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물질적 욕망과 인간이 갈 길
당시 할아버지 세대가 싸웠던 대상은 친일파가 아니었다. 공산주의도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남고자 하는, 아니 더 나아가 자신의 배를 채워야 했던, 혹은 더 채우고 싶은 물질적 욕망이었다.
글ㆍ사진 최민석(소설가)
2016.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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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 

 

연재할 소설 때문에 맥주 취재차 벨기에에 간다고 말하니, 출판사 대표가 “아니, 그러실 필요까지야”라고 답했다. 그런 말을 듣고 이곳 벨기에까지 와서 맥주를 마시니, 속이 더부룩하고 쓰리다. 오르발(Orval)이라는 수도원 맥주를 마셨는데, 벨기에까지 장장 14시간 비행기를 타고 와서 내 취향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부디 초콜릿은 내 취향이길 바란다. 

 

3. 5. 

 

육체는 이국 벨기에에 와 있지만, 영혼은 모국에 있으므로 유시민의 『나의 한국 현대사』를 읽었다. 하지만, 이 책은 나의 조국을 좀 더 부끄럽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 책에는 프랑스 정치가 토크빌의 유명한 말이 인용돼 있다. 

 

“모든 민주주의는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표현의 자유가 과거로 회귀하는 작금, 이 말을 다시 접하니 씁쓸하다. 하여 단맛이나 보려 벨기에의 자랑거리 초콜릿을 먹었는데, 장장 14시간의 비행과 2시간의 숙취를 겪은 뒤에야 벨기에 초콜릿이 내 취향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부디 와플은 내 취향이길 바란다. 

 

3. 10.  

 

오늘도 유시민의 『나의 한국 현대사』를 읽었다. 

 

현재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데서 비롯하고 있다, 고 이 책은 주장한다. 공감한다. 그런데 이승만이 “일본에 대해 혐오에 가까운 반감(77쪽)”을 보였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다음은 책에 있는 일화.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 한국과 일본만 참가를 신청했다. 결국 두 나라에서 번갈아가며 한 경기씩 치러야 하는 상황. 그런데, 당시 일본과의 외교관계가 없었기에 일본 선수들이 한국에 입국하려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일본인이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했다. 홈경기를 못해 몰수패를 당할 위기에 처한 축구인들은 전 경기를 일본에서 치르길 청원했다. 대통령이 어찌나 강경했던지, 당시 대표팀 감독은 출국 허가를 받으며 이승만에게 말했다. “이기지 못하면 선수단 모두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습니다.” 다행히 1승 1무를 거둬, 현해탄에는 아무도 몸을 던지지 않았다.

 

이 같은 그가 친일파와 손잡았다는 건 역설이다. 하와이에서 넘어온 그에게는 국내 정치 기반이 필요했다. 남북한이 분단된 당시, 정권 유지를 위해 가장 유용한 세력은 반공세력이었다. 이때 ‘친미’, ‘반공’의 깃발을 휘두른 자들이 바로, 광복 후 살아남은 친일파들이었다. 이들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되어줄 거라 판단한 이승만은 국회가 친일파 청산을 위해 설립한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해산시켰다. 반민족 행위를 수사하는 ‘특별경찰’도 직접 해산했다. 나아가, 경찰들에게 “특별조사위원과 특별 검찰관의 집을 수색하게 하고, 사무국과 재판부의 서류를 탈취(80쪽)”하게끔 했다. 점점 “겁을 먹고 굴복하는 국회의원이 늘어났고, 결국 국회는 1951년 반민법을 폐지했다(80쪽).” 

 

이로 인해 친일로 처벌받은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신념을 버렸던 것일까. 아니면, 그 신념보다 공산당이 더 싫었던 것일까.

 

주목할 점은 당시 많은 사람이 ‘반민특위의 해체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수백 명의 군중이 반민특위 사무실로 몰려와 ‘공산당 숙청’을 빌미로, 반민특위 해체를 외쳤다. 서울시경 사찰과 경찰 440명은 반민특위 간부 교체와 특경대 해산을 주장하며 집단사표를 냈다. 나아가 서울시경 소속 경찰 9,000명은 전원 사표를 내겠다며 정부를 압박했다. 결국, 이승만은 반민특위 해산 담화문을 발표했다. “빈민특위 활동이 민심을 해치고 있다”며. 

 

물론, 당시 경찰 조직은 친일파 출신인 간부들에 의해 장악당했다. 이것은 군,관,정,재계 모두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무리 경찰 간부들이 친일파에 의해 장악되었다 하더라도, 아무리 경찰 공무원의 생계가 간부들의 명령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하더라도, 경찰 9,000명이 사표를 내겠다고 한 것은 충격적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시 할아버지 세대가 싸웠던 대상은 친일파가 아니었다. 공산주의도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남고자 하는, 아니 더 나아가 자신의 배를 채워야 했던, 혹은 더 채우고 싶은 물질적 욕망이었다. 물질적 욕망이 친일을 하게 했고, 물질적 욕망이 친일파의 청산을 반대했다. 이 요인은 1951년에도 유효했고, 2016년에도 유효하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이에 걸맞은 정부를 스스로 수립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토크빌의 말이 부끄러울 만큼 유효하다. 

 

“모든 민주주의는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다행히 와플은 내 취향에 맞았다. 생의 쓴맛 역시 물질적 욕망으로 대체하며, 살아갈 만큼 인간은 물질적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다. 

 

3. 11.  

 

이세돌이 2연패 당했다. 나는 사실 이세돌이 “5연승을 하겠다”며 인터뷰를 할 때부터 그 대사가 결국은 “한번이라도 이겨보겠다”는 겸허로 바뀔 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자동차보다 빨리 달리길 원하고, 컴퓨터보다 정확하게 계산하길 원한다. 인간의 피조물이 이미 인간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걸 수차례 목도했으면서, 꾸준히 우를 범한다. 불가능인 줄 알면서 대결을 원하고, 그것을 도전이라 칭한다. 나는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니다. 질 줄 알더라도, 어떻게 지느냐가 중요하다. 

 

곧 인공지능이 소설을 쓸 것이다.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서사 구조와 고전 캐릭터, 상황별 대사, 묘사, 지문, 수식 어구를 대입한 프로그램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소설을 써낼 것이다. 나보다 잘 쓸 것이다. 오타도 없고, 띄어쓰기도 확실하며, 비문도 없을 것이다. 리뷰 정보가 꼼꼼하게 입력돼, 통계적으로 어떤 반전이 독자의 허를 찌르는지 알아 낼 것이며, 이를 토대로 훌륭한 반전을 제시할 것이다. 자신이 제시한 반전의 리뷰를 통해 인간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면밀히 파악하고, 자기 학습의 단계를 거쳐 나날이 진화할 것이다. 결국 나도 언젠가 인공지능이 쓴 소설을 읽으며 그 구조를 공부하며 배울 것이다. 질 줄 알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기에 끊임없이 써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세돌을 응원한다. 

 

3. 12.

 

온종일 글을 썼다. 대기업 사보에 실을 글을 쓰고, 대학생 고민 상담 칼럼을, 이 원고 ‘절도 일기’를 썼다. 

 

살아남아야 하기에, 물질적 욕망을 해소해야 하기에, 곧 컴퓨터가 소설을 쓸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펜대를 놓아버릴 수는 없기에, 온종일 글을 썼다. 

 

이세돌은 또 졌다. 지고 나서 복기를 하고 있다. 내일은 좀 더 나은 모습으로 지길. 

 

3.13. 

 

마침내 이세돌이 이겼다. 내 말들이 헛소리가 되어 기쁘다. 

 

나의 가설들이 무너져서 기쁘며, 그 무너짐으로 인해 내가 살아갈 여지가 생겨서 기쁘다. 

 

우리는 물질적 욕망 때문에 잊고 싶은 역사를 써왔지만, 자신을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시키고 싶은 욕구도 있기에, 우리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모습은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축배를 들기 위해 집 앞 맥주 가게에 가니, 14시간 비행기를 타고 벨기에에 가서 마셨던 맥주 ‘오르발(Oraval)’이 있었다. 

 

아직 인간이 갈 길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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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 #절도일기 #민주주의 #친일파 #맥주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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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people

2016.11.08

작가님의 절도일기를 역주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 댓글이 하나도 없다니?! 이럴수가 하는 마음에 일단 댓글 달기 시작합니다. 유시민님의 나의 한국현대사는 진짜 줄을 그어가며 마치 국사 공부하듯 읽었습니다. 그때 같이 주던 역사연대기표도 꼬옥 갖고 싶었는데 제가 살때는 주지 않아서. 여튼!! 작가님 글은 너무 재미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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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