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 다정한 사람들과 가만히 마음을 주고 받는 곳
떠나고 돌아오는 일을 거듭할수록 분명해지는 게 몇 가지 있다. 매년 휴가의 마지막 날이면 시계를 아무리 노려봐도 묵묵하게 제 갈 길을 가는 시간이 야속해지지만 역시 가장 든든하고 고마운 건 돌아갈 보통의 날들을 등 뒤에 두고 하는 여행이라는 것, 도시의 느낌과 나라의 인상을 결정짓는 데는 사람에 대한 기억이 생각보다 크게 작용한다는 것, 우리 모두가 시한부 여행자이기는 하나 사실은 그렇게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런 생각들이 깎이고 견고해지면서 여행은 점점 더 일상과 가까워지지만 오히려 낯선 공간에서 보내는 그 얼마간이 다음의 하루를, 일년을, 어쩌면 평생을 바꾼다는 것.
시인의 여행도 그런 생각들과 상당부분 닿아있다. 디어 슬로베니아는 한국문학 강의를 위해 슬로베니아로 파견된 시인이 그곳에서 보낸 92일을 담아낸 책이다. 전라도 크기의 국토에 인구 200만이 모여 사는 나라에서 보낸 세 달 가량의 시간. 그는 이 여행을 화려하거나 과장된 감정으로 포장하기보다 먹고 산책하고 누군가와 만나는 매일의 기록을 담백하게 들려주는 것으로 발칸의 이 작은 나라가 품은 매력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시인이 소개하는 슬로베니아Slovenia는 낭만적이다. 이름부터가 사랑love을 품고 있는데다 수도인 류블랴나에는 사랑스럽다는 뜻이 있단다. 류블랴나 곳곳에는 체코 프라하 성의 건축가로 잘 알려진 슬로베니아 출신 요제 플레치니크의 작품들이 산재해 있고, 그 위로 사랑하는 이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 무엇보다 도시 중심에 자리한 프레셰렌 광장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로맨틱한 도시를 마주하게 된다고 한다. 영화에서 본 붉은 지붕과 이국적인 노천 카페, 아름다운 야경과 종종 들려오는 길 위의 음악들까지. 책에 실린 사진들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 순간 스스로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책에서 느껴지는 슬로베니아의 또 다른 주요한 이미지는 ‘여유’. '특별한 계획을 세우며 많은 일들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숨 가쁘게 살고 싶지 않았다. 무심하고 나른하게 쉬면서 지독히 게으름을 피웠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 몸을 쭉 뻗고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었다. 지인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로 여행갈 수 있는 최적지에서 왜 그러고 있냐며 한심해했지만,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면서 사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처럼 그 적적하고 단조로운 시간을 즐겼다.' 일에 치여 만신창이가 된 심신으로 슬로베니아를 찾은 시인은 천천히 느긋하게 때로는 더할 수 없이 여유롭게 낯선 나라와 새로운 경험을 즐기고 그곳에서 건네 받은 에너지로 다음 걸음을 걷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 '휴가'다. 각자의 속도로 묵묵하게 걷되 틈을 두자. 가만히 있자니 영 불안하다면 덜 열심히 하는 정도로 시작해봐도 좋겠다.
마지막 하나는 사람이다. '류블랴나는 첫눈에 반할 만큼 눈부신 도시는 아니었다. 이 도시의 첫인상은 그저 작고 풋풋하며 아기자기하고 깨끗하다는 느낌 이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성실하고 무덤덤해 보이는 슬로베니아 사람들 속에서 센티멘털하고 느리게 이 도시의 매혹을 느끼기 시작했다.' 슈퍼마켓에서도 빵집에서도 약국에서도 먼저 말을 건네며 알은체를 하는 주민들, 거리낌없이 머물 공간을 나눠주는 이들과, 초행길을 가야 하는 여행자를 위해 기꺼이 동행자가 되는 사람, 떠나온 곳에서 문득 연락해 안부를 묻는 익숙한 사람들까지. 이방인이라고 해서 굳이 걸어 잠그지 않는 그 마음이 예쁘고 안녕을 묻는 인사가 고맙다. 그런 작은 배려와 관심이 여행자들을 그곳으로 다시 부르고 또 돌아오게 하는 건 아닐까?
초가을 날씨라는 8월의 슬로베니아, 호들갑스럽게 겉으로 티 내지 않아도 마음으로 다정한 사람들이 있는 그곳에 가자. 그리고 '너 지금 어디 있니?', '빨리 오라' 말해주는 내 사람들이 있는 이곳으로 돌아오자. 그리고는 또 다음을 준비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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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슬로베니아김이듬 저 | 로고폴리스
여행지에서의 감상과 어우러진 여러 시인의 시와 우리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슬로베니아 시인들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사망일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될 만큼 슬로베니아를 대표하는 시인인 프란체 프레셰렌을 비롯한 슬로베니아 시인들의 시를 직접 번역해 원문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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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욱(도서 PD)
책을 읽고 고르고 사고 팝니다. 아직은 ‘역시’ 보다는 ‘정말?’을 많이 듣고 싶은데 이번 생에는 글렀습니다. 그것대로의 좋은 점을 찾으며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