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때 롤링페이퍼 했던 걸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걸 읽다 보면 십 대, 이십 대 때 나는 참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큰언니처럼 푸근하다고 썼고 다른 친구는 막냇동생처럼 귀엽다고 했다. 털털함이 매력이라는 글과 여성스럽다는 얘기가 나란히 쓰여 있기도 했다. 잘 웃어서 좋다, 와 눈물이 많은 걸 보니 따뜻한 사람 같다, 는 말도 한 페이지에 적혀 있다. 롤링페이퍼는 대놓고 칭찬하라고 만든 거구나 싶어서 종종 꺼내어 보곤 한다.
청소년기를 지나고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면서 나는 극단적인 성향이 많이 줄어들고 점점 평균점을 지향하는 보통의 인간에 가까워졌다. 이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구나. 조금은 쓸쓸해하고 조금은 대견해하면서 천천히 둥글게 변해갔다.
임신을 한 뒤로는 주변에서 호르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태내에서 아기를 건강하게 키우고 출산을 돕기 위해서 다양한 호르몬이 나오는데 그 때문에 엄마의 신체뿐 아니라 감정에도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기도 하고 우울증을 앓는 사람도 더러 있다고 했다. 임신 중에는 호르몬의 지배를 심하게 받는다는데? 옆 사람에게 인터넷 기사를 보여주자, 조심하라는 소리지? 하고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특별히 우울하다거나 평소보다 걱정거리가 늘었다는 느낌은 없는데 눈물이 많아졌다. 인터넷의 어떤 기사나 사진만 봐도 코끝이 찡하고 마음이 울컥해서 견디기 힘들었다. 예전에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가상의 인물이 불행해지거나 죽는 걸 슬퍼했는데 임신한 뒤로는 실재하는 누군가의 안부와 고통에 지극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좋아하면서도 겁이 많아서 다가가 안거나 만지지 못했는데 아파트 주변을 배회하는 길고양이의 안부가 걱정되어 한동안 참치 캔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모피를 만드는 동영상을 본 뒤로 모피는 절대로 입지 말자고 다짐했고 사향 커피의 맛도 궁금해 하지 않기로 했다. 호르몬의 지배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금씩, 좀더, 생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생명이 있는 것들을 가여워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리고 그런 내가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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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소설가)
2007년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 같은 해 창비 장편소설상을 탔다. 장편소설 『판타스틱 개미지옥』 『쿨하게 한걸음』 『당신의 몬스터』를 썼고 소설집으로 『당분간 인간』이 있다. 에세이 『소울 푸드』에 참여했다."
rk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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