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취미는 뭔가요? 그 취미를 고수하느라 돈과 시간을 탕진하고, 대인관계에 위기도 겪어 보고, 결국 ‘미친놈’ 소리 들으며 포기 진영으로 방출됐을 때 남몰래 승리의 기쁨을 맛본 적이 있나요? 여기 그 ‘취미’에 목숨 건 네 남자가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취미가 아니라 취미를 구실 삼아 그들만의 놀이에 빠진 네 남자라는 표현이 적확할 것 같네요.
냉장고에 자물쇠를 결어두는, 특이한 재료로 요리하는 걸 즐기는 내과의사 아마노, 오로지 건담으로 인생을 풀어가는 정신과 의사 카네다, 목장갑을 끼고 추리소설을 읽는 자동차 세일즈맨 미즈사와, 그리고 취미를 찾아 심하게 방황 중인 화장품 회사 직원 도이. 그들이 만든 <취미의 방>은 연일 비밀스러운 냄새를 풍기며 관객들을 유혹하고 있는데요. <연극열전5>의 네 번째 작품은 극작가 코사와 료타의 <취미의 방>입니다. 연극 <키사라기 미키짱>을 봤던 관객들이라면 각오하고 들어섰을 그 방으로 함께 들어가 보실까요? 조금 망설여진다면 도이 역의 안재영 배우가 방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짝 알려줄 겁니다.
“대본에 코로 피리를 분다고 돼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나요(웃음).”
극 중 입이 아닌 코로 두 개의 피리를 화음까지 넣어 연주하는 도이 역의 안재영 씨는 연극 <취미의 방> 대본을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 일본 공연 중에 읽게 됐습니다.
“현지에서 일본 작품을 읽으니까 좀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읽었는데, 일본 작품 특유의 잔잔하면서 서정적인 느낌도 있고, 중간쯤 사건이 하나하나 터지면서 인물들이 의외의 대사를 치고 나오는데 재밌는 거예요. 그러다 또 반전이 있고. 대본을 무척 재밌게 읽었어요.”
어떻게 코로 피리를 불 수 있죠? 코피 나게 연습하셨나요(웃음)?
“연습을 무척 많이 해야겠구나 생각했는데 의외로 잘 되더라고요. 곡 자체는 정해지지 않아서 무슨 곡을 할지 결정하는 게 어려웠어요. 두 손으로 연주하면서 ‘솔라시도레’ 다섯 음 안에 해결되는 노래를 찾아야 했거든요. 조건에 딱 맞는 ‘떳다떳다 비행기’를 찾았는데, 도이라면 잘해야 할 것 같아서 이왕 연주하는 거 화음까지 넣었죠(웃음).”
공연 내 객석 반응이 굉장히 좋습니다. 무대에서 그 정도의 ‘합’이 이뤄진 걸 보면 연습실 분위기도 무척 좋았을 것 같은데요.
“정말 재밌었어요. 처음에는 사실 걱정 반, 기대 반이었어요. 왜냐면 다들 저보다 나이가 열 살 이상 많은 선배님들이거든요. 하지만 이 분들과 작품을 잘 끝내면 내 연기가 많이 늘겠다는 기대도 있었죠. 그런데 막상 연습에 들어가니까 다들 정말 편하게 대해주시고, 연기 부분에 있어서는 배우로서 존중해주셨어요. 많은 걸 배우면서도 재밌고 즐거웠던 것 같아요.”
워낙 치밀한 구조라서 누구 하나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크게 흔들릴 수 있는 작품인데, 한편으로는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어디까지가 실수인지 또는 애드리브인지 구분을 못하겠던데요.
“맞아요. 그런 묘미가 있고, 어느 정도의 실수는 작품의 성격상 용납되는 게 있어요. 한 번은 (서)범석이 형이 애드리브를 하셨어요. 그런데 너무 어이없는 애드리브라서 다들 웃음이 터져버린 거예요(웃음).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배우들마다 그 애드리브를 받아치는 거예요. 저는 너무 웃겨서 눈물이 나올 뻔 했어요. 워낙 형님들이 재치 있고 재미있으셔서 앞으로 어디로 튈지 모르겠어요.”
취미의 방. 여자를 제외한 남자들만의 공간인데, 그 공간을 지키겠다고 이 사태가 벌어진 거잖아요. 안재영 씨는 스물아홉, 아직 그런 공간의 필요성을 느낄 나이는 아닐 것 같습니다.
“아직 결혼도 안 했고 100% 공감은 못하지만,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인터넷에서 읽었는데, ‘형, 결혼하니까 좋아?’ ‘응, 무지 좋아. 여자친구가 집에 와서 같이 밥도 해먹고 TV도 봐. 그런데 자기 집에 안 가. 여자친구가 가면 게임도 하고 내 할 일 좀 하고 싶은데 집에를 안 가. 그게 결혼이야.’ 그 글을 읽고 많이 웃었거든요. 어렸을 때는 혼자 있는 시간을 못 참았던 것 같은데 이제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게 됐다고 할까요? 결혼을 해도 나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게 힘들어지면 이런 공간이 소중해지지 않을까...”
스포일러라서 자세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관객들이 공연장을 빠져 나가면서 작품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관객들이 이 정도면 배우들도 결말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하셨겠죠?
“많았죠. 대사를 넣자 빼자, 이 부분을 일일이 설명해야 하느냐 굳이 반전이 있어야 하느냐 정말 얘기가 많았는데. 결국은 취향의 차이인 것 같고 의견이 분분해서 대본에 충실하기로 결정한 거죠. 극작가가 관객들이 극장을 빠져나가면서 그렇게 여러 생각을 하기를 바랐다고 하더라고요. 그 의도를 살려주는 게 배우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어요.”
아마 가장 많이 받았을 질문일 텐데, 안재영 씨의 취미는 뭔가요?
“저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계획 없이 혼자 떠나는 여행이요. 홀가분하게 가방 하나 메고 버스터미널 가서 어디 갈지 정하는. 아직 해외여행은 많이 안 가봤는데 우리나라는 그래도 많이 다닌 것 같아요. 작년에는 속초를 시작으로 왼쪽에는 바다, 오른쪽에는 산을 두고 부산까지 갔어요. 바다를 실컷 보자는 마음으로 걷다 지치면 버스타고, 여기가 예쁘다 싶으면 내려서 구경하다 또 배고프면 먹고.”
그런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뭘까요?
“우선 혼자 생각할 시간이 많아요. 자연의 거대함과 아름다움도 마음껏 즐길 수 있고요. 바다를 보니까 잔잔할 때는 무척 잔잔한데 파도가 칠 때는 확실하게 치더라고요. ‘아, 나도 바다처럼 연기를 해야겠다.’ 그런 생각도 하고, 갈매기를 보면서는 ‘쟤는 날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뭐 이런 생각도 하고(웃음). 실제로 작년에 <여신님이 보고 계셔> 하는데 바다를 보면서 고향을 생각하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바다를 잔뜩 보고 와서 공연하니까 그때 봤던 바다가 객석으로 펼쳐지는 거예요. 정말 눈물이 나더라고요.”
올해는 그렇게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마음을 열 시간이 없었을 것 같은데요.
“네, 제 인생에서 가장 바쁜 스케줄을 보냈던 한 해인 것 같아요. 리딩에 워크숍까지 하면 거의 10작품을 했으니까요.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
연기했던 수많은 인물들에 접점은 있었나요? 보통 배우들은 어떤 인물을 맡느냐에 따라 일상의 기분도 달라지잖아요. 그렇게 모가 나거나 어두운 인물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죠. 그나마 많이 달랐던 캐릭터가 <비스티보이즈>였는데, 개인적으로는 연기하면서 재밌었고. 그 모든 캐릭터들의 접점이라고 한다면 아마 순수함이 아닐까 싶어요. 사실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모두 순수한데, 특히 제가 올해 맡았던 인물들은 표현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 순수하지 않았나. <취미의 방>에서 도이만 해도 자신의 취미를 간절히 찾고 싶어 하잖아요. 처음 도이라는 캐릭터를 잡을 때 루저거나 다운된 친구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대본을 몇 번 읽으니까 도이는 취미를 잘 하고 싶어서 너무 열심히 했던 거예요. 그래서 여유 있게 즐기지 못했던 게 아닐까. 순수한 인물인 거죠.”
안재영 씨는 배우라는 일을 잘 즐기고 있나요? 일 년에 예닐곱 작품을 하자면 즐기지 않으면 못할 것 같은데요.
“엊그제 공연하러 대학로에 오는데 불과 몇 분 사이에 아는 배우며 선배, 연출님을 연달아 만났어요. 학교 다닐 때 대학로에 포스터 붙이러 온 적이 있는데, 그때 ‘아, 여기를 공연하러 오가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던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어느새 대학로에 이렇게 아는 사람이 많아지고, 나도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배우가 됐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행복하더라고요. 저는 하고 싶었던 일을 잘 즐기고 있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큰 의미를 부여하는 서른 즈음인데, 12월이니 한 해를 보내고 또 다른 한 해를 맞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시겠네요.
“연기 시작할 때 빨리 서른 살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서른 살이 되면 연기를 엄청 잘할 줄 알았거든요(웃음). 저는 평생 배우 하는 게 소원이에요. 올해 바쁘게 작품하면서 많이 배우고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지만, 내년에는 한 작품 한 작품에 더 정성을 쏟고, 더욱더 깊어지고 여유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찾아 주시고, 기억해 주시는 것에 저는 열심히 잘 하는 것밖에 보답할 길이 없으니까요.”
인터뷰 내내 무척이나 신중하고 점잖게 답변하던 안재영 씨는 그 모습처럼 데뷔 이후 조용히 하지만 꽤 묵직하게 주목받는 소극장 공연에서 주목받아 왔습니다. 쟁쟁한 선배들과 <취미의 방>을 공유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취미의 방>을 드나들면서 이미 뮤지컬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를 준비하고 있고요. 그나저나 취미의 방. 무척 흔한 단어의 조합인데 읽을수록 근사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목에 걸맞게 ‘취미’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흥미진진함과 ‘방’이 갖는 은밀한 폐쇄성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를 그야말로 재미난 일이 가득한 아지트로 만들어버렸네요. 코사와 료타는 ‘연극 <취미의 방>은 배우들이 연기를 주고받고 부딪치는 것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이네요. <취미의 방>에서는 연기가 아니라 물오른 배우들의 도발과 돌발, 재치와 끼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게 연극의 재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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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
앙ㅋ
2015.01.25