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어(母語)인 한국어로 소설을 쓰면서도 한국 문단은 생각할 수 없었다는 조선족 작가 금희. 그는 ‘어떤 소설을 쓸 것인가’가 아닌 ‘소설을 계속 쓸 것인가’를 고민해야 했다. 중국 문단도, 한국 문단도 아닌 쇠락해가는 작은 조선족 문단에서 활동하면서 ‘다음’을 기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뭐가 되어야 쓰는 것인가’.
“일단 결과 생각하지 말고 쓰자, 좋은 소설 쓰자, 생소하거나 낯설거나 신선감이 있거나 그건 모르겠고 어쨌든 사람 이야기 쓰면, 잘만 쓰면 되겠지, 그 다음에 번역이나 다른 걸 생각하지 아직 아무것도 안 하고 미리 이런 걸 걱정하지 말자, 생각했죠.”
금희는 현실을 미화하지 않는다. 조선족이 탈북자를 바라보는 태도, 시장 경제에 휩쓸려 망가지는 조선족의 삶을 조명하는 태도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중국과 북한, 남한의 바깥에서(혹은 내부 깊숙한 곳에서) 나부끼는 아슬아슬한 삶이 무척이나 섬세하게 그려진다. 인물은, 작가는 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지 끝없이 망설인다. 이 불신이 참 뜨겁다. 그리고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작가의 몸에서 나온 이야기다. 그 이야기가 여기에 닿은 건 큰 행운이다.
조선족 문단의 현실
중국 장춘에서 작품 활동을 하셨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소설집이 출간되었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좋았어요.(웃음) 조선족 문단에서만 활동했으니까요. 한국은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염두에 두고 한 것도 아니고요. 하다가 계기가 돼 이렇게 책이 나왔습니다.
한국은 생각하지 않으셨다고요?
굳이 이쪽으로 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이 일단 소설만 잘 써보자고 생각했었죠.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했으니까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어요.
염두에 두지 않았다,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조선족 문단에서 소설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그렇죠. 원래 조선족 인구가 적기도 하고요. 중국이라는 사회 안에서도 조선족 사회는 특수한 소수 집단이거든요. 중국에 여러 소수민족이 있지만 조선족만 모어(母語)로 소설을 창작해요. 다른 소수민족들은 다 중국어로 창작해요. 원래 본인들의 문자, 언어 다 있죠. 큰 민족들도 있고요. 티베트, 위구르, 몽골족 같은 경우도 자기 문자와 언어가 엄연히 있고 인구도 우리보다 훨씬 많아요. 그런데 중국 작가들과 접하며 보니까 모어로 창작하는 작가들이 이제 거의 없더라고요. 중국 문단에 나오면서는 특히 중국어로 활동을 하고요. 몽골이나 위구르족이 자기 언어로 창작하는 경우가 조금 있는데요. 전업 프로 작가들은 전부 중국어로 창작해요. 조선족만 모어로 창작하니까 참 교제하기가 힘들어요.
한국뿐 아니라 중국 문단에 대해서도 벽을 느끼셨겠네요.
제 소설이 중국 문단에 알려지려면 번역을 거쳐야 하는데요. 조선족 학교를 쭉 다녔으니 스스로도 중국 작가들보다 언어구사력이 떨어진다는 걸 알아요. 다른 작가들 작품을 읽는 건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제 소설은 그쪽에서 읽어보질 못하니까요. 고립된 것 같은 느낌이었죠. 게다가 한국도 생각하지 않았고요. 한국과 엄연히 다른 조선족의 생활이 있잖아요. 그런데 과연 우리 이야기를 써서 한국에서 관심을 가져줄까 그런 생각도 많이 했었어요. 그렇다고 제가 한국 생활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죠. 한국 작가들의 세련된 언어를 따라갈 수 있을까, 한국 독자들이 받아들일까, 재미있을까 고민이 됐어요. 한국에서도 작가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한국에서 해봤자 게임이 되겠나, 그럴 바에는 생각하지 말자고 했던 거죠.
조선족 문단의 사정도 여의치는 않았을 것 같아요.
워낙 덩치가 작고, 점점 중국에 동화되어가고, 사람들 자체가 이제 없어지는 상태예요. 쇠락해가는, 곧 꺼져가는 불빛을 두고 굳이 거기서 시작을 한다는 게 거의 가능성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셨죠. 그러면서 드는 작가로서의 고민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제게 있어 제일 큰 고민은 소설을 어떻게 쓸까 하는 게 아니라 소설을 계속 쓰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었어요. 곧 없어지는 거고, 잡지도 몇 개 남지 않았고, 독자들은 거의 다 떨어져나가고, 문단 안에서만 서로 읽어주는 상태니까요. 대중과 소통이 전혀 안 되는 상황에서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웃기잖아요. 현실적으로 도움도 전혀 안 되고요. 중국 작가들은 원고비로 살아갈 수 있어요. 열심히 써서 실력이 어느 정도 되고 인정받으면 인세도 많고, 상도 있고, 원고비도 많아요. 글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어요.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거의 생활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잡지들도 정말 너무 어려워요. 쓰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중국이나 한국 같은 경우 안 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작가 군체들이 있으니까 원고가 많이 들어오잖아요. 조선족 문단은 작품을 써준다고 하면 편집자들이 너무 고마워하고, 부탁하는 상황이에요. 돈도 안 되고, 명예도 안 되고, 그렇다면 이 일을 왜 하느냐는 거죠.(웃음)
왜 하고 계세요?(웃음)
개인적인 것도 있고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웃음) 다양한 직업을 해봤는데요. 재미도 없고, 보람도 없고, 아무것도 안 되겠더라고요. 그렇지만 이 일은 제가 전업으로 하겠다는 생각 안 하고 한 거예요. 꾸준히 써왔거든요. 또 제 환경이 신랑 도우면서, 아이들 보면서, 개인적인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니까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어서 계속 한 것 같아요. 학교 다닐 때는 그림을 좋아했어요. 마지막에 와서는 이 일을 할까 그림을 그릴까도 고민을 했었죠. 그림은 제한이 없잖아요. 누구나 다 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건 문자로 해야 하니까 딱 제한이 되죠. 이 한계가 보이니 하지 말자, 고민도 했고요. 교회를 다니니까 기도도 많이 했어요. 나중에는 그런 것이 오더라고요. 꼭 뭐가 되어야 쓰는 것인가 하는 질문 같은 것 말이에요. 일단 결과 생각하지 말고 쓰자, 좋은 소설 쓰자, 전혀 다른 나라의 소설에도 공감하는 것처럼 소재야 어찌됐든 나만의 이야기를 쓰자고 생각했어요. 생소하거나 낯설거나 신선감이 있거나 그건 모르겠고 어쨌든 사람 이야기 쓰면, 잘만 쓰면 되겠지, 그 다음에 번역이나 다른 걸 생각하지 아직 아무것도 안 하고 미리 이런 걸 걱정하지 말자, 생각했죠.
어려움을 느꼈다고 했지만 중국 문단 활동을 생각하긴 했을 것 같아요.
지금도 생각은 있어요. 어차피 조선족이고, 중국이란 나라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중국 문단, 한국 문단 둘 다 포기할 수 없어요. 중국 문단은 워낙 큰데 이에 비해 조선족 문단을 솔직히 너무 힘이 없어요. 첫 세대 작가들은 정말 잘했는데 지금은 고립되고, 많이 떨어졌죠. 시장 경제 충격도 너무 컸고요. 제가 보기엔 보호를 받지 못했어요. 내던져진 건데요. 이 일은 어떤 후원 없이 개인의 힘으로 하기란 너무 힘들어요. 특히 인구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죠. 어쨌든 번역을 한 번 거치고 나면 많이 떨어져나가잖아요. 방법이 없다, 일단 작품 실력을 키우자, 그래야 번역이 돼도 70%라도 건지지 않겠나(웃음) 해요.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역시 한국 문단으로의 진출이 작가에게 의미가 있겠네요.
그마나 번역이라는 걸림이 없으니까요. 생각도 안 했는데 이쪽으로도 가능하겠구나 생각이 들어요. 저는 소재 때문에 많이 걱정하고 그랬는데 말이에요. 어차피 다른 나라도 염두에 두고 한다고 작품을 한다고 하면 중국어로 번역이 돼 또 번역이 되는 것보다는 한 번 번역 거치는 게 낫잖아요. 한국어는 그런 애착심도 더 있어요. 문학 분위기도 자유롭고요. 그게 크게 한 몫 했죠. 중국에서 쓸 수 있는 분위기와 여기는 많이 다르니까요. 중국에서 다룰 수 있는 주제들보다 한국에서 훨씬 투명하게, 쓰고 싶은 것을 다를 수 있거든요.
중국 문단과 조선족 문단의 관계나 현실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중국 작가 협회가 있어요. 그 아래 성(省) 작가 협회가 있고, 그 아래 시 작가 협회들이 있어요. 전국 단위는 다 성급이죠. 연변 작가 협회라고 있는데 여기는 성급에 속하지 않아요. 연변은 길림성의 한 자치구거든요. 시 정도의 규모인데 중국 작가 협회 직속으로 되어 있어요. 연벽 작가 협회와 신강 위구르 작가 협회가 직속이에요. 초창기 때 우리는 정말 실력 있었거든요. 『소금』을 쓴 강경애, 윤동주 시인 등이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사라졌어요. 건국이 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남한이나 북한으로 돌아가고 남은 작가들이 많이 없었어요. 그 후 새로운 세대가 올라온 거죠. 그 세대들은 공산주의체제에 동의를 많이 한 사람들이 대부분 남았겠죠. 그러다가 문화대혁명 등에 휘말려서 많이 꺾였죠. 김학철 선생님처럼 작가적 양심으로 끝까지 소신을 지켰던 분들이 있지만 다음 세대들은 혼란기를 겪으며 타격을 많이 입었죠. 문화대혁명이 끝나면서 조금 번성기를 보이다가 시장경제 터지면서 다 내쳐진 거죠. 그 파도를 그냥 맞았어요. 자유로운 것 같지만 사실 경쟁만 더 치열해진 거잖아요. 개인의, 집단의 실력이 제대로 되지 않은 쪽에서 경쟁 속에 내쳐진다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에요. 한참 창작해야 할 세대들이 생활난에 너무 시달려서 다 버리고 나가니까 공백이 생기고, 악순환이죠. 그러니 중국 안에서 갖고 있던 명성도 많이 떨어진 상황이에요. 중국 문단에 진출하기가 쉽지 않죠.
중국 문단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작가는 없나요?
있긴 있어요. 어떤 작가들은 어렸을 때부터 중국 학교 다니고 성장해 작품 활동을 하고, 전국적으로도 인기 있는 작가도 있고요.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작가가 우리 길림성에도 있죠. 그런 작가 분들은 조선족 문단과 거의 교류를 안 하죠. 우리만 조선족이라는 걸 알고, 어쩌다 한 번 같이 밥 먹고 그렇지만 전혀 교류가 안 돼요. 한국에도 진출하고 싶어 하지만 가치관이나 공감대가 많이 떨어지니까, 본인 스스로도 중국인이라고 너무 많이 인정하니까 조선족 작가로서의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가 되는 거죠.
공유할 수 없는 기억들
경계인으로 가지고 있는 고민들이 한국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하세요?
중국이나 외국에 자주 왔다 갔다 하는 한국 분들은 다른 나라 문화에 대해 잘 이해해요. 그 외 대부분의 한국 대중들을 보면 제 생각에는 중국인보다 많이 닫혀있는 것 같아요. 중국은 다민족, 다문화 국가니까 훨씬 열려있어요. 한국도 어쩔 수 없이 다문화 시대를 맞게 됐잖아요. 아시아국가, 조선족을 비롯해서 들어오고, 나가고 하니 민족에 대해 조금 더 열렸으면 좋겠어요. 동아시아에서의 위치, 북한과의 대화, 조선족 문제, 다문화 가정 등의 문제들을 처리하는 데 있어 한국이 잘 대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체성 지키는 게 절대 나쁜 건 아니지만 오로지 나만 사랑한다는 게 문제죠.
민족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선천적인 것도 있지만 후천적인 습관이라는 게 무척 중요해요. 후천적인 것도 있잖아요. 그런 걸 공유했으면 좋겠어요. 결국 껍데기 안에 담는 건 한 개인의 영혼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렇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육체, 국적을 입고 살아가야 하니까 그것에도 충실해야 하겠죠.
작가의 말에서도 비슷한 말을 적으신 것 같아요. 하나의 독특한 개인들인데 국가나 외모, 언어 등이 어떤 정체성을 만들고, 개인을 덧씌우잖아요. 작품은 그것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요. 이런 이야기를 쓰게 한 최초의 물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해요.
한국에서 생활하며 느낀 것들이에요. 같은 민족인데 많이 달라요. 핏줄은 같은데 살아온 배경이 너무 다르고, 기억도 참 달라요. 한국에서 겪은 건국 시절, 박정희 시절, 광주 혁명, 이런 것에 대한 기억이 저희는 거의 없어요. 문화대혁명, 대약진, 이런 것들이 기억에 있는데 이건 중국인들과 공유할 수는 있지만 한국인들과 공유할 수 없는 기억들이잖아요. 사람에게 동년 시절의 기억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어느 작가도 동년 시절을 떠나 작품을 쓸 수 없어요. 그게 전부예요. 거기서부터 시작되어 나오는 거죠. 그래서 아무리 써도 나는 조선족 작가구나, 한국 작가가 될 수 없구나 생각했어요.
잠깐 세대에 대한 언급도 하셨는데, 작가의 자녀 세대, 지금 젊은 조선족 세대의 고민은 또 다를 것 같아요. 자녀들이 느끼는 경계인으로서의 감각은 또 어떻게 다를까요?
아마 조금 더 지나면 한국도 ‘경계인’이라는 말을 잘 안 쓸 거예요. 경계인이라는 말 자체가 경계를 느끼면서 나온 말이잖아요. 국적, 민족처럼 어떤 것에 묶여서 ‘이것은 우리의 것’이라고 했을 때 이 경계와 저 경계가 생기는 거고 부득불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이 생겨서 경계인이라는 말이 생기는 거죠. 만약 경계 자체가 없어진다면 경계인이란 말도 없어지겠죠. 점점 공동체의 색깔보다 개인의 색깔을 먼저 보게 되겠죠. 어떤 개인이 잠시 그 공동체에 속해있는 정도로 생각할 거예요. 개인의 가치가 더 우선시 되는 건데요. 제 아래 세대가 지금 그런 것 같아요. 아직도 지하철 타고 가면 중국 사람들이 제 아이들에게 묻긴 해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하면 한국 사람이라고 얘기를 해요.(웃음) 너는 중국의 조선족이라고 어릴 때는 말을 못해주겠더라고요. 이제 좀 커서 얘기해줬어요. 듣고는 그냥 그런가보다 해요. 소수 집단으로서의 유대감 같은 것은 우리 보다 많이 약해요.
「노마드」라는 작품에 눈길이 갔던 이유도 그 때문인데요. 작가는 ‘계속해서 이동하는 삶’에 집중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정착하는 사람과 이동하는 사람의 대비를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이 있다면요?
계속 생각했어요. 왜 조선족들은 이렇게 떠다니는 걸까 하고요. 농촌을 떠나 도시로, 도시를 떠나 한국으로 옮겨 다니는 현장을 보면서 작품을 시작했으니까요. 그런데 한국을 보니 한국 사람들도 이사 엄청 많이 다니더라고요.(웃음) 멈춰있지 못하고 말이에요. 이게 민족성이란 생각을 했어요. 물론 사회 환경도 있겠지만요. 똑같은 중국에서 같은 시장 환경을 만났는데 조선족들은 다 쌰하이(下海, 본업을 그만두고 창업을 하거나 다른 상업활동을 하다)했는데 왜 중국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쌰하이하지 않았나, 그래도 공무원 자리를 지키고 있느냐 물을 수 있겠죠. 저는 정말 그걸 많이 느껴요. 조선 민족과 중국 민족은 정말 달라요. 저는 중국 민족을 정착 민족, 조선 민족을 유목 민족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쪽에서 바이킹과 흡사하죠. 중국에 중원 사상이 있잖아요. 이동하는 민족을 천스럽게 봤어요. 정착, 농경민족을 문명스럽다고 생각하고 굉장히 자부심을 느꼈어요. 한편 지금 한국인들 어느 유행이든 얼마나 빨라요. 인터넷도 그렇고요. 앞장서 개척하는 정신이 있어요. 굉장히 자유롭고, 창의성이 있죠. 이런 차이를 느껴요.
이야기가 고여야 쓴다
책에 실린 작품들은 진짜 작가의 몸에서 나온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장 작가에 가까운 화자나 이야기를 꼽는다면 어떤 작품인가요?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이 그렇겠죠. 실제로 닝, 연주도 있어요.
한국 작품들도 많이 읽으시나요?
많이 읽고 싶어요. 어차피 한국어로 써야 하니까 연습을 해야겠더라고요. 그 방면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죠. 제가 쓰는 언어랑 지금도 조금 다르지만 너무 거부감 없이 독자들에게 읽히려고 노력해요. 그렇지만 거기서는 많이 접할 수 없어요. 어쩌다 친척들 집에서 보거나 인터넷 뒤져서 정말 보고 싶은 작가를 대표적으로 뽑아서 볼 뿐이죠. 그래서 많은 작가, 많은 작품을 보진 못했어요. 관심은 가지고 있는데 어려운 점이 있어요.
혹시 그렇게 해서 만난 특별한 작가가 있을까요?
1910년~1930년대의 작품들이 좋아요. 김동리 선생님 작품 같은 것 봤을 때 전율이 오더라고요. 중국 작가들과 얘기할 때도 얘기해요. 이상의 「날개」도 굉장히 소름끼치게 봤어요. 시인은 기형도를 우연치 않게 봤는데 정말 천재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시인이 한국에 있었다는 게 정말 자랑스럽고요. 한국 작품이 세상에 너무 소개가 안 되는 것 같아요. 중국에서도 한국 작품 거의 몰라요. 일본 작품도 많이 알리고 있는데 한국은 거의 전무한 상태예요. 드라마, 영화 등 대중성은 인정하는데 문학은 조금 아쉽죠. 저는 그때 소설들을 당당히 중국 작가들에게 추천해요. 저평가 되고 있지만 정말 좋은 작품이라고요.
어렸을 때 정말 재미있게 읽은 게 『삼국연의』예요. 그렇게 서사가 있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작은 일도 좋은데 서사적 배경 없이 딱 일부만 나왔을 때 얼마나 탄탄하게 설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면에서 황석영 작가도 좋아해요. 기회가 되면 정말 만나보고 싶어요.
앞으로 쓰고 싶은 작품도 그런 서사 중심의 이야기가 될까요?
저는 모르겠어요.(웃음) 생각만 이렇게 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 썼을 땐 그렇지 못할지도 몰라요.
이제 금희라는 작가를 처음 만난 독자들이 많을 테고, 자연히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게 마련인데요. 어떤 작품을 보여줄지 작가의 말을 듣고 싶어요.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독자는 의식 안 하고 쓰기로 했거든요. 조선족도 그렇고 중국, 한국도 그렇고요. 어느 특정한 독자에 포커스를 맞추는 건 안 하려고 했어요. 물론 한국을 다니면서 조금 염두에 둘 수는 있어요. 조선족 이야기밖에 쓸 수 없으니까 쓰지만 작품을 쓰면서 항상 그런 생각은 하고 있어요. 다른 나라, 민족 사람들이 봤을 때 어떤 느낌일까에 대해 항상 생각하며 쓰고 있어요. 하지만 독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선보이겠다, 하는 신경은 안 쓰고요. 지금 소설을 쓸 때도 대부분 내 마음에 와서 닿을 때 써요. 단편, 중편 끝나고 한동안 쉬면서 다른 일을 하다보면 이야기들이 마음에 고여요. 그때 쓰는 거고 마음에 닿는 게 없으면 일부러 쓰려고 안 해요. 일부러 몇 번 써보니까 안 좋더라고요.(웃음) 독자를 의식하려고 해도 그렇고요. 누군지 기억이 안 나는데 누군가가 ‘익명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참 와 닿았어요. 누가 내 작품을 읽을지, 어떤 생각을 할지, 나와 같은 느낌일지, 내 작품이 도움이 될지, 뭔가가 있을지 저는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 선에서 저는 손을 끊은 거예요. 그렇지만 나는 모르는 그 누군가를 위해 내 진짜 얘기를 하고, 그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죠.
지금 마음에 닿는, 고이고 있는 이야기가 있나요?
미리 얘기하면 안 되는데(웃음) 아직은 모르겠어요. 많이 아파야 쓸 수 있는데요. 나중에 기회 되면 성장 소설, 판타지 소설을 써보고 싶어요. 판타지 소설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아주 자유롭게 판타지를 써보고 싶어요.
저 자체가 굉장히 약하거든요. 저는 사회적 약자보다 심리적 약자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사회는 현실, 체제, 환경이 만들어주는 거고 그건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거죠. 물론 반드시 건드려야 하는데 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여기에는 조금 더 용기가 필요해요. 현명하게 해야겠죠. 불합리는 짚고 넘어가야 하니까요. 한편 개인으로, 심리적 약자를 생각해요. 이렇게 풀어보고 싶어요. 보편성도 있는 것 같고, 확실히 그게 먼저인 것 같아서요. 이 두 가지, 개인과 사회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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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나의 집금희 저 | 창비
조선족 작가 금희(본명 김금희)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소설집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을 선보인다. 금희는 2013년 소설집 『슈뢰딩거의 상자』를 중국에서 출간한 뒤 2014년 봄, 계간 『창작과비평』에 조선족 사회의 탈북 여성 이야기를 다룬 단편 「옥화」를 발표하며 한국 문단에 신선한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현실을 뚫고 나가는 박력있는 서사와 섬세한 심리묘사로 조선족 사회에서 바라보는 탈북자 문제,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서 체감하는 정체성의 갈등 과정 등을 핍진하게 그려낸 일곱편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한국문학의 시야가 금희 이후 또 한번 넓어졌음을 절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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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