가야지라고 여기고 영혼 없이 관성적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차주인도 대리이고, 대리기사도 대리인, 대리인간으로 가득 찬 대리사회에서 대리가 아닌 주체성을 가진 인간이 되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런 물음에 대해서 자신을 둘러싼 구조와 마주하고, 주체가 되어 사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질문을 던지고 불편한 불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그가 대리사회란 책을 썼듯이 이런 아픈 질문과 사유를 하는 것만이 한 개인이 가진 사회적 책무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성찰이며, ‘대리사회의 괴물에게 잡아 먹히지 않은 개인’을 지키는 길이다. 그는 그러기 위해서는 한 걸음 물러서서 경계인이 될 용기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물러나봐야 시스템의 균열이 보이고, 그 균열의 확장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대리시켜 온 대리사회의 괴물을 만날 수 있다. 그제서야 인간은 ‘사유하는 주체’로 거듭나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모두가 대리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으면서 자신이 대리적 존재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서 주체를 각성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 모르지만, 꼭 필요한 일임은 분명하다는 것이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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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사회김민섭 저 | 와이즈베리
『대리사회』는 저자가 익숙하게 체험한 3가지 통제(행위, 말, 생각)를 바탕으로 괴물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노동 현장의 단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
lyj314
2017.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