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과연 이혼을 했을까? (2)
양반가의 이혼은 대부분 당사자가 선택하여 이루어지는 경우보다는 국가와 국왕의 허락이나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사회관습과 법질서의 유지, 유교적 덕목의 실현이라는 차원의 조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글ㆍ사진 반주원
2016.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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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과연 이혼을 했을까? (1)"에서 이어집니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양반들의 이혼이 드문 것이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남편이 처의 조부모나 부모를 구타하거나 처의 조부모, 부모, 외조부, 백숙부모, 형제, 고모, 자매 등을 죽인 경우, 장모와 간통했을 경우, 의절을 범했다고 해서 처는 남편과 이혼을 할 수 있었다. 장모와 간통을 한 경우가 따로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의외로 이혼에 대한 당시의 이유 중 장모와의 간통도 심심치 않게 이야기가 되어왔던 것 같다. 또한 남편이 집을 떠나 행방을 모르는 상태로 3년 이상 지난 경우나 남편에게 뼈가 부러질 정도의 심한 구타를 당한 경우는 국가가 나서서 아내에게 이혼소송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 차원의 배려만으로는 여자에게 매우 불평등하게 적용된 조선시대의 법과 규율을 뛰어넘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남편이 이혼을 당하는 경우와는 다르게 아내 된 자는 남편의 조부모나 부모를 살해 또는 구타하는 경우뿐 아니라 욕설만 한 경우에도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할 수 있었고 처가 남편을 때린 경우는 뼈가 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경미한 구타의 경우조차 장 1백 대를 맞고 남편이 이혼을 원하면 이혼하도록 국가가 허락해주었기 때문이다. 

 

양반가에서는 역가이혼이라 하여 부부 중 어느 한쪽이 역모와 관련되었을 때 강제로 국가차원에서 이혼을 시키거나 인정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역모와 관련된 집안은 멸문의 화를 입게 됨으로 사랑하는 부부간이라 하더라도 가문을 지키기 위하여 이혼하고 국가에 이를 공식적으로 허락받아 결혼자체를 법적으로 무르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내 가문과 집안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외면하고 살길이 막막한 세상으로 내모는 일은 양반가뿐만이 아니라 왕실에서도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왕비인 단경왕후 신 씨의 친정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장인이기도 하여 대역죄인으로 처벌됨에 따라 일주일 만에 왕비와 강제로 이혼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궁궐 밖으로 내친 후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한 나라 최고 권력자인 왕도 이러 했다면 당쟁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얼마나 많은 역가이혼의 애절한 사연들이 흩뿌려져 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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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경왕후의 능, 온릉

 

이외에도 양반가에서는 남편의 삼년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시집을 갔던 여자가 인륜을 파괴하고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국가에 의해 강제 이혼당하고 고향으로 쫓겨나는 경우도 있었으니 양반가의 이혼은 대부분 당사자가 선택하여 이루어지는 경우보다는 국가와 국왕의 허락이나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사회관습과 법질서의 유지, 유교적 덕목의 실현이라는 차원의 조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평민들의 이혼 방법, 할급휴서와 사정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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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단자 (출처_관동대학교 박물관)

 

양반에게는 사실상 여러 가지 이유로 어렵기만 했던 이혼이 조선시대 평민의 경우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문제였던 건 왜일까? 나눌 재산도, 남의 눈치 보며 챙길 염치도, 감정을 속여 가며 지켜내야만 하는 가문의 명예도 없는 일반민들의 경우엔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좀 더 자유로웠던 것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이 사랑 앞에서 더 정직해지기 어려운 것은 요즘 드라마 속에서만 펼쳐지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일반민이 이혼을 원할 경우에는 보통 두 가지 방법을 쓰곤 했는데 ‘사정파의(事情罷議)’와 ‘할급휴서(割給休書)’가 그것이다. ‘사정파의’란 특별한 이유가 있어 더 이상 부부로 살 수 없다고 생각되면 두 부부가 마주 앉아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사정을 말하고 결별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정말 쿨하기 그지없다. ‘할급휴서’는 칼로 저고리 앞섶을 베어서 그 조각을 상대에게 이혼의 표시로 주고 상대방이 그것을 받으면 이혼을 수락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할급휴서(割給休書)’의 경우 잘라낸 옷자락이 날개를 편 나비 모양과 같다고 하여 “나비를 주고받았다”라는 말로 이혼에 동의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혼에 동의하는 표식이라면 이것 또한 일종의 이혼합의증명서와 같은 것인데 이를 두고 하늘하늘 자유롭고 아름답게 날아다니는 나비를 떠올리는 조상들의 운치 있는 행동과 정서는 삶의 아픈 순간에도 멋들어지게 나름의 방식으로 상처를 보듬어주는 방식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일반민들은 이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자유롭게 이혼을 선택한 후에도 경제적 이유로 집을 나누어 거주지를 분리하지 못하고 같은 집, 심지어 같은 방에서 구역을 정해 동거를 계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이혼이 성립된 후에는 어떠한 과정을 거쳤을까? 이혼이 성립된 자는 양반이든 일반민이든 3년마다 호조에서 시행하는 일종의 인구센서스 조사 때 이 사실을 국가에 신고해야 했다. 그리고 양반가의 이혼녀로 국가의 인정을 받은 경우든, 자유로운 선택으로 이혼녀가 된 일반민이나 천민출신이든 경제력을 상실하고 사회적으로 곱지 못한 시선을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점은 개인에게도 국가에게도 큰 부담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조선시대에는 이혼녀들을 위한 독특한 관습이 생겨나기도 했다. 할급휴서의 징표로 잘린 옷섶을 주고받은 여인이 그것을 들고 새벽 동이 틀 무렵 성황당에 나가 서 있으면 가장 먼저 그녀를 본 성인 남자가 여인을 거두어 데리고 살곤 했다. 복불복인 이 만남은 이혼녀에게 경제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기댈 곳을 만들어주고 사회가 보장하지 못하는 무덤까지의 복지를 대신할 사람을 구해주고자 하는 당시 조선사회 나름의 안전장치를 구실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조선이 시간을 거듭할수록 남존여비적인 사고방식으로 가득 찬 사회로 변화해가며 많은 성불평등문제를 양산하기는 하지만 국가가 오로지 남자의 편에서만 이혼이라는 경우의 수를 생각한 것은 아니며 나름의 인륜과 도덕에 대한 숭고한 기준과 인간미가 담겨진 기준으로 이혼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실제로 세종 7년(1425)에 45세가 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해 쫓겨난 최 여인의 남편이 새장가를 드는 사건이 벌어졌다. 딸이 이혼당하고 쫓겨난 것에 격분한 장인이 사위를 사헌부에 고소하자 사헌부는 “최 여인이 시아버지 삼년상을 치렀으니, 다시 합쳐 살고 새장가를 든 여인과 이혼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남편 된 자가 자신의 이혼과 새로 한 결혼은 정당하고 대를 잇지 못하면 안 되니 최 여인과의 이혼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는 상소는 올렸다. 국가는 이에 대해 남편의 상소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최 여인과 합쳐 살지 않은 죄로 곤장 90대를 때렸다. 

 

멀고 낯선 조선시대에도 오늘날과 기준은 다르지만 이혼을 앞에 두고 제 할 도리와 역할을 다한 억울한 이의 사연을 듣고 손을 들어주는 귀는 열려 있었던 셈이다. 억울한 이혼을 들어주는 귀가 항상 바르게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인 것은 오늘날이나 조선시대나 다를 바가 없으니 여기서 그만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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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이혼 #양반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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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원

고려대학교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진학했다. 외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한국사 및 통합사회 강사로 메가스터디, 비타에듀, 비상에듀 등의 유명 대형 학원과 EBS 등에서 두루 강의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전국 최고 사탐 강사 5인(입시타임즈 선정)에 뽑히는 등 수능 영역에서는 10년 이상 최고의 사회과 스타 강사로 입지를 굳혔다. 이후 공무원 한국사 영역으로 강의 영역을 확장했으며, 현재는 TV 프로그램 ‘황금알’에 한국사 전문가로 출연 중이다. 『반주원 한국사』 시리즈, 『반주원의 국사 교과서 새로보기』, 『유물유적 한국사 1』 외 다수의 저서를 편찬·집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